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케인즈는 ‘유효수요’와 ‘정책의 역할’을 통해 불황의 장기화를 끊을 수 있는 새 틀을 제시했다.. 경제 위기는 대체로 실업을 높이고 교육기회를 축소시키며, 재정여력을 약화시켜 복지 축소 압력을 만든다. 또한 정부재정에 악영향을 미쳐 정부의 복지정책의 축소를 가져왔다. 그래서 경제 침체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마련한 케인즈의 이론은 매우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표되던 고전 경제학파의 이론에 맞서 케인즈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다. 이는 무기력하게 경제의 변동에 희생되던 인류를 능동적인 주체로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게 허락했다. 케인즈는 1936년에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하 일반이론)을 출판했는데, 이는 1930년에 발생한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경제 침체에 허덕이고 있는 시기였다. 그는 그의 책이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케인즈 혁명”이라고 불리는 그의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졌고, 그의 자신감처럼 그의 처방은 전후 경제운영의 표준이 되었고, 다수 국가가 불황 대응의 정책도구 상자로 채택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이론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구닥다리 경제 이론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경제 위기와 코로나바이러스 경제 위기에서 세계를 다시 구해내면서 그 중요성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정부 재정 정책과 낮은 이자율을 동반한 중앙은행의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세계는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케인즈가 주장한 정부 개입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최근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케인즈의 이론을 더욱 자세히 이해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의 이론의 무용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에 유권자들은 케인즈의 “일반이론”을 이해하고 각자의 이해에 맞게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고전학파 이론이란?
케인즈는 “일반이론”의 첫 장에서 그 역시도 예전에는 고전학파의 열렬한 신봉자라고 말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고전학파 경제 이론이란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설명된다. 그에 따르면, 시장경제는 정부의 개입이 없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고 이는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킨다.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이 요리사가 요리를 하게 하고, 이 요리를 구매하기 위해 다른 시장 참여자가 노동을 한다. 시장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질서를 유지한다.
첫째, “보이지 않는 손”은 고용 측면에서도 활동한다. 고전학파는 임금이 유연하게 조정된다는 가정 하에서, 초과공급(실업)이 임금하락→고용회복으로 자기조정된다고 본다.
둘째, 또한 이들은 “세이의 법칙”을 주장했다. “세이의 법칙은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만든다’는 정식으로 요약되지만, 유효수요(구매력·구매의지) 문제를 간과한다. 신발을 만드는 회사는 신발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하고 자본에 대한 이자를 지불했다. 이러한 회사의 지출은 모두 새로운 수요로 전환되고 따라서 모든 공급은 소비된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명목임금과 고용, 저축과 투자 등 여러 가지 다른 고전학파만의 이론이 존재하지만 이는 후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따라서,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에 경제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3) 불평등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경제 불황
하지만 이러한 시장의 자유로운 효율성 추구는 고전 경제학파들의 입장에서도 많은 문제를 양산한다.
첫째,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실업 혹은 불평등에 대해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실업이 발생하면, 그만큼 노동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고 이는 노동자의 봉급을 하락시킨다. 줄어든 봉급은 그만큼의 노동 수요를 증가시킨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회사의 미래 수익을 상승시키게 되고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증가한다. 이러한 시장의 자율적인 흐름은 고용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의 흐름은 문제에 대한 즉각적 해결책은 되지 않고 그 기간 동안 노동자의 고통은 불가피하다.
둘째, 리카르도가 그의 지대 이론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은 필연적이다. 리카르도에 따르면, 토지를 경작할 때 비옥한 토지가 먼저 경작되고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덜 비옥한 토지는 나중에 경작된다. 비옥한 토지는 높은 생산성으로 인해 같은 투입대비 산출은 척박한 토지에 비해 높다. 따라서, 같은 행동일지라도 비옥한 토지를 소용한 개인이 올리는 수익을 월등히 높다. 이는 경제의 불평등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경제적 불평등의 필연적 발생은 아담 스미스, 맬서스,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슘페터 등 많은 고전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셋째, 따라서 대부분의 고전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지속성이 아니라 언젠가는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거나 정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닫힌 체계로 보았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열린 체계라면 지속적 성장을 위해 소비와 분배 그리고 공급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소비자는 계속해서 소비하고 그에 발맞추어 자본가는 공급과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이 없는 순수한 시장은 무한한 경쟁을 통해 처음에는 노동자를 그리고 후에는 자본가를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가 파멸하거나 혹은 성장이 침체되기 전에 발생하는 경제 불황은 자연적으로 해결되지만 이는 구멍 난 배에 얕은 땜빵을 하는 것일 뿐, 구체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문제는 고전경제학파의 이론 중 “보이지 않는 손”과 시장의 문제 해결이라는 이론만 쏙 빼와서 기득권의 이득을 방어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다.
(4) 고전경제학파의 철학적 기반과 마르크스
경제라는 큰 파도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고전경제학파의 경제에 대한 해석은 매우 수상하다.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등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인물들은 이성중심주의적 세계관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로 대표되는 이성중심주의는 자연은 정복 가능한 산물로 생각했다. 그들은 신중심 세계관을 가진 중세 봉권사회를 타파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귀결된다. 이제는 신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인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한다. 자연을 수학적,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즉 수량화하고 계산할 수 있다면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성중심주의의 아들들이 왜 경제만은 다르게 해석했을까? 왜 경제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따라야만 하는 복종의 대상이 되었을까??
첫째, 아담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기의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종속적 경제관을 이해할 수 있다. 이성중심적 세계관이 인간 이성과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맞으나, 이러한 세계관이 사회의 중심적 세계관은 아니었다. 오히려 각 국가들이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국가의 영향력을 확대하던 시기였다. 국가는 국내의 경제를 발판으로 대외정책을 실시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개인의 경제활동은 개인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던 경제학자들은 제한적 승리를 얻으려 한 것이 아닐까? 경제를 분석하고 이해하여 정복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상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현재 경제 시스템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진적 공학적 사상을 펼친 것이다. 물론, 이들의 사상은 성공을 거두었고 개인의 자유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며 세상을 변혁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둘째, 루카치가 그의 저서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주장한 것처럼, 칸트식 세계관의 영향일 수도 있다. 칸트는 물자체와 인간의 인식 사이에 커다란 강을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리는 그의 사상은 물자체는 자연 그대로 존재하고 인간은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과 지성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과 지성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등에 의해 세상을 인식한다. 그 범주에 들어올 수 있는 것만 선택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빨간색 물체를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빨간색은 물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빛의 파장과 우리의 시각 기관이 상호 작용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적 세계관은 인간의 고유한 자유는 인정하지만, 물자체라는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의 존재 또한 인식한다. 이는 고전주의 경제학파의 사상에 딱 들어맞는다. 고전경제학은 경제를 인간이 바꿀 수 없는 객관적 ‘질서’처럼 이해했고, 이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과 유사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 안에서 발생하는 현상, 즉 인간의 감성과 지성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야 또한 존재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고전주의 학파는 인간을 경제에 대해 수동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 산정하고 경제가 일으키는 모든 문제점, 불평등, 불황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도 매우 흡사하다. 제우스의 폭정에 저항하는 인간, 하지만 끝내 제우스가 만든 세계관이 승리하고 수동적 인간은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른 해석을 했다. 물론 마르크스의 경제관 또한 자본주의가 파멸의 길로 간다는 점에서는 고전학파와 비슷한 수동적 결말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경제와 역사에서 사람의 존재를 주장했다. 역사는 하부구조,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영향을 받은 인간의 모든 것을 생성해 나간다.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이 경제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마르크스적인 너무나도 마르크스적인 케인즈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경제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를 구원하게 된다. 왜냐하면 케인즈는 경제에서 사람을 보고 그 통찰력을 통해 케인즈 혁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케인즈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시장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경제에 대한 반응이 모인 인간적 활동의 장이다. 따라서, 고전학파의 기계론적 경제학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라는 것이다.
첫째, 케인즈는 유효수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효수요란 실제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지고 구매 의지를 가진 수요를 말한다. “세이의 법칙”을 따르는 고전학파에 따르면, 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 하지만 공급이 수요 하는 수요가 유효수요는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신발을 공급하기 위한 고용은 수요를 창출하겠지만 노동자에게 너무 적은 봉급을 지불한다면 노동자는 봉급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미래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예상한 노동자는 긴축 재정을 통해 봉급을 모을 것이다.
둘째, 케인즈는 저축이 투자로 이어진다는 고전학파의 논리를 부정한다. 오히려 과도한 저축은 미래 수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투자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투자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금이 미래에 더 큰 현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을 때 발생한다. 하지만 만약 시장 참여자들이 저축을 통해 미래 수요가 감소한다면 저축된 돈은 시장에 투자되지 않고 은행에 남아있을 것이다.
셋째, 비록 저축이 투자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투자가 현명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케인즈는 투자는 미인대회에서 미인을 고르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미인대회는 절대적 미의 기준에 따라 미인을 고르지 않는다. 미인대회에서 미인 선발의 기준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미의 기준을 가진 미인을 고르는 것이다. 따라서, 미인대회는 그 시대상 혹은 대중들의 선입견이 반영된다. 진실은 없고 인간의 선호도와 반응이 기준이 된다. 투자 또한 마찬가지다. 투자 시장에서 투자자들은 앞으로 가격이 오를 수 있는 회사를 찾는데, 이런 회사들이 꼭 유망한 회사는 아니다. 오히려 유망하지 않지만 소문에 의해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회사는 과도한 투자를 받는다. 그리고 이 회사의 민낯이 드러날 경우 투자금은 증발하게 된다.
따라서, 경제의 사이클은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전학파의 이야기처럼, 경기 침체는 노동자의 수요 감소로 인해 촉발된 노동비 감소 그리고 투자 증가 등의 기계적 순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기 침체는 더욱더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경제에 대해 부정적 전망을 가지게 한다. 부정적 전망은 투자 수요를 움츠리게 하고 이는 고용에 악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새로운 투자는 경기 부양이라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정부만 가능하다. 대부분의 민간 기업들은 경기 침체 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투자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사업가들은 경기 침체 시에 손해 볼 수 있는 투자는 과감하게 배제하고 시기를 기다릴 뿐이다. 따라서 고전학파의 주장과 다르게 정부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기본 전제로 프롤레타리아의 단결과 유토피아를 꿈꾼 마르크스가 대공황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한 케인즈 이론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게 보인다. 하지만 고통에 신음하는 노동자들을 구원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둘의 열망은 경제학에서 객체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을 주체로 승격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6) 케인즈와 지금
케인즈 학파의 이론은 1970년대 발생한 오일 쇼크로 인해 그 정당성을 상실하고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학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2008년 경제 위기와 코로나바이러스 경제 위기를 통해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제학의 흐름 전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경제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오일 쇼크는 단순한 유효수요 부족의 문제로 발생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원자재인 기름 가격의 폭등이 그 원인이다. 기름 가격의 폭등으로 발생한 경제 문제를 정부의 적극적 참여로 인해 해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부의 적극적 참여는 사람들의 수요를 자극하는데 이는 기름 수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상품 수요만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는 가뜩이나 부족했던 기름 공급 부족에 기름을 부었고, 인플레이션과 함께 경기 침체가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양산했다. 이후, 경제의 패러다임을 손에 넣게 된 신자유주의는 극단적인 자유시장을 추구했고 이는 오히려 불평등 문제를 발생시켰다. 또한 탈규제는 2008년 미국발 하우징 버블(housing bubble)의 원인이 되었다. 만약 정부의 규제가 있었다면 파생상품 혹은 NINJA(No Income, No Job, Asset:의 약자로 무자격 대출자를 뜻한다)에 대한 무분별한 대출은 없었을 것이고 하우징 버블 또한 없었을 수 있다. 따라서 경제 정책은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고정된 정답은 없고 상황에 맞는 조치만 있다.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지금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둘째, “유효수요의 존재는 아직도 중요하다”이다. 정부의 개입 없이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효수요란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기에 수요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확실한 투자의 존재는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은 민간 투자에 의지하고 정부의 투자는 최소화한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Economist에 따르면,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투자는 기술 발전뿐만 아니라 유효수요 창출에 큰 기여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의 통화 재정 정책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은 큰 문제를 동반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플레이션은 정부의 과도한 지출로 인한 결과다.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렸다. 과도한 정부의 지출은 화폐의 공급을 동반했고 이는 밀턴 프리드먼의 말처럼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냈다. 이에 작은 정부로 돌아가자고 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케인즈 경제학에 대한 불신을 내보이는 사람 또한 많다.
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옳지 않다.
첫째, 정부의 확장적 재정 정책이 우리를 경기 침체에서 구해준 것은 확실하다. 2008년 하우징 버블은 인간의 탐욕이 나은 집값이 세계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이는 미국인들의 집과 생활 터전뿐만 아니라 미국과 경제적으로 교류하는 경제적 후진국 노동자의 삶마저 절망의 늪으로 빠뜨렸다. 이러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용이 인플레이션이라면, 당연히 우리 사회가 감수해야 하는 비용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인플레이션의 고통이란 일시적인 것이지만, 경기 침체로 인해 파괴된 삶의 사이클은 되돌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시, 직장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다시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 또한 가족들 또한 무직의 고통을 나누고 특히 자식들은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해 사회의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케인즈 이론을 비판하는 또 한 가지 논거로 “샤워실의 바보”를 들 수 있다. “샤워실의 바보”란 샤워실 물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 샤워기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적절한 물의 온도를 찾지 못하고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계속해서 트는 것을 말한다. 케인즈 이론의 맹점은 언제 그리고 얼마만큼의 정부의 개입이 적절한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와 정도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론의 정확성을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인플레이션의 문제가 정말 케인즈 이론의 문제인가? 최근 인플레이션은 재정·통화의 완화, 공급망 충격, 서비스 재개 수요가 결합한 결과이며, 일부 국가는 출구 타이밍·강도가 정치일정과 얽히며 대응이 지연됐다. 정치적 입지의 강화를 위해 정치인들은 확장 정책이라는 달콤한 시럽을 놓지 못했고 지금의 사태에 이르렀다.
(7) 결론
케인즈의 유령은 마르크스의 유령만큼이나 강력하다. 신자유주의, 시카고학파 등 어떠한 주술사도 케인즈의 유령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케인즈의 유령은 스산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빙의되어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경제에 정답은 없다.” 케인즈 이론도 상황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있는 수단일 뿐, 궁극적 해답은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의무는 확실하다. 보다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진단을 내려야 한다. 어떠한 정치인도 우리의 표를 사용해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하게 지식을 기반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 복잡해지는 사회에 정보의 홍수에 우리는 허우적대고 있다. 정보의 홍수에 맞서 나아가는 방법은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이 의무이자 우리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