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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은 어떻게 바뀌는가: 『과학혁명의 구조』읽기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거나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현 사회를 설명하는데 꾸준히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어떠한 현상이 변화하거나 어떠한 주도적인 아이디어가 변화할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토머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이 쿤이 처음에 생각했던 때와는 다르게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과학혁명 즉 과학적 진보가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했고, 이는 과학집단과 과학적 현상 그리고 그에 따른 발전을 설명하기 위함이기에 현재 모든 분야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의 처음 의도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혁명을 겪고 그에 따라 기의와 기표는 변화하기에 “패러다임”의 변형된 사용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단어에 대한 사용은 그의 의미를 확실치 않으면 오용과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에 “패러다임”이 어떠한 뜻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2가지 이유로 독자 친화적인 책은 아니다.

첫째, 과학혁명의 구조는 우리가 과학에 대해 가지는 통념을 무너뜨린다.

둘째,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 관련 예시를 사용하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1) 과학혁명의 과정

과학혁명의 구조가 이야기하는 바는 과학 발전은 기존 통념의 생각처럼 누진적인 발전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단절과 함께 직선적인 발전 즉, 혁명을 통한 발전이 일어난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패러다임 ==> 정상과학 ==> 변칙 현상을 동반한 위기 ==> 새로운 패러다임의 순서로 발생하는데, 정상과학은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거나 발견하는 것은 아니고 기존 패러다임 내에서 퍼즐 풀기 식 과학을 추구한다.


(2) 패러다임이란?

그렇다면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이란 무엇인가??

패러다임은 “과학 공동체가 가지는 협의가 이뤄진 세상을 보는 눈”이다. 과학 공동체는 과학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부터 특정한 패러다임 안에 포함되는 교육을 받는다. 중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대립하는 다양한 과학적 사실에 대해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의 기본적인 규칙과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필요한 데이터 등에 대해 교육받는다. 예를 들어, 내가 고등학교에 다녔던 1990년대에는 뉴턴의 중력, 작용 반작용 법칙들이 과학 교과서에서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패러다임이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기가 배운 개념을 확인하고 재정립하는 방법으로 “응용” 문제를 풀게 되는데 이는 후에 정상과학으로 참여를 유도한다. 과학의 “응용” 문제는 학생들이 배운 기본적인 법칙을 “응용”해서 푸는 문제들을 말하는데 이런 교육과정을 통해 과학도들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가 우리의 “패러다임”으로 “응용”해서 풀 수 있다는 태도를 익히게 된다.


(3) 정상과학이란?

그렇다면 정상과학은 무엇인가?? 정상과학은 새로움을 도모하는 과학적 활동이 아니라 현재 “패러다임” 내에서 “패러다임”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과학적 활동이다. 정상과학은 3가지 과학 활동을 요구한다. 첫째: 패러다임 틀에서 자연적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탐구, 둘째: 직접 관찰한 사실과 기본 이론들로부터 예측되는 결과를 비교 설명하는 작업, 셋째: 예측과 사실 사이에 부합되는 정도를 증진하는 방향으로의 패러다임 수정, 보완 및 명료화 작업이다. 이처럼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이론 혹은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 패러다임의 우수성 혹은 정확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정상과학을 실행한 과학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현행 패러다임이라는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4) 변칙상황에 대한 과학 공동체의 반응

쿤에 따르면, 과학 공동체는 변칙 상황 즉, 현행 패러다임이 다루지 못하는 자연현상이 쌓이면 쌓일수록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것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과학자는 합리적이고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더 논리적이라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과학자 공동체의 특징과 패러다임을 이해하면 이유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과학자 공동체는 특정한 패러다임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정상과학 활동을 행해왔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과학적 도구 또한 패러다임적이다. 그들의 논문, 명성 그리고 지금 속해있는 community까지 현행 패러다임에 대한 연구 결과 이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그들의 명성과 현재 지위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패러다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해석했는데, 이는 공약불가능이라는 특수성을 생산한다. 공약불가능이란 대립하는 두 가지 패러다임의 단어에 대한 정의, 요구되는 데이터, 해결해야 하는 자연현상 등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한 가지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보다 더욱 진리에 가까운지에 대한 비교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어는 같은 규칙을 공유할 때 대화와 비교가 가능한데, 다른 패러다임은 같은 규칙 자체를 공유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과학적 패러다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패러다임이 더욱 잘 설명하는 사례가 존재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더욱 잘 설명하는 사례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종교의 개종과 같기 때문에 (종교의 개종은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 삶에 대한 전환까지 요구되는 완벽한 변화가 요구된다는 면에서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비슷하다) 같은 세대 내에서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과학 공동체가 변칙 상황을 만났을 때, 과학 공동체의 반응은 무시 혹은 패러다임의 수정이다. 아인슈타인이 양자 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주쳤을 때, 아인슈타인의 반응은 “신은 확률에 의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중첩 상황은 우리가 아직 양자 세계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 없기에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확률로 결정되는 과학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무능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진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양자 과학적 패러다임의 세력이 매우 커진 상황이다. 오히려, 지금 패러다임에 발을 담그지 않은 신진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패러다임 내에서 정상과학의 발전이 과거의 패러다임 보다 명료해지고 확실 해질 때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 즉 혁명이 일어난다.


(5) 정상과학은 나쁜 것인가?

그렇다면, 정상과학은 나쁜 것인가? 과학자들을 고정관념으로 밀어 넣고 새로운 변화라는 물결로부터 우리를 격리하는 인식론적 감옥 아닌가? 쿤은 정상과학은 과학 진보에 필수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다른 학문, 철학 사회학은 지배적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적 패러다임의 부재는 특정 학문 관련 모든 학자가 서로의 기본적인 인식부터 관념의 뼈대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경쟁하는 학파는 학문적 뿌리부터 다르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다양한 데이터와 논리를 생산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에, 패러다임 내의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뿌리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 각 관심 분야의 가장 미묘하고 진취적인 사실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한다. 또한, 패러다임이 존재하기에 지배 패러다임이 생산해 낸 연구 결과는 믿을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된다. 이는 사회에서 패러다임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술이라는 실용적인 제품의 생산을 가능케 만든다. 또한, 패러다임은 패러다임 내부의 과학자를 보호하고 과학자는 패러다임의 구성원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인정받기를 원하기에 사회적 요구를 따라야 한다는 족쇄에서 벗어나는 연구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내부적 순환은 기술의 발전에 필수적 상황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게 현재 패러다임의 탄탄하면 탄탄할수록, 변칙 상황을 발견하기 쉬워지는 내부적 선순환 관계도 성립하게 된다. 정상과학의 존재가 과학이 다른 학문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정상과학의 존재가 과학적 진보를 가능케 한다. 패러다임의 변환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기는 하지만, 패러다임이 생산한 지식을 통해 생산된 기술은 남아있게 되고 사회는 예전 기술과 새로운 기술을 통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발전을 도모한다.


(6) 진화와 과학혁명 구조의 유사성

토머스 쿤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타난 진화론과 과학이 동일한 발전 양상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다윈은 인간 진화는 특정 목표를 향한 진화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선택지 중에 현재 상황에 가장 적합한 선택의 총합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쿤은 과학도 마찬가지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말한다. 과학은 인류의 진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발전하는 게 아니라, 현재 패러다임이 마주친 변칙 상황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지속해서 선택되고 과거 패러다임과의 단절과 그로 인해 쌓인 지식을 통해 발전된다고 말한다. (단절과 지식의 쌓임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들뢰즈의 리좀모델처럼, 단절 자체가 모든 부분의 단절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새로운 관계의 결과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패러다임은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과거 패러다임과의 단절을 요구하지만, 과거 패러다임이 밝혀낸 자연에 대한 공통적 사실은 새로운 패러다임 과학 공동체가 과학적 발전을 하기 위한 지식체계의 기반이 된다)


다른 통념에 대한 공격이 주요 포인트인 책처럼, 과학 혁명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아마도 우리 또한, 인식의 패러다임에 참여한 독자 공동체의 멤버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가 보는 세상의 눈은 “과학 혁명 구조” 같은 책이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눈과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런 책은 어려우면서도 깊은 통찰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갈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7) 내가 느끼는 점

“과학 혁명의 구조”가 나에게 준 새로운 통찰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현대 사상 입문에 따르면, 현대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사실에 대한 접근이라고 한다. 인간의 한계란, 인간의 인식 체계를 통해 인식된 사물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인식 체계를 지배했던 이항 대립에서 벗어나 사실의 다양성과 우연성을 인지할 때 더욱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한계를 과학의 한계로 이어진다. 과학은 세상의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생각해 왔지만, 과학은 절대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기면 생길수록 이전에 관찰되지 않았던 것들을 관찰할 수 있고 이는 진리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제공하지만, 직접적인 진실을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과거의 패러다임은 현재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거부되거나 거짓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현상에 대한 해석에 한계가 있다고 해석된다.


둘째, 변화를 향한 몸짓은 좋고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나쁘다는 인식이다. 우리는 인터넷의 시대에 살면서 변화와 자유는 추구해야 할 이상, 전통과 안정성은 벗어던져야 할 허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정상과학이 우리를 미래로 그리고 번영으로 초대하듯이 전통과 안정성 또한 영원히 보존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물론 과거에 안주하여 새로움을 배척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완전한 진실은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인식의 감옥일 수 있다는 생각은 가져야 한다. 하지만, 새로움만을 위해서 우리의 근본이 되는 지식에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반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다. 유튜브와 인터넷으로 인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과학적 지식에 대해 높은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은 흐리지 않는다”, “울림과 떨림”과 같은 과학 서적이 베스트셀러의 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과학적 지식을 이용한 “앤트맨”, “인터스텔라”, 테넷” 같은 영화 또한 인기를 끌고 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접근한 이러한 과학적 사실들에 반감을 품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들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은 우리가 아는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상을 우리한테 소개하고 있다. 과학적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우리가 이러한 영화나 유튜브 그리고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지식이 대중의 반감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과학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과학혁명 구조는 대중에 과학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에 포함되지 않는 우리가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글이 친절하지 않아서”, 혹은 “과학자는 독자 친화적 글을 쓸 줄 몰라서”와 같은 이유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서적이 어려운 이유는 글 자체에 문제라고 말한다. 나도 비슷한 부류였지만, 과학혁명 구조를 만나고 생각을 바꾸었다.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패러다임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대 철학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의는 기표에 우선할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결정된다. 과학자들이 어려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과학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념을 쉽게 만들고 대중에 접근하면서 세상에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정상과학이라는 과학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자기들만의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진보시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혜택이 매달려 나무를 기어오르는 생명체이다. 그렇다면 과학지식을 쉽게 만드는 것이 과학자의 역할인가? 아니면 과학자의 과학적 발전에 자본을 제공하고 그 진보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우리가 과학적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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