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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내-존재로서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과 인간의 삶

1) 서론

경제학은 인간의 삶을 관찰하는 학문이다. 폴 크루그먼은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회를 이용할 것이라는 명제 더하기 나의 기회는 상대방의 행위에, 또 상대방의 기회는 나의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관찰이다.”


쉽게 말하면, 경제학이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을 관찰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의 정의에 따르면, 경제학을 무시하고는 인간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음을 말한다. 하이데거의 말한,“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항상 주어진 상황 속에서 타자와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크루그먼의 정의는 인간 삶을 경제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경제학이 이처럼,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폴 크루그먼은 우리가 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이는 후에 다시 서술하도록 하겠다), 그는 이를 경제학자의 책임이라고 했다. 경제학자는 사람들에게 경제를 쉽게 설명할 책임을 기만하고, 숫자와 경제학 이론에 심취해 있다는 것이다. 그 간극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경제학자 혹은 저널리스트들이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처럼 대중과의 대화를 통해 잘못된 경제학적 지식을 수정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는 폴 크루그먼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다. 폴 크루그먼은 각 챕터마다, 쉬운 예시와 문체를 가지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지레 겁먹을 수 있는 숫자와 이론은 빠져있다. 하지만,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의 가치는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은 “경제학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람들이 경제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물론 크루그먼 스스로도 경계한다. 사람들이 이 책만 읽고 경제를 안다고 착각한다면, 그는 오히려 자신이 비판했던 ‘가짜 경제 전문가’의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 중 한 명인 폴 크루그먼의 노력이 담겨 있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과 함께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보자.


2)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

첫 번째 챕터에서 폴 크루그먼은 일자리를 중심으로 경제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풀어낸다. 수요·공급, 이자율과 같은 경제 개념이 고용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면서, 경제정책과 일자리 사이의 관계를 조명한다. 경제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는 모든 시대에 걸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발전을 할 수 없다. 사람들은 미래 기술 발전을 기대해 투자하고, 이는 결국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 자동차 개발의 기대감은 새로운 수요와 투자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은 제공한다. 하지만 기술 발전은 늘 직업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왔다. 과거 방직기를 부쉈던 러다이트 운동부터, 오늘날 AI에 위협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까지—그 공포는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크루그먼은 이를 ‘구성의 오류’라고 부른다. 특정 산업에서 일자리가 줄었다고 해서, 경제 전체의 고용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산성이 향상되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마차를 대체했고 이는 마부의 숫자를 감소시켰다. 하지만, 자동차의 등장은 이동에 있어서 생산성을 향상했다. 마차를 대체한 트럭과 자동차는 운송 생산성을 높였고, 그 과정에서 정비·운전·주유소 등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다. 여기에 사람들의 편리성 증가는 덤이다. 물론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삶의 수준은 하락할 수 있지만, 이는 정부가 사회보장제도 혹은 직업 교육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 기술발전을 저해할 핑계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발전이 없다면 경제는 정체되고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 논리는 자유무역에도 적용된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에 제조업 부흥을 명분으로 관세전쟁을 벌였다. 미국의 큰 시장이 매력적이기에, 높은 관세를 적용하면 미국으로 공장을 이동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정책은 어느 정도 미국 내 투자를 유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패한 정책이 되었다. 미국 주식과 그의 지지율 하락이 이를 증명한다. 자유무역은 생산성이 낮은 산업을 외국으로 보내고, 생산성이 높은 산업에 집중하는 것으로 기술발전과 같은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낮은 세율 탓에 사회보장제도가 부족하다는 점이지, 자유무역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직업 문제의 문화적·정체성적 측면까지는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새뮤엘 헌팅턴이 “미국,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직업은 미국의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폴 크루그먼이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단순한 직업의 이동이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윤리에 부적합한 사회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그들의 사명으로 여긴다. 중산층에게 제조업의 붕괴는 단순한 실업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미국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무너지는 위기다. 예컨대 미시간 주 플린트에서는 GM의 대규모 정리해고로 도시 전체가 몰락했고, 이는 중산층이 느낀 배신감을 정치적 급진화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경험은 단순한 실업 통계로는 포착되지 않는 삶의 무너짐이다. 따라서, 크루그먼의 구성의 오류를 통한 경제학적 분석은 탁월하지만, 정체성이라는 이념적 측면이 빠져있는 점은 뚜렷한 한계다. 이런 그의 결함은 다운사이징의 다운사이징에서도 보인다. 그는 기업이 다운사이징을 통한 정리해고는 통계상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정치적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운사이징을 통해서 상처받은 미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와 이런 경제학자들의 무심한 진단은, 정체성의 분노하는 이들을 더욱 극단적으로 선택으로 이끌 수 있다. 경제학적 분석으로 인간을 파악할 수 있다는 태도는 이미 과학적 태도가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한 가지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중과 대화하는 경제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사회분석과 함께, 정체성과 도덕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3) 우파의 문제

폴 크루그먼은 공급 중시 경제학(supply-side economic)을 맹렬하게 비난한다. 공급 중시 경제학이란, 세금을 줄이고 투자자와 기업가들이 활발하게 경제를 이끌어가게 해 준다면, 경제는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금을 줄이면 초기에 세수의 부족으로 사회보장제도가 원만하게 발생할 수 없다. 하지만, 경제성장으로 경제의 규모가 커진다면 중산층과 저소득층에게 더 큰 혜택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공급 중시 경제학은 우파들이 세금을 줄이기 위한 정치적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투자와 기업활동은 한계세율로 인해, 세금이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오히려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이 투자와 기업활동을 좌지우지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이 투자와 기업활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투자자들은 미래에 기대수익에 따라 투자를 결정한다. 기대수익이란, 투입된 자본에 대한 수익률에서 자본을 유지하는 이자를 제외한 금액이다. 만약에 내가 투자를 통해 5%의 수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5%의 수익률이 낮은 것 같지만, 직접 투자해 보면 5% 수익률이 얼마나 높은지 실감할 수 있다.), 은행에 지불해야 하는 이자가 4%라면 1%의 수익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이 정부의 세율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경제학자들은 공급 중시 경제학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그들의 행동은 꽤 성공적이다.


첫째, 기업인들은 우파 경제 싱크탱크와 우파 기반 경제잡지를 꾸준히 지원해 왔다. 이 기관들에서 성장한 몇몇 경제학자들은 그들에게 투자한 기업인들이 원하는 정책을 만들고 홍보한다. 그리고 기업가들이 원하는 세금인하를 얻어내는데 노력한다.


둘째, 중도층의 의견이 선거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특히 좌파와 우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판에 중도층의 선택이 대통령을 결정한다. 중산층은 정치 중도층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제는 매우 중요한 현안이다. 중산층은 세금을 적게 내지만, 더 많은 복지를 받고 싶어 한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급 중시 경제학을 통해 낮은 세금과 원만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매력적이다.


셋째,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경제학자 인 척 행동하는 우파 지식인들은 통계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통계를 직접적으로 “조작”하지는 않지만 표본의 변경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한다. Dick Armey는 그의 책 “자유의 혁명”에서 80년대에 경제성장은 모든 계층이 10%대의 평균 실질 소득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이는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을 경험하는 미국인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80년 만을 기준으로 실질소득을 측정해, 상위계층의 급격한 소득 증가가 하위 계층에도 적용되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켰다. 만약, 그의 연구를 70년대까지 넓히면 매우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기업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은 몇몇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현실을 오도하고 대중을 현혹시킨다. 폴 크루그먼은, 이들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경제학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4) 세계화와 뜬 구름

폴 크루그먼은 세계화가 값싼 임금으로 저소득층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통념에 반기를 든다. 오히려 그는 세계화가 개발도상국의 저소득층 노동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값싼 임금은 곧 착취다”라는 감정적 주장은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이 다국적 기업에 고용되지 않는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낮은 임금과 더 열악한 노동환경뿐이다.


세계화가 없다고 해서 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국적기업, 자국기업, 농업 중에서 선택해야 하며, 이 중 가장 양질의 선택지는 단연 다국적기업이라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첫째, 다국적기업은 기업 평판(company reputation)에 민감하다. 평판이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키와 갭은 아동 노동을 사용한 사실이 알려지자 즉각 사과하고 생산 방식을 전면 수정했다. 이처럼, 다국적기업은 자국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환경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또한 다국적기업에서의 업무 경험은 노동자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제공하며, 이는 전체 노동시장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는다.


둘째, 다국적기업의 진출은 노동력과 토지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농작물 가격과 농업 분야 임금을 향상한다. 이는 간접적으로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며, 지역 경제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모든 노동자를 흡수할 수는 없지만, 이들로 인해 발생한 고용 경쟁은 노동자 전체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한다.


한국과 대만의 노동자들은 과거 낮은 임금을 받았지만, 세계화를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좋은 사례다. 이처럼, 저임금은 착취가 아니고 기회가 될 수 있다. 결국, 크루그먼은 감정적인 주장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런 주장은 가장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의 기회를 가로막을 뿐이다. 세계화는 저소득층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5) 결론

폴 크루그먼은 경제학계의 칼 세이건이 되고자 했다. 칼 세이건은 그의 명작 “코스모스”를 통해 사람들이 천문학과 우주를 이해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과 함께, 사람들이 어떤 부분을 고민하고 있고 해결하고자 하는지를 빠르게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폴 크루그먼은 경제학이 사람들과의 호흡을 통해 같이 성장해 나갈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나의 선택과 타인의 선택이 서로 엉켜있다는 그의 경제학에 대한 정의는 인간 본질을 탐구했던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와 매우 닮아 있다. 이는 경제학자들의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 숫자와 수식에 얽매이는 경제학자들에 대해 한탄했다. 숫자와 수식은 경제현상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설명은 일부 전문가에게만 도달한다. 경제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경제학자는 지식을 바탕으로 시민과 소통하며 현실을 개선하는 데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학적 추세는 오히려 문을 닫고 자신들을 고립시킨다. 폴 크루그먼은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충고대로 다시 문을 열고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성장하는 경제학을 생각한 것이다.


숫자와 수식을 추구하는 경제학자의 생각은 과거 고전 경제학자들의 생각과 유사하다. 고전 경제 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가정했다.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독단적 경제정책을 만들게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사이클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알아서 해결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많은 인간을 희생시켰다. 이러한 고전 경제학에서 벗어난 현대 경제학은 경제학의 진보로 보았지만, 숫자와 수식에 집착하면서 많은 경제학자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에, 폴 크루그먼의 작은 몸부름이 의미 있는 이유다. 크루그먼의 노력과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책들을 통해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제학의 탄생을 바랄 뿐이다. 경제학자는 하얀 캔버스 위에 그래프와 도식을 통해 인간의 삶을 모델링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윤리적 설계자로서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크루그먼은 그 시작을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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