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경제사를 다룬 책이다. 경제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경제에 대한 이해를 갈구하는 독자들이 많아졌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경제사 책은 우후죽순 쏟아졌다. 경제사는 이미 일어난 일을 서술하기 때문에 책마다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역사가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이 뜻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관한 서술은 절대적인 중립성을 가지고 역사가가 서술해야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서술가의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인데, 경제사 또한 다른 역사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이 책의 독창성은 두 가지 근본 질문에서 드러난다.
첫째, 경제 생산을 위한 사회적 에너지를 어떻게 끌어내 배치하는가? 또한 그런 재배치를 통해서 생산된 물품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는 점.
둘째, 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전통, 명령, 시장으로 나누어 각자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시장이라는 해결책을 기반으로 경제사를 설명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현대적 자본주의의 탄생을 유랑 상인, 도시화 과정, 십자군 전쟁 등의 영향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종교 윤리 즉 프로테스탄티즘의 탄생이라고 말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도래하기 전, 종교에 지배받았던 세상은 2가지 면에서 현대적 의미의 자본주의의 출현에 애써 저항했다. 첫째, 이익을 위한 행동은 악이다. 소매업은 남을 속이는 행위라 하며 비난받았고 사업 확장의 기본인 금융업은 철저하게 사회에서 도태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본의 축적이나 경제적 혁신보다는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선택했다. 둘째, “현세는 천국을 가기 위한 예비 단계일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지배적 종교적 세계관이다. 약속된 천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현재를 산다. 이는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천국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나중에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현세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적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윤추구가 악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삶이라는 교리를 설파했다.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윤 추구는 장려하되, 사적 낭비를 악으로 규정했다. 이는 초기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의 출현으로 자본 추구 행위가 이기적일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행위라는 철학적 이데올로기의 출현으로 종교에서 벗어나 현대 자본주의로의 이동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이는 첫 번째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한다. 과거의 사회는 종교적 이상으로 인해 사회적 에너지를 경제적 생산으로 재배치하지 못하였지만, 애덤 스미스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인해 사회적 에너지의 재배치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생산된 물품에 대한 재배치는 초기 자본주의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사회로 인권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이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패배는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따라, 영국의 산업혁명은 비참한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냈고 이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마르크스의 탄생을 초래했다. 또한 끊임없는 팽창을 추구하는 자본은 더 쉽게 자본을 모으기 위해 트러스트, 합병 등 반시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투기, 불공정한 분배, 기술적 실업이 뒤얽힌 대공황이라는 사상 초유의 위기가 발생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믿음과 달리 자본주의는 멸망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자본주의는 소득 재분배와 정부의 지출을 통한 인위적인 수요의 생산을 발생시킨 뉴딜이라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뉴딜 정책의 성공과 2차 세계 대전 직후 억눌렸던 수요의 폭발 그리고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은 자본주의 황금시대 시즌2로 사회를 이끌었다. 이에 발맞추어 복잡한 경제 정책에 맞지 않는 중앙집권적 사회주의는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 자본주의 황금시대 시즌 2는 경영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접근법과 함께 탄생했는데, 이는 노동자의 생산성과 임금을 연계하는 방법으로 생산성 향상과 함께 경영자들이 장기적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였던 황금시대는 예기치 못한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새로운 위기를 맞이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신자유주의 체제로 되돌아갔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함께 지구적 자본주의가 도래했고 이는 세계 각국에 새로운 기회라는 밝은 미래와 투기 자본과 함께 노동임금 하락이라는 부정적 먹구름을 함께 가지고 왔다. 마지막으로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주택시장의 붕괴로 인한 대침체는 오바마 행정부가 실시한 거대한 정부지출과 과감한 통화정책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듯 보였지만, 거시경제 불균형과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되풀이되는 경제적 위기를 다시 만들어냈다.
생산된 물품에 어떻게 분배하는가? 에 대한 우리 경제의 해답은 “그때그때 다르다”이다. 과도한 불평등이 문제가 되어 촉발된 경제위기에 대한 대체는 생산된 물품을 더욱 평등하게 분배하는 방법을 선호하게 했고 과도한 정부의 개입으로 촉발된 위기 시에는 불평등을 통한 동기 부여가 새로운 대안으로 선택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가는 시계추”이기에 평생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우리의 경제가 ‘분배와 불평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진자 운동’처럼 보인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이는 불행 원천의 동시에 자본주의 생동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문제를 명령으로 해결하려는 사회주의는 시스템의 경직성 때문에 종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시계추의 움직임처럼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자본주의는 여러 번의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싹을 피우면서 더욱 큰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생산된 물품을 분배하는 방법이 고정되지 않은 시스템, 그에 따라 발전과 진화를 거듭하는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살아남아 우리 인류를 더욱더 발전된 세상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념적 대립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다. 민주당은 분배를, 국민의 힘은 경쟁과 작은 정부를 해법으로 내세운다. 어느 정책이 맞는가? 아무도 알 수 없다.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분배는 시계추의 진자 운동이다. 각 상황에 맞는 분배 정책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좋은 정책이 될 것이다. 또한, 우파가 따르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 또한 이 책은 명확한 심판을 내려준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자였는가?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권을 침해했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가 아름다워 보이지만, 초기 자본주의가 진흙탕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기 자본주의는 충분한 발전을 위한 자본의 확충을 해야 하는데 이 시기에 노동자들이 인권이 존중되고 이들이 소비재에 소비할 수 있는 사회적 발판이 마련된다면 초기 자본확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초기 자본 확충을 위해 인권을 유린했는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는 본인들의 정치적 안녕을 위해 인권을 유린했는가? 이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초기 자본의 확충은 성공했고 그 결과 우리는 발전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공과 사에 대한 확실한 구분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박정희 정부의 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일브로너가 이야기한 경시 경제의 불균형이 현재 세계 경제에 인플레이션과 코로나 위기에 따른 국가 재정정책으로 더욱 심화하여 가고 있다. 낮은 이자율이 계속될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론이 정치인들의 정치적 목적과 부합해, 유례없는 정부지출을 초래했고 정부에 부채라는 큰 흉터를 남겼다. 또한, 예상하지도 못했던 세계적인 공급망 파괴와 지정학적 위기 그리고 코로나 시대에 억눌렸던 소비심리의 폭발이 감당할 수 없는 수요를 만듦과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중앙은행은 높은 이자를 유지하고 있고 이는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삶에도 빚이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 정부 또한 정부지출이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는 최고의 해답이라 생각해, 유례없는 정부 지출을 했고 현재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탄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경제학의 시간과 정치학 시간의 일치 여부다. 경제에서 시장이란,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펼쳐진 시장 앞에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적응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렇기에 경제학의 시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경제학의 시간을 보고 거기에 뒤처지지 않게 따라가고 있다.. 반면에 정치학의 시간은 우리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조절이 가능하다. 시장의 시간을 제대로 따라가던 우리의 발자취는 잘못된 정치학의 시계를 통해 망가지고 위기를 초래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아담스미스의 가르침에 따라가던 경제학의 시간에 거대기업의 정치적 이득이 개입하고 위기를 초래했다. 냉전 시대 이후, 역사의 종말이라는 찬사까지 얻었던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시간에도 인간의 탐욕과 금융업의 정치적 힘이 결합해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효율적 자원의 세계적 배분을 끌어낸 세계화의 시대는 국가주의가 질서를 와해하고 세계적 공급망을 파괴하고 있다. 정치는 신념의 영역이고, 경제는 사실의 영역이다. 정치가 경제의 리듬을 거스르면 시장은 반격한다. 경제와 정치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움직일 때만 진보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