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진실』은 폴 크루그먼이 대중적 오해를 짚고 자신의 통찰을 덧붙인 에세이 모음집이다. 그는 특히 두 가지 핵심 주제에서 대중이 빠지기 쉬운 오해를 비판한다.
첫째: 국제 경쟁력.
크루그먼은 ‘국가 단위의 국제경쟁력’ 담론을 신기루에 가깝다고 본다. 집착은 성장과 후생을 해칠 수 있다. 폴 크루그먼은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리카르도의 비교우위에 따르면, 모든 분야에서 국가 경쟁력을 갖춘 나라라고 해도 모든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 비교적 생산 우위에 있는 물건을 수출하고 나머지는 타국에서 수입해 와야 한다. 따라서,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 타국과의 무역을 줄이고 본국의 산업 발전에만 집중하는 나라는 필연적으로 낮은 경제 성장을 기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역흑자를 위해 대외무역을 축소한다면, 본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가격이 비싸거나 혹은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쓸 수밖에 없고 이는 결과적으로 자국의 생산성과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둘째, 단기 고용은 총수요·통화정책에, 장기 고용구조는 생산성·기술·교육에 더 민감하다. 특정 산업의 일자리 감소가 곧 무역적자의 탓은 아니다. 아무리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어도, 이자율을 높이면 국내의 일자리는 줄어든다. 왜냐하면, 이자에 따라 미래의 수익에 부정적인 예상을 하는 개인과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다. 국내의 제조업 혹은 농업에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이유는 무역에서 적자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생산성이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제조업에 대한 수요는 일정한데, 생산성이 높아진다면 필연적으로 그 분야의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셋째, 폴 크루그먼은 잘못된 지식을 퍼뜨리는 경제학자 또는 세미 경제학자의 존재를 들고 있다. 이들이 무지에 의해서 혹은 자기나 자기가 속한 정치적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사실이 아닌 경제학 가설을 퍼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팩트풀니스에서 이야기하는 직선 본능, 부정 본능, 위기 본능 등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기본적인 경제학적 사실에 어긋나는 정책에 동의하도록 호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폴 크루그먼의 생각은 무엇인가? “국제 경쟁력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국내 총생산을 이끌어 올릴 것인가?”이다. 무역적자던지 흑자던지 국내 총생산이 계속해서 상승한다면, 국내 일자리는 자연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그에 따르는 정부의 세수는 충분히 확충될 것이다. 이는 시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은 제공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활발한 무역과 자국민의 생산성 향상 그리고 적절한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제3세계의 성장은 선진국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중국을 위시한 제3세계의 성장은 눈이 부시다. 제3세계의 성장이 마치 선진국과 그 시민들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눈부신 성장은 언젠가는 선진국을 압도할 것이고 그 순간, 선진국은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은 “myth of Asian's miracle”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아시아 경제 즉 제3세계의 성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냉전 시대에도 구소련의 눈부신 성장 속에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위협을 느꼈었다. “구 소련의 한 장관은 ‘서구를 정복할 것’이라는 경제적 자신감을 드러낼 정도로 초기 경제 성장은 눈부셨다. 하지만, 초반 구소련의 경제성장은 국가 생산성의 향상을 통한 성장이 아니라 단순한 자원의 재배치 즉, 농부들을 공장으로 배치시키고 놀고 있던 자본을 산업에 투자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자원 재배치는 곧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소련은 경제적 취약성과 구조적 한계로 내부에서 붕괴했다.
폴 크루그먼은 아시아의 4마리 용도(대한민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비슷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 눈부신 성장세는 단순한 자본의 재배치의 결과이지 유의미한 생산성 상승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제3세계의 눈부신 성장에 현혹되어 자유무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후 한국·대만·싱가포르는 인적자본·혁신·글로벌 밸류체인 내 업그레이드로 생산성 축을 강화하며 소련과 다른 궤적을 보였다.. 홍콩은 중국과의 합병으로 인해 경제성장의 미래를 답보할 수는 없지만, 나머지 3 국가는 아직은 소련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3국과 모두 국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국가 정책을 빠르게 실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들 국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중진국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대한민국 싱가포르 대만은 잘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진실은 18년 전, 1996년에 쓰인 책이다. 1996년 이후, 우리는 9/11, 미국발 경제위기, 코로나 등 굵직굵직한 경제 정치 위기를 겪었고, 이는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진실이 2024년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폴 크루그먼의 이 책은 지금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미 중 무역전쟁은 폴 크루그먼의 국가 경쟁력 비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며, 동시에 SNS와 인터넷 뉴스의 급속한 확산은 에코 체임버, 거짓 뉴스, 확증 편향 등을 유발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실에 대한 의미를 어느 때보다 더 훼손시키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전쟁은 국가 경쟁력이 중요하다는 고전적 경제학적 오류에 편승한 보호주의 정책이다. 중국의 환율 조작과 자국 기업 밀어주기 그리고 저작권법을 무시한 기술 베끼기 등으로 엄청난 성장을 했고, 시진핑이 중국의 실질적인 제1 권력으로 부상한 후에 중국은 미국과 세계 1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이에 질 수 없는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과 미국 기술 중국 수출과 미국 자본의 중국 기술 투자 금지 등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의 책은 이러한 대립은 문제라고 주장한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양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는 미국 시민들의 일자리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일부 분석은 대중 규제가 바이오테크 협업·데이터 흐름을 위축시켜 신약 개발 속도를 늦출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또 IRA가 중국산 저가 EV의 진입을 막아 단기적 탄소감축 비용을 높일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국제적 긴장이 경제 성장과 환경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첫째, 지금 미국과 중국의 싸움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독재주의의 싸움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끼리의 싸움은 다양한 국제적 협약과 협력 그리고 시민 간의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상생이 되는 정책을 만들 수 있지만, 독재와의 싸움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중국의 지속적인 대만에 대한 위협이 보여주듯이 이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우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억압한다. 또한, 민주주의와 다르게 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는 평화와 지속적인 발달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자의 정치적인 이익 즉 내부의 독재자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적 위기를 자초한다. 따라서, 지금의 국제관계에서는 국가경쟁력은 중요하다.
둘째, 비교우위의 중요성은 무역국 간에 정당한 방법으로 무역이 이루어질 때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은 다르다. 중국은 의도적인 환율 조작 및 기술 훔치기 그리고 자국의 커다란 시장을 활용해 극단적으로 협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 자국의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자국 기업과의 동반관계는 필수 그 결과, 중국계 파트너 회사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기술을 전수받기도 한다. 또한, 자국 기업이 외국에서 비즈니스를 통해서 얻은 정보들은 중국 정부의 접근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통해서 타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기도 한다. 따라서 ‘비교우위 = 항상 상호이익’ 명제는 공정성·안보·환경 외부효과의 조건이 충족될 때에 더 성립한다.
셋째, 자유무역의 열매는 달지만 그 열매가 모든 시민들에게 주어지고 있지 않다. 자국의 생산성 상승과 통화정책이 무역에서의 흑자와 적자 상황보다 더 크게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외국으로 공장 이전이 일자리를 빼앗아 간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본래 자본의 재배치와 비교우위를 통한 산업의 재배치를 통한 경제성장의 열매는 세계화의 피해자들에게 피해보상의 의미로 혜택을 부여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소득 불평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능력주의의 깃발 아래 직장을 잃어버린 중산층은 존중과 재교육은커녕 멸시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은 정당한 세금 납부를 통해 베푸는 기업활동보다는 조세회피처로의 도피 혹은 정부를 협박하거나, 정치적 활동을 통해 다국적 기업에 유리한 세율을 만들도록 정부를 회유하고 있다. 이는 자유무역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린 국내의 노동자들에게 더 큰 분노를 야기하고 이는 미국의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자를 양산한다.
마지막으로, 타국과의 경쟁을 통해 얻은 정체성과 일자리를 잃어버린 가장들은 감정의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자유 무역을 통한 각국의 생산성 향상에 집중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 주겠지만, 감정은 논리와 달리 반응한다. 논리적 설명은 위협이나 무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중국과의 경쟁은 우리의 삶이 더욱 황폐해지더라도 이겨야만 하는 정체성으로 발현되고 있다.
따라서, 폴 크루그먼의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접근은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은 다른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화의 총이익을 인정하되, 피해 최소화·이행 지원이 동반되지 않으면 분노는 포퓰리즘으로 번진다. 그보다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자존심과 존중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경제적으로는 비합리적이다. 그들이 원하는 기준의 효율성을 위한 자원 재배치와는 거리가 멀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적인 합리성보다는 감정적인 접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경제학은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