자본주의는 그 이름 자체로 경이롭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 과학기술, 생활양식과 풍요로움 모두가 자본주의 없이는 이룩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모든 불편한 현실들 가난, 억압, 기아 등도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이처럼 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바다를 항해하는 인류라는 배를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폭풍과도 같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 관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쏠려있다. 유튜브는 성공팔이들의 성공에 대한 영상과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에 점령되었고 인터넷 책방의 인기 서적은 “나는 어떻게 하면 ~~~ 을 벌었는가?”와 같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에 대한 성향은 결과지상주의 적일 뿐만 아니라, 뭔가 중요한 도덕적 성격이 빠져있는 듯한 기분을 준다. 이러한 현상이 만드는 질문은 예사롭지 않다. 사회나 타인에 대한 배려나 감사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다른 모든 시스템을 넘어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가? 도덕적이면서 지속 가능해 보이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사람들에게 선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에, 자본주의가 파멸로 가는 도중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정상궤도로 돌려놓을 수 있는가? 막스 베버의 역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러한 질문들의 시작이 되는 답을 내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모든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현대 자본주의 탄생에 대해 냉철하고 상식적이지 않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만드는 그의 생각은 매우 시기적절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고민과 성찰을 부여한다.
(1) 신교, 구교 그리고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는 “왜 자본주의가 전통적으로 부유했던 이탈리아나 스페인이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미국과 같은 후발주자에서 발전되었는가?”이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책이다. 막스베버가 찾은 답은 종교다. 막스베버의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의 계보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가톨릭 없이는 유럽의 중세 시대를 이해할 수 없다. 유럽의 중세는 가톨릭이 지배했던 시대이다. 가톨릭은 종교에서 종교집단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가톨릭적 믿음 속에서 죄를 짓더라도 신에게 구원받을 방법은 있다. 믿는 것도 구원받는 원을 받는 한 방법이고 교회에서 면죄부를 사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이러한 종교적 사유는 가톨릭의 힘을 어느 때보다 강하게 만들었고, 이는 타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교회의 타락화에 반발해서 일어난 것이 종교 개혁이다. 종교 개혁은 의문을 가졌다. “왜 저렇게 타락한 인간들이 인류의 구원에 키를 지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마르틴 루터는 1517년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했고 이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마르틴 루터의 행동은 가톨릭을 신교와 구교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구교는 여전히 개인의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교회가 구원해질 수 있다는 교회 중심적 사상을 가졌고, 신교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모태는 “칼뱅주의”를 말하는데, 이 사람들이 구원될지 안 될지는 이미 정해져져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예정설”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2) 칼뱅주의는 어떻게 근대적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 “근대적 자본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 자본주의 이전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가 있었다. 하지만, 막스 베버가 보기에 그런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발달을 끌어낼 수도 없다. 예전에는 모험에 의한 발전(신대륙을 발견하면 황금과 노예에 대한 새로운 공급으로 발전 가능)과 피렌치 가문과 같은 금융업(부를 축적할 수는 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발전을 이끌기에는 충분치 않다)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존재했지만, 이는 계획적이거나 지속적인 자본축적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와 자본 축적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기에 장기적 계획의 수립과 회계와 같은 새로운 수학적 방법을 도입해 자본 축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가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 등에서 발생했고 이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발전된 사회로 우리를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뱅주의는 왜 특별한가?
칼뱅주의의 예정설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독특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에 따라 신의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강력한 예정설이 인간에게 주는 인식은 명확하다. 바로 “불안감”이다. 칼뱅처럼 강력한 정신의 소유자는 “나는 구원되었다”라는 강력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혹은 윌리엄 제임스가 쓴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에 나오는 종교적 체험을 경험했다면 칼뱅과 같은 강력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고 이는 그들을 외롭고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이러한 “불안감”이 역설적으로 인간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이 구원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행동만이 내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무리에 속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정신적 독립이나 완전한 자유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기에 자기 생각과 자유를 해치는 무리에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칼뱅주의”는 2가지를 이야기했다.
첫째, 하느님의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소명이다. 이는 “소업으로서의 직업”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주입했고 사람들은 어떤 직업이든지 그 직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소명일 뿐만 아니라 더 열심히 노력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 구원의 증표라고 보았다. 또한 칼뱅주의는 후에 분업과 자본축적과 재투자를 강조해 자본주의의 기초를 만든 애덤 스미스의 사상적 뿌리가 된다.
둘째, 사람은 신에 비해 미천하기 때문에 벌어들인 돈을 사용해 자신을 과시할 목적으로 낭비하는 것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칼뱅주의”를 따르는 자본가의 목적은 사치품 구입을 통해 과시적 낭비가 아니라 자본을 재투자해 성공적인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한 자본가는 자본을 낭비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았고 계속해서 재투자해 사회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자본가의 재투자와 자본가의 지속적인 사업적 열망은 자본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 로버트 하일브러너는 자본주의 성공의 키를 초기 자본의 축적으로 보았는데, 자본주의의 먼 미래의 성공을 경험하지 않았던 시대의 자본가들이 지속적인 자본을 투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 시대야, 자본의 무한정 축적에 대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이 자본 재투자를 종용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시대는 그렇지 않다. 자본의 지속적 재투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장밋빛 미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상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업의 성공을 과시적 낭비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중세 시대를 상상해 보라. 금은보화 엄청난 성들이 사람들의 성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칼뱅주의는 자본가가 기댈 수 있는 사상적 언덕을 제공해 주었고 이는 자본의 지속적인 재투자로 이어진다. 또한, 성공한 자본가가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업을 하는 것을 막스베버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본가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레고리 클라크는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에서 사업가적 기질을 가진 계층의 경제 활동이 사회발전에 끼치는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가들의 지속적인 사업 성공을 위한 노력은 지속적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새로운 자본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막스베버의 주장이다.
막스베버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존해서 자본주의를 설명하려는 태도가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기심은 심리적인 요인으로 여러 방향으로 발현될 수 있다. 근대 자본주의 전 시기의 노동자들의 이기심은 “더 잘살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 삶을 영위할 정도로만 수입을 유지하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는 형태”로 발현되었고 책은 쓰고 있다. 따라서, “이기심보다 한 차원 높은 형태의 정신이 사회의 에너지를 끌어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또한, 이러한 이기심은 서로 엉켜있고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근대자본주의적 법치국가의 발현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종교는 사회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모으고 과거의 모자란 상상력에 미래의 거대한 부라는 상상의 씨앗을 뿌렸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한 법치국가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왜 사람들은 불안감을 극대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선택했는가?
책에 나와 있지 않지만, 내 생각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중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르네상스로 인해 사람들은 인본주의라는 사상에 매료되었고 이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변화가 따라왔지만, 여전히 종교의 중요성은 그 시대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 시기에 인본주의에 매료되어 구교에 대한 의심과 함께 개혁이라는 횃불 아래 모여들었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구심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연적으로 사람들을 신교라는 새로운 종교적 색채를 받아들이게 했다. 예를 들어, 인본주의 사상을 앞세워 종교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비난받고 심지어는 사회에서 도태될 수 있었기에 신교가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더라도 구교보다는 나은 세계상을 제시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교를 선택한 거 같다.
(3) 내 생각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적 윤리가 거대 자본주의의 씨앗이 되었다는 막스 베버의 논리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현재 사회는 세속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라는 분야가 반자본주의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자본주의의 태동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첫째, 위에 말한 것처럼 “상상력의 부재”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다. “호모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리리는 “허구를 믿는 힘”이 인간 발전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허구를 믿는 힘”은 지금의 고통과 인내가 미래에 더욱 큰 열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예상 가능 한 한도 내에서 가능하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라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이 우주로의 출발을 가능케 했고, 보어가 관찰해 온 여러 가지 다양한 원자의 모형이 보어가 그 만의 원자 모형을 가능케 했다. 자본의 무한한 축적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바로 이 ‘상상력의 부재’를 메워준 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였다.. 이는 현재는 왜 종교적 믿음이 없이도 자본주의가 존재하는가? 에 대한 대답이 된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제까지 축적해 온 발자취를 통해 높은 상상력을 인간에게 부여했고 이러한 상상력 자체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종교적이지 않으니 베버의 논리가 틀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둘째, 기술의 발전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진적으로 발전하고 누진의 정도가 쌓이면 되돌릴 수 없는 발전 속도를 가지게 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에는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강제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현재를 즐길지 아니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할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누진적으로 발전한 기술은 사람들이 종교적 강제성 없이 자본의 축적을 통한 기술의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사회의 에너지를 재배치한다.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는 기술에 대한 존경과 경외를 가져왔고 이는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는 집단의 발언과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정부 각 계층에 기술의 발전을 중요시하는 관료들에게 자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을 활용해 돈을 번 사람들이 기업의 주요자리도 꿰차게 되었다. 예컨대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는 기술 혁신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며 종교적 강제성 없이도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초기에 누진적으로 발전한 기술이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고 기술 발전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사회의 요직에 참여하게 되면서 기술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셋째, 현재 자본가들은 사업적 성공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업의 성공이 주는 자기만족과 자아 성찰이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의 원인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외적 욕망뿐만 아니라 내적 욕망이고 이러한 내적 욕망의 힘은 외적 욕망보다 크고 지속적이기에 여전히 자본의 재투자와 축적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업의 성공에서 자기만족과 자아 성찰이라는 내적 욕망의 형성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라캉이 말했듯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하지만, 사업의 성공과 부의 축적이 사회의 공통된 욕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욕망을 바람직한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형성이 필수적이다. 이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긴 세월에 걸쳐 사회적 분위기가 여러 관계된 신화 그리고 미디어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소명으로서의 직업”과 “자본 축적”을 강조하기 전까지, 사업의 성공과 부 축적은 부정적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악마의 축제’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사업의 성공은 사회 공통의 욕망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배적인 종교적인 교리가 되고 이를 따른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업의 성공과 그에 따른 자본 축적은 사회 공통의 욕망으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지금 자본가들을 움직이는 내적 욕망의 근원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찾을 수 있고,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의 태동뿐만 아니라 현재를 유지하는 엔진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것이다.
막스베버는 그의 저서에서 “어떤 현상의 종교적인 뿌리가 말라죽어 감에 따라 슬그머니 공리주의적 사고가 대신 들어와서 그 현상의 의미를 바꾸어놓는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현대 자본주의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공리주의라는 잣대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경제 정책이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경제 정책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제 성장이라는 답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우리는 사회 취약층을 도와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에도 경제가 성장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슬그머니 한 부분을 차지한다. 과연 바람직한가? 공리주의는 사회에 필요한 복잡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슬그머니 옆으로 치우고 공리주의라는 얄팍한 사상으로 사회를 이끌어 간다. 사회의 자본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은 고귀한 이성의 개입과 치열한 의견교환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 전반이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사회는 다양한 길을 차단한 채, 오직 하나의 길만이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강요한다. 이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사회 가치 설정에서 배제되기에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하고 패배감과 수치심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삶의 보장조차 힘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숫자로는 여러 가지 인간적 현상과 가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의 시선 속에서 그들은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취급된다.
또한, 공리주의적 사회는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끌어낼 뿐이다. 사회는 지속적 경제발전을 통해서 대부분 선진국의 가난에는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재앙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양산하고 그에 따른 차별화된 분배가 사회발전을 가져오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부자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장 좋은 재화를 소비할 수 없다. 또한, 자본주의의 행복은 자기 파괴적이다. 페라리를 타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현대를 타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캐비어를 먹으면서 행복한 이유는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성향은 사람들이 자본이나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로의 자아실현의 통로를 열어줄 때만 지속 가능하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사회는 다른 모든 통로를 막고 오직 이 길만이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고 말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했던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통한 파괴와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공리주의적 사고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상적 뿌리의 재발견이 시급하다.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뿌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종교적 뿌리가 대안이 될 수 없다. 종교적 뿌리가 아니라 공동체 혹은 인문학적 교육을 통한 여러 가지 다양한 가치의 축적과 그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존중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뿌리를 찾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라는 나무는 말라비틀어지거나 소수만을 위한 비인간적이고 모순적인 체제로 전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