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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타락인가 도구인가: 스티브 테일러 다시 읽기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인간 폭력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들은 왜 이루 말할 수 없는 폭력적인 성향을 띠고 세상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가? 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스티브 테일러는 자아의 성장이라는 개념을 들고 온다. 스티브 테일러에 따르면, 인간들의 폭력적이고 남을 지배하려는 지배적 성향은 본래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기원전 4000년경 시작된 자아 폭발로 인해서 이러한 성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기원전 4000년경, 지구의 특정 지역에, 기후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재앙들이 일어났고 이러한 재앙에 맞서기 위해 인류는 “자아의 성장”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라는 재앙에 맞닥뜨린 인류는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그전에 인류는 개개인의 자아에 의존하기보다는 공동체라는 거대한 의식에 자기를 묶어두는 선택을 했다. 저자는 기원전 4000년 전에는 공동재산, 공동책임에 따라 인류의 삶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의 특징은 모계중심사회이다. 타인과 공감하고, 자연과 나의 합치에 따라 행동할 뿐만 아니라, 거대한 규모의 전쟁은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하라시아인들은 자아를 발달시키지 않고는 삶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사하라시아인들은 “자아 폭발”을 통해서 더욱 이기적으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반성이라는 자아의 활동을 통해 급변하는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을 키워나갔다. 자아가 형성된 사회의 특징은 부계사회, 즉 대립적이고 정복욕이 강해졌다고 한다. 이는 사하라시아인들의 이주와 함께 세계를 지배하는 주요한 인류의 성격으로 변해갔다.


이 글은 스티브 테일러의 『자아 폭발』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자아의 기원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인간 내면의 병리, 그리고 사회적 재앙들을 분석한다. 더 나아가 자아를 단순한 타락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긍정적 요소로 해석하고자 한다.


(2) 자아 폭발과 부정성

저자는 “자아 폭발”이 인류가 마주한 3가지 재앙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목했다. “자아 폭발”이 이야기한 3가지 재앙은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불평등”이다. 그렇다면 자아를 인식하게 된 개인과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불평등”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저자는 자아가 발달하면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면적 불화와 불완전성 그리고 부와 지위에 대한 욕망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자아로 인해 4가지 정신병을 앓게 되었고, 이는 위 문제의 근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a. 고독

자아는 개인을 타인 그리고 자연과 떨어진 존재로 만드는 데, 이는 개인에게 고독이라는 새로운 감정을 선사한다. 예전에는 나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면 이제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자기 독립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독이라는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는 개인에게 불안이라는 참을 수 없는 감옥에 가두게 된다.


b. 자아의 수다

자아와 개인의 끊임없는 수다는 자기반성이라는 긍정적인 요소로 변화하기도 하지만 이는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결핍의 상태로 개인을 빠뜨린다. 주변 환경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타락 이전의 시대에는 개인의 불만족 보다 환경과의 조화를 생각하는데 더 큰 에너지를 쓸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조금 좋지 않아도 세상이 조화로우면 그에 만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개인과의 대화에 더 큰 에너지를 쓰는 자아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만족스러운 생각을 계속 떠올리게 되고 이러한 수다는 개인에게 만족할 수 없는 현재 상황을 인지시켜 준다.


c. 인지의 수면

사람이 가용할 수 있는 인지 에너지는 제한적이다. 우리가 어떠한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인지 에너지를 쓰면 다른 분야에 쓸 에너지가 남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아에 지친 개인은 사회에서 혹은 직장에서 자기의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인지 에너지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시다. 자아가 발달한 인간의 두뇌는 인지 에너지를 최상의 곳에 분배하기 위해 한 가지 변화를 꾀하게 된다. 타락 이전 시대에 우리 인류는 자연에 대한 감탄과 탐구에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데, 인지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 폭발”로 타락한 우리는 정신 에너지를 자아를 탐구하는 데 써야 하므로 “둔감한 기제”를 통해 한번 노출된 주위 환경에 인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멈춘다. 이는 자아를 가진 개인이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갈망하는 결과로 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자극 없이는 인간의 심리적 결핍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


d. 죽음의 공포

타락하기 전 세대는 자연과 하나였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사람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육체적 고통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타락 이전에 나는 개인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나 자연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자아 폭발”로 나는 온전히 나이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사람들은 노출되게 된다. 영혼을 갈구하고 영혼과의 교류를 통해 편안함을 느끼던 인류와는 다르게 “자아 폭발” 시대에는 불멸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고, 이는 개인의 사후세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3) 집단 정신병으로부터의 탈출

저자에 따르면 “자아 폭발”로 인해 위의 4가지 심각한 정신병을 앓게 된 인류는 자아 만족을 위해 몇 가지 새로운 정신을 발전시켰다.


a. 물질주의

더 이상 정신적 평온을 찾을 수 없는 개인은 물질이라는 외부적 대상에서 행복을 찾게 되었다. 또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게 된 개인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 물질을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물질주의는 자기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수확체감의 법칙”에 따르면 물질이 주는 만족이란, 지속적이지 않고 그 순간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그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물질로 지속적인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는 물질을 찾아야 하는데 이는 두 번째 문제로 귀결된다.


둘째,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화가 쓰이는 물질이 필요한데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다. 작은 무덤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개인은 피라미드 같은 더 큰 무덤을 얻어야 하고, 이는 타인을 노예처럼 부려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 부족 내에서 얻을 수 없는 물질적 행복은 타 부족을 공격하고 그 부족에서 물질을 빼앗아 올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물질주의는 개인의 타락뿐만 아니라 사회조직의 공격성을 통한 다른 자아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는 매우 자기 파괴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


b. 지위에 대한 욕망

물질만 자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다른 “자아”보다 우위에 있다는 지위에 대한 욕망 또한 자아에 색다른 행복감을 선사한다. 왜냐하면 자아란 개인을 뜻하고 나 개인이 다른 자아를 짓밟고 위에 있을 때, 다른 자아보다 우월하다는 우월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위를 얻을 방법은 다양하다. 자기가 살고 있는 체제 내에서 계급 체제를 공고히 하여 지위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승전물을 얻고 더 많은 자아를 짓밟으면서도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이는 물질주의 추구와도 연관을 맺게 되는데 타락 이전의 시대에 지도자들은 평등과 관용 그리고 베풂에 더 많은 주안점을 둔 것과 달리, 타락 이후 시대의 지위는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지위 또한 지속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지위에 대한 찬양은 피지배 계급의 물질적 혹은 지위에 따른 만족을 보장했을 때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지배계급은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벌이거나 혹은 사회 내에서 착취당하는 계급을 설정하고 그 계급을 제외한 계급의 물질적 혹은 지위에 따른 만족을 통해 지속적인 존경을 얻게 된다. 이 또한 물질주의와 같이 자기 파괴적이다.


(4) 물질주의와 지위에 대한 욕망의 결과

물질주의와 지위에 대한 욕망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3가지 인류 최악의 사건인 전쟁과 가부장제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을 생산했다. 전쟁과 사회적 불평등은 위에 설명한 대로 물질주의와 지위에 대한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지속적 물질의 공급 혹은 지속적인 지위의 향상은 필연적으로 물질주의와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자유에서 느끼는 고독에 불안을 느끼는 대중은 자신의 물질과 지위의 향상을 줄 수 있는 지배계급의 전쟁과 물질주의에 편승하면서 자기 파괴적이지만 지속적인 정신적 만족을 줄 수 있는 수동적 대중의 길을 택했다.


가부장제에 대한 설명은 조금 다르다. 가부장제는 부계 중심적 성향을 보인 남자들이 모계 중심적 성향을 보인 여자들을 억압하는 사회체제인데 저자는 2가지 원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여성들은 남성보다 공감이나 포용 같은 가치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공격적인 남성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이렇든, 공격적인 남성은 사회지배 계층이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난다.

둘째, 자아는 정신을 우선시하고 육체를 저급한 존재로 취급하게 되는데, 이는 생물학적 행동이 더욱 확실한 여성(출산, 육아, 모유 수유 등의 행동)을 멸시하게 되었다. 지배계층의 남성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정신보다 우선시하게 만드는 여성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다. 또한 여성이 생리 혹은 출산 시에 몸에서 분비되는 물질들이 이디오진크라지(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 칠판을 긁는 소리, 다리가 많이 달린 곤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의 역할을 하게 되어 혐오감을 더욱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저자는 종교의 타락 또한 “자아 폭발”이 일으킨 부정적 요소라고 설명한다. 먼저 종교는 타락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타락 이전의 종교는 개인성을 강조한 내세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자연에서 영혼을 찾으려는 공동체적 성격이 더욱 강했다. 이러한 종교는 개인적 신앙심과 조화를 강조했고, 현대 종교가 일으키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성격이 덜 했다. 타락 이후의 개인은 내세에 대한 열망이 강했고 이를 이용한 물질주의와 지위를 추구하던 종교적 지도자들이 종교적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부정적 결과물은 자연 파괴로 이어진다. 물질주의와 지위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은 자신의 충족할 수 없는 욕구 충족을 위해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정복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 아래 자연에 대한 지식적 앎을 추구했지만, 이는 자연이 정복 가능하다는 그릇된 인간의 자신감을 나았고, 이는 자연 파괴와 개인의 만족감에서 후자를 추구하도록 인류를 이끌었다. 지금 사회는 예전에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굴레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자연 파괴는 우리 인류 모두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기에 “자아 폭발”의 결과는 자기 파괴적이다.


(5) 대안적 접근

저자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던지고 있다.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새로운 정신의 물결이 태동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자아와 자연을 통합적으로 보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있고 사회 체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손꼽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 내에서도 공감 능력의 확산으로 자아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고 말하면서 책을 끝맺고 있다.


(6) 내 생각

인류의 발전과 행동에 대해 분석하는 책은 언제나 흥미롭게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이제까지 “총 균 쇠”, “사피엔스” 등을 읽으면서 느꼈던 흥미로움을 “자아 폭발”에서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내가 느낀 점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6-1) 진화론?? 자아 폭발??

저자는 이전까지 전쟁처럼 인간의 광기를 설명한 진화론과 인간의 호르몬에 대한 설명을 부정한다. 저자에 따르면, 진화론이 모든 사건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로 타락 이전 시대 그리고 타락 이후에 사회에서 고립되어 모계중심사회로 유지되는 사회를 예로 든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저자는 오히려 진화론의 설명을 빌려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진화론은 우연적 변이에 따른 자연선택으로 인류의 진화를 설명한다. 긴 시간 동안, 목적 없는 변이가 유전자 내에서 일어나고 서로 다른 유전자는 서로 경쟁한다. 그 결과 자연의 선택을 받은 유전자만 살아남게 되고 그 유전자가 후에 자기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긴 시간 동안 우연적인 이유로 변이가 생성되기에 특정 시기에 특정한 특징이 인간에게 발현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쩌다 보니, 부계 중심적 특징을 가진 유전자를 인간이 가지게 되었고 이 유전자가 경쟁에서 이겨서 지금까지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기원전 4000년에 갑자기 자아가 폭발한 이유를 기후변화로 설명한다. 정말 그럴까? 부계 중심이라는 특징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없는 변화일 것이다. 모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사회에서 홀로 부계 중심적인 특징을 가진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개인은 그 사회에서 추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후변화와 비슷한 어려움이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까?? 기후변화가 일으키는 문제는 인간의 생존인데, 그전에도 야생동물 혹은 다른 자연재해에 인류는 노출되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전에는 발현되지 않았던 최고의 해결책이 갑자기 발현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가부장제를 설명하면서 여성들은 공감 능력이 남성보다 더 크기 때문에 억압을 당한다는 논리 또한 매우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빈약하다. 왜냐하면, 남성들이 자신의 자아를 출현시킨 그 생명의 위협이 여성들에게 적용되는데 왜 여성들은 계속해서 모계 중심적 특징을 버리지 않을까?? 또한, 영국처럼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된 지역은 모계성이 아직 살아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영국은 “자아 폭발”이 주는 장점에서 소외되고 발전이 뒤처져야 하지만 오히려 영국과 서유럽은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자아 폭발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오컴의 면도날”을 떠올리게 된다. 가장 심플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진리라는 이 개념에 따르면 자아 폭발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저자의 설명은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게 보인다.


(6-2) 자아의 부정성?

저자는 자아를 문제의 시작으로 보지만 자아의 긍정성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기술 발전은 “자아 폭발”의 결과라고 한다. 처음부터 자아의 출현은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이기에 이는 당연한 설명이다. 자아는 자기반성을 할 수 있고 자기반성을 통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해결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한, 죽음이라는 공포는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유인을 개인에게 발현하기에 문학, 과학, 철학 같은 legacy를 발명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 풍요의 약속은 개인이 과거보다 더욱 노력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저자는 결과적으로 “자아 폭발”이 가져온 변화는 부정적이라고 한다. 이런 모든 물질적 풍요의 결과는 개인을 타락시키고 인간의 폭력적 성향을 부채질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은 불행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를 봐라, 전쟁을 봐라, 그리고 자신을 봐라.”


일정 부분 저자에 동의하지만 나는 2가지 면에서 자아의 존재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첫째, “자아 폭발”은 개인이 소극적 자유를 추구하게 했다. 자아가 없는 세상에서는 개인은 공동체와 자연에 묶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타락 이전의 사회를 유토피아로 묘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를 했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명령에 좌지우지했다. 문화와 관습에 좌지우지했고 다수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의 행복보다는 공동체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 아니라,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아가 발달하고 개인성을 추구하면서 최소한 인간들은 소극적 자유를 추구했다. 공동체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스스로 찾아 나가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이기에 실체는 본질에 앞선다. 인간 내면은 정해진 것이 없고 끊임없는 탐구와 교류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형성해 나가고 그렇게 형성된 자아가 나를 정의한다. 물론 자아 형성 과정에서 자아는 다치고 상처받겠지만, 세상에 그냥 던져지는 내가 나를 정의하고 존재를 형성하는 과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특권이다. 결국 사르트르가 말한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자아를 단순히 타락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형성과 실존적 책임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카뮈는 부조리의 철학을 전개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고 우리의 생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시련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착한 사람이 차 사고로 죽을 수 있고, 나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 안에서 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세상은 세상의 부조리에 손을 놓고 부조리에 따라가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자아가 “전쟁, 사회적 불평등, 가부장제”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자아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자아 폭발”은 긍정적일 것이다. 또한, 저자의 말처럼 자아가 스스로 이성을 통해서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자아 폭발의 장래는 더욱더 밝을 것이다.


둘째, “자아 폭발”로 발생한 기술 발전은 개인에게 적극적 자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인류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권리와 행동은 생존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존이, 인간이 불합리한 경제체제에 참여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기술 발전은 인간이 생존에 사용하는 시간을 줄이고 다른 일에 매달릴 수 있는 적극적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다. 세탁기가 없다면, 우리는 빨래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고 수도가 없다면 몇 시간을 걸어서 물을 길고 다니는 아프리카의 소녀처럼 살 수밖에 없다. 기술 발전이 생존에 필요한 시간을 줄여주었기에 인간은 사색이라는 새로운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이성의 발달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자아 폭발”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자아가 부정적인 면만 부각하고 자아의 큰 선물인 이성의 발달은 무시했다는 점이다. 적극적 자유로 인한 사유의 증가는 이성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는 저자가 뒤에 이야기한 새로운 정신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했다. 이는 “자아 폭발”로 만들어진 인류의 장래는 밝고 찬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7) 결론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유죄라고 했다. 자아가 없는 인간은 유죄다. 자아가 없이 공동체에 매달린 삶을 사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죄수다. 우리는 자아의 부정적 측면에 매달리기보다는 사유를 통해 자아를 발전시킬 의무를 지고 있다. 칼 세이건은 그의 책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우주에서 먼지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의 존재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외부로 나아가는 특이하고 특출 난 먼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이러한 우리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자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아”의 선물인 사유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자아를 선물하고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불평등에 희생된 우리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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