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하는 이성
이성
(1) 불행한 의식에서 이성으로의 이행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예는 죽음이 두려워 삶을 선택하고 주인에 종속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노동을 통해 외부 세계를 변형하고 형상화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유의 자유를 추구하는 금욕주의를 통해 자기의식은 만족하는 것 같았으나, 세계와 자신과의 괴리를 경험한다. 그리고 자기의식은 절대자를 상정하고 절대자와 자기의식과의 통일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려고 하지만, 절대자를 자기 외부의 초월적 실체로 상정함으로 자기의식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불행한 의식은 절대자에 도달하고자 했지만, 그 길이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 있는 중세교회를 통해 매개되었기에, 결국 자아는 자기 본질과 단절된 채 고립되고 만다. 하지만, 절대자를 피안에 둔 불행한 의식은 실패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자기의식은 절대자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존재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의 의식이 발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노예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삶을 선택함으로써, 자기의 관념이 물체로 형상화하는 것을 경험했다. 이는 자기의식 이전에 세상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던 의식이 자기가 진리를 부여하는 그 어떤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와 세상에 대한 지가 일치라는 확신을 가지는 이성으로 자기의식은 도야한다.
헤겔은 중세교회의 부패가 종교개혁과 이성으로 이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은 불행한의식은 불변자를 피안에 상정해서 다다를 수 없는 목표를 만들었다. 신자도 교회도 피안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의 개별성을 부족함을 원인으로 만들 수밖에 없고, 개별성을 소멸시키기 위해 향유의 포기를 요구했다. 향유의 포기 결과 교회에 더 많은 재산이 몰렸을 뿐이다. 교회가 부패하지 않고 향유의 포기를 통해 획득한 재산을 올바른 곳에 썼다고 하더라도 정신의 이성으로의 도야는 필연적일 따름이다. 루터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교회의 부패로 보았지만, 이보다는 멸종된 개별성의 부활로 보아야 한다. 루터가 성서를 강조한 이유는 매개자들이 개별성을 삭제한 것에 대한 반발이고 후에 프로테스탄티즘으로의 탄생은 개별성을 통한 보편성의 추구로 봐야 마땅하다.
장 이폴리트는
“이성 - 자신의 실재의 전체, 진리의 전체라는 의식의 확신 - 이란 이 진리가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현재 한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확신은 개별적 의식의 소외 즉 의식 자체를 소멸시키지 않으면서도 자기의식을 보편성에로 고양시키는 소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라고 말했다. 불행한 의식은 자기 자신과 불변자와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소외시키고 대상화하지만, 결코 불변자에 다다르지 못한다. 하지만, 의식은 이를 통해 자신의 사유와 존재가 일치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사유를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성은 이를 위해 2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째, 이성과 세계가 보편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성은 자신을 소외시키지만 개별성을 잃지 않는 즉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다. 이는 변화하지 않는 보편자에 대한 교회의 집착에 대한 지양의 결과다. 이성은 개별성을 잃지 않으면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형식의 통일을 추구한다. 이에 이성은 관찰하는 이성으로 나아간다.
둘째, 관찰하는 이성은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보편성을 추구하지만 이는 이성이 아니다. 관찰이란 변화를 포착하여 표상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지만, 오성 이래의 추상적 무한성, 즉 고정된 규정들의 끝없는 반복, 과 모순된다. 이에 이성은 세계는 개념이 자기를 외화 한 결과이며, 보편적일 수 있음을 발견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불행한 의식에서 이성으로 이행하는 의식의 내적 변증법을 다루었다. 그러나 헤겔에게 이러한 의식의 운동은 결코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 않는다. 의식의 형식 변화는 언제나 역사적·사회적 형상을 통해 현실화된다. 따라서 불행한 의식에서 이성으로의 이행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국면 속에서 하나의 표상적 모습을 취한다.
(1-1) 중세교회에서 르네상스로 이행의 의미
불행한 의식의 마지막 단계는 중세교회시대이고, 이성은 르네상스 시대를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의 관심이 종교에서 과학과 세계 그 자체로 옮겨졌음을 말한다. 보통, 우리는 종교를 세상을 설명하고 인간이 확실성과 안식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이해한다. 이는 종교에서 과학으로 이행이 가능한 이유는, 과학적 방법이 확실한 방법을 통해 인간에게 확실성을 그리고 발전을 통한 안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결과론적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발전은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이 역사에 기록된 과학자들은 손에 꼽히지만, 갈릴레오에게 길을 내어준 과학자들은 수천명도 더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이 과학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과 인정 그리고 주변의 응원 등 구조적 변화 없이 불가능하다. 과학이 종교를 대체했다는 위의 설명은 구조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확실성과 안식은 의식변화의 결과물이지 그 변화를 촉발한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인간의 종교로부터 과학으로의 이행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스스로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던 자기의식은 종교에 다다르지만, 본질적 실패를 경험한다. 이는 실패를 뛰어넘으려는 다수의 자기의식이 과학과 사회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기의식이 과거 의식의 변증법의 결과이기에 그 자체가 다음 단계를 잉태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기 바깥, 즉 물체와 세상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 의식은 노예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진리를 만들 수 있음을 경험한다. 이는 이성으로의 이행의 단초가 된다. 이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해 과학적 탐구를 가능케 한 데카르트,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그리고 교황청에 반대하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등 개별적 자기의식들의 행동양태다.
(1-2) 이성과 관념론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주장하는 관념론은 나의 생각이 물체가 된다는 관념론이 아니다. 헤겔의 관념론에서 정신은 역사적 변증법을 통해 형성되며, 인간의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재화한다. 또한, 자신의 관념의 외화를 통해 생성하게 한다. 작품, 사상 자체라는 개념을 통해 나의 관념이 세상의 기반이 되고 그 기반이 물질을 생산하는 관념론이다. 칸트, 피히테, 셸링 등도 관념론을 주장했지만, 그들의 관념론은 유아론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거나, 변화와 생성의 계기가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관념론이다.
장 이폴리트는
“피히테주의자나 셸링주의자는 자기의식의 근본적 직관에 호소한다든가 아니면 근원적인 동일성의 원리에 호소하면서 관념론을 철학적 명제로 제시하였다. 이에 반하여 헤겔은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역사적 도정 위에서 관념론과 만나고 있다.”
는 말을 통해 헤겔만의 독특한 관념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피히테와 셸링은 철학적 의식으로부터 그들의 관념론을 펼치는 반면에 헤겔은 가장 낮은 수준 즉 감각적 확신으로부터의 도정을 통해 관념론을 설명한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서 관념론의 주체는 정신이고 정신은 진리의 주체이자 실체다. 정신은 진리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기에 변화를 선도하는 주체요, 정신 그 자체가 진리이기에 실체다. 이를 위해서 헤겔은 개별적 자기의식들 간의 상호교류를 통한 이해와 영향을 설명한다. 이것이 행동하는 이성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성은 세상을 관찰하고 실천함으로써, 세상이 자신의 사유와 동일한 법칙으로 움직임을 확인하려 한다. 이런 객체는 자기의 본성을 즉자적으로 가지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작품으로 외화 한다. 그리고 작품은 다른 자기의식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자적인 성격 또한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자기 자신을 유지함과 동시에 다른 자기의식 안으로 들어가는 활동적 매개가 된다. 그리고 이를 내부에 포함한 이성은 정신으로 도약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자기의식의 단계에서 타자는 자기의식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파괴해야 할 객체로 부정적이다. 하지만, 세계가 곧 자아임을 깨달은 자기의식에게 타자는 자신이요 실재이기에 긍정적이다.
이성 부분에서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로 현상만을 인식할 뿐 물자체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물자체를 원리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설정하는 한, 통각의 통일은 진리라기보다는 인식 주체 내부의 형식적 안정성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대상 자체를 영원히 가린 채, 그 장막의 색조를 진리라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순수 이성은 전적으로 대립하는 이중적인 것을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직접적인 모순 속에 처해있다. 즉, 이런 순수 이성은 통각의 통일을 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또한 그것을 낯선 부딪힘, 경험적 본질, 감성, 물자체등 무엇이라고 부르건 간에 그 개념에서는 똑같이 통각의 통일에 이질적인 것으로 남는 사물을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라는 문장을 통해 칸트 철학의 문제점을 상세히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헤겔은 칸트처럼 물자체를 인식 불가능한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생성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실체로 보며, 인간 의식은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진리를 생성과 변화의 주체이자 실체이기에, 실재 그 자체가 진리인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는 인간 인식능력의 부재라는 점은 헤겔의 철학에서도 동의하지만, 인간 인식능력의 부동성에는 반대한다. 칸트의 물자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그 무엇이다. 현 단계에서는 도달하지 못한 진리이지만, 헤겔의 변증법에서 인간의 의식은 도달가능하다. 마치, 뉴턴의 과학세계에서 상대성이론이 물자체이고, 아인슈타인의 세계에서 양자역학의 세계가 물자체인 것이다. 칸트의 철학이 한계성의 철학이라면 헤겔의 철학은 발전과 미래의 철학이다.
로버트 브랜덤은 헤겔이 근대인으로서의 규범에 대한 질문이 <정신현상학>의 저술의 원인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규범은 변하지 않는 고정된 본질이었다. 하지만 헤겔은 근대인으로서 규범에 휘둘리지 않고 상호침투를 통한 규범의 생성을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헤겔이 근대인으로서의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 역사적 생성으로서의 관념론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의식으로부터의 출발은 출발이 정해져 있다. 씨앗에 꽃나무 열매의 생성이 정해져 있듯이 고정된 출발은 고정된 결론으로 치닫는다. 피히테는 자아의 정립, 셸링은 신=자연이라는 동일성 철학이 고정된 결론이다. 헤겔은 모순과 매개를 통한 역사적 생성이라는 변화를 관념론 증명의 형식으로 삼는다. 그리고 출발이 감각적 확신이라는 것은, 가장 순수한 감각이기에 어떤 것도 새겨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출발은 무규정성의 장점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출발이기도 하다. 여기서 헤겔의 명제 “내용과 형식은 일치한다.”라는 말을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헤겔의 관념론은 내용의 출발도 변화이고, 그 역사적 생성이라는 형식 또한 변화이다. 따라서, 헤겔로 인해 철학은 근대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2) 관찰하는 이성
장 이폴리트는
“자아=자아는, 자아는 동등한 자아이어야 한다로 변형된다. 이 형식적 관념론의 결과는 통일성을 결여한 경험적 영역과 공허한 사유 간의 대립이다.”
를 통해 관찰하는 이성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헤겔에게 있어 진리란, 이성의 단순한 주관적 확신이나 단언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불행한 정신을 통해 의식은 세상과 자기의 일치를 확신하지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는 피히테적 관념론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리고 이성은 세상과 자신의 일치라는 확신을 증명하고 그것을 진리로 고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관찰하는 이성의 관찰하는 이유다.
장 이폴리트는 이 도정에서 “이성이 자연의 학을 수립하고 또 이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거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주관적 확신이 진리로 발전된다” 고 말한다.
이성은 세계와 자기의 일치의 가능성을 알지만 논리적으로 확증할 수 없다. 따라서, 이성은 세계와 자신을 일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이는 관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르네상스 시대에 흥했던 “학”의 시대를 설명한다. 관찰하는 이성에서 “관찰”은 불행한 의식의 종교에서 처럼 본질적으로 “실패”를 내포한다. 이성이 찾으려는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생성과 변화를 내포한 생명이다. 인간 역시 그러한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자연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종속을 넘어서려는 가능성을 갖는다. 하지만, 관찰은 변화와 생성을 그리고 다양성을 무시한다. 장 이폴리트에 따르면,
“관찰은 개념을 존재속에 고착화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을 추구하되 오로지 존재로서의 개념을 추구하고 자아를 추구하되 오로지 직접적인 실재로서의 자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관찰은 표면적으로는 움직임을 포착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 움직임을 정지된 형상으로 환원하여 개념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는 자연에서 행해지고 있는 현상을 지금 그 순간에 고정하고 이를 개념화하는 것이다. 관찰에게 진리는 고정되어 실재하는 존재다. 마찬가지로 자아 역시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는 관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자아는 자아다'라는 추상적 자기 동일성의 형태로 고정된다.
하지만, 세계의 실재인 정신은 자연에 우선한다. 정신은 변증법적 활동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한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그것이 변화하는 과정의 순간일 뿐 연속적 진리는 아니다. 자연은 진리가 아니라, 정신이 스스로를 외화 한 흔적이며, 진리는 이러한 외화 과정을 통해 다시 정신 안으로 귀환한다. 정신이 과거로부터 쌓아 올린 관념에 대한 결과가 자연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관찰하는 이성은 진리에 다다르지 못하고 대상에 종속되고 만다. 만약, 관찰이 정신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고 하더라도, 관찰의 기술인 언어의 한계로 실패하고 만다. 언어는 기술의 대상이고 관찰이 표현이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의 관념을 특정 방식으로 고정한다. 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대상은 인식의 외부에 머무르거나, 기존의 유사한 개념에 억지로 포함되면서 그 고유한 성질이 소실된다. 혹은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서 기술하기는 하지만, 그 언어가 보편화되는 순간 대상은 변화한다. 이처럼, 관찰은 우연성을 드러낸다. 소쉬르가 이야기한 것처럼, 언어 자체와 대상의 만남은 우연적이다. 그리고 언어 자체가 존재할 때만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관념은 언어 안에 포획된다. 따라서,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관찰과 실험은 우연적일 뿐 진리가 될 수 없다.
(2-1) 자연에 대한 관찰
자연은 무수한 법칙과 현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찰하는 이성은 그 안에서 통일된 질서를 발견하려 한다. 이성에게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자연에서 보편적인 자기를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질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분류하고 범주화하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범주는 사물의 본질이고, 칸트에게 있어서는 인식의 방법이다. 하지만, 헤겔의 이성에서 범주는 세계와 내가 하나라는 그 인식이다. 이성은 관념론이기에 자기의식이 세상을 자기 범주에 의해 창조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범주개념의 통합이다. 헤겔은 범주를
“자기의식과 존재가 본질”이라는 사유라고 말한다. “
이성은 자연에서 자기를 발견하려고 하기에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찰과 실험 실험을 한다. 이성은 자연의 관찰이 자연의 본질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관찰과 실험을 통해 이성은 자연을 개념화한다. 이성의 이런 과정은 관찰기술하기 ==> 징표 찾기 ==> 법칙 찾기의 과정을 거친다.
가. 관찰기술하기: 이성은 자연을 감각 그대로 인식한다고 믿고 다양성 속에서 보편성을 찾는다고 믿기에 관찰하고 기술한다.
나. 징표 찾기: 이성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 대상물을 구분하기 위해 징표를 찾는다. 동물의 이빨, 발톱등이 그 징표다. 이는 대상물이 종의 한계를 넘어, 자연에 대해 대항하고 자신의 생명을 이어나가는 그런 차이점이다. 하지만, 징표는 변화로 인해 구분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빨과 발톱은 빠질 뿐만 아니라, 징표를 찾을 수 없는 자연적 대상물도 존재한다.
다. 법칙 찾기: 종과 유의 차이와 징표의 변화는 법칙화된다. 하지만, 의식은 자연 모두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법칙은 개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은 법칙에서 절대성을 찾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자연관찰은 개념화로 인해 다음과 같은 한계에 부딪힌다.
첫째, 인간은 자연 그대로를 관찰한다고 믿지만, 관찰은 위에 언급한 데로 인간의 인식능력과 언어에 영향을 받는다. 동물과 식물의 분류에 있어 우리는 종과 류라는 단위를 이용한다. 하지만, 종과 류는 인간이 관찰가능한 기준과 언어에 바탕으로 이뤄진다.
둘째, 동물은 어느 정도 관찰이 가능하지만 식물과 미생물등 그 하위로 가면 갈수록 인간의 관찰능력은 한계를 드러낸다. 자연은 생의 활동과 죽음 그리고 미생물로 인한 죽음자체의 소멸과 같은 원환적 성격을 지닌다. 자연을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하위 단계의 생까지도 분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과학의 발전으로 하위분류의 생을 관찰할 수 있지만, 이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에 이성은 관계에 대한 관찰 즉 법칙으로 이동한다.
셋째, 분류는 생명 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생명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생과의 관계를 통해서 변화하고 행동한다. 이는 관찰에 의해서 생성된 분류가 다른 분류와 중첩되고 서로의 영향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관찰이 가능함을 말한다.
넷째, 오성을 거쳐온 이성은 자연의 관찰에 여전히 오성적 방식을 가지고 있다. 감각적 관찰이 오성적 법칙의 성립에 방해되기에 이성은 실험으로 법칙을 성립하려고 한다. 장 이폴리트는 이성이 변형된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이성의 행동을 감성적 개념화 작용이라고 한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분류와 관찰은 변화와 생성, 관계성이 실체를 포착하지 못한다. 하지만, 관찰하는 이성은 “생”들의 관계를 통해 변화를 목격한다. 자기를 외화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다시 안으로 들어와 변화와 생성의 법칙은 유기체의 삶과 유사하다. 이 유사성을 발견한 관찰하는 이성은 유기체적 삶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
자연의 관찰에서 우리는 개념의 보편성을 엿볼 수 있다. 의식이 이성에 도달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진리를 찾으려고 하지만, 의식은 개념의 작용 형식을 따라간다. 감각적으로 관찰하고 분류하려 하지만 이는 관계성으로 고정되고 또 관계성에서 개념화된 실험으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는 무한성의 관찰로 이어지고 행위하는 이성을 통해 존재의 규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개념을 따르는 의식의 발전이 인간 의식의 발달과 동일한 과정을 따르기에 자연은 개념의 발현이자 과거이고 관찰만으로는 자연에서 우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2-2) 유기체 관찰
(2-2-1). 유기체와 무기적 요소사이의 법칙
이성은 무기체에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자,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반성을 하는 유기체에서 자기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성은 유기체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법칙을 찾으려고 한다. 유기체는 공기, 물, 대지등 변화하지 않는 자연에 영향을 받고 한계 지어진다. 그리고 그 한계에 맞게 유기체가 변화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유기체와 무기적 요소들과의 관계는 사실 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
라고도 말한다. 유기체는 외부환경과 관계하지만, 외부환경의 영향의 부정성을 내부에서 모두 해소하는 절대적 유동성으로 존재한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르다. 다윈과 헤겔 모두 유기체의 변화는 기계와 같이 정해진 경로를 따른다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거부한다. 다윈은 모든 생명체는 우연적으로 발생한 돌연변이중 자연의 선택을 받은 것이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으로 자연을 설명하려고 한다. 반면에, 헤겔은 목적론적 자연관을 주장한다. 헤겔에게 유기체는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하는 생명이다. 이 유기체는 자신만의 목적을 가지고 자연에 적응한다. 기계처럼, 자연이 원하는 데로 변화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만의 목적을 가지고 목적에 맞게 자연에 적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와 무기적 요소 간에 법칙을 찾으려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유기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를 경험하지만, 그러한 변화들을 내부로 통합하여 자기 보존을 이루는 ‘자기 복귀성’을 지닌다.
한자경은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에서
“유기체의 자기 보존과 자기 복귀를 통해 얻어지는 자기 발견이 동물에게는 <자기감정>이 되고 이성에게는 <자기의식>이 된다”
고 말했다. 유기체가 자기 복귀와 자기 보존을 하지 않는다면, 기계적으로 자연을 따르고 이는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유기체의 “생”과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는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생존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양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윈의 기계론적 진화론은 헤겔이 과학적 사고방식이 지닌 문제점 이라고 주장한 바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이성이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진화론을 설명하는 것처럼 귀납적으로 접근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진화에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만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각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하려 드는 표상적 사고 일 뿐이다. 이는 생명의 생성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개념적 자기 운동 자체를 사유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헤겔은 생명 변화의 본질 즉, 개념적 운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목적론적 자연관을 설명한 것이다. 칸트는 유기체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하고 또 복귀된 것으로 제시된다는 “자연목적”에는 동의했지만, 이를 단순히 인간의 자연인식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는 유기체의 무기적 환경에 대한 대응이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도덕적 세계관과 비슷하게 우리 인식 밖의 존재에게 목적을 형성할 권리를 부여한다. 하지만, 헤겔에게 이는 자연 유기체 그리고 “생” 그 자체로 설명된다. 그러나 유기체적 자연 역시 이성의 전체 운동을 포괄하지는 못하며, 오히려 정신이 과거에 남긴 실현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를 변화와 생성의 주체이자 실체로 파악한 헤겔에게 자연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과거이다. 자연은 정신의 자기 전개가 외화 된 결과이며, 더 이상 현재의 진리가 아니라 정신이 이미 통과한 과거의 형식이다.
(2-2-2). 외면과 내면
유기체와 무기적 요소사이의 법칙에서 모순을 느낀 이성은 유기체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유기체가 스스로를 생성해 가는 “생”이기에 자연에서 유기체의 내면으로 돌아간 것은 당연한 순서다. 그리고 이성은 “외면은 내면의 표현이다”라는 법칙을 찾으려 한다. 동물이 살아남으려는 의지는 내면이고 그를 위해 발톱이나 이빨의 발전 그리고 사냥과 같은 행동은 외면이다. 따라서, 유기체의 외면은 대자적 존재로 다양성을 가지지만, 유기체의 내면은 즉자적 존재로 동일성과 보편성을 가진다.
한자경에 따르면 유기체의 내면을 다루는 세 가지 계기는 다음과 같다.
감수성: 생명체가 내적으로 자기복귀하면서 비유기적 존재를 자신의 보편적 유동성 안으로 해소시킨다. 수동적인 이론적 기능이 된다.
반응성: 타자 지향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작용이나 반작용의 능력이다. 능동적인 실천적 기능이 된다.
재생: 자극성과 반응성의 변증법적 통일이 재생이다.
그리고 세 가지 계기를 관찰하기 위해 신체의 해부학적 외면을 대응시킨다. 감수성은 신경조직, 반응성은 근육조직 그리고 재생력은 내장조직이 된다. 신경조직은 몸에게 행동하도록 명령하고 근육조직은 이에 반응해 행동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을 통해 내장조직은 생존을 위해 작동한다. 이성의 “외면은 내면의 표현이다”라는 법칙은 2가지 모순에 부딪힌다.
첫째, 내면과 외면의 직접적 관계성은 법칙화 될 수 없다. 내면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외면 또한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성의 법칙성은 각각 요소 간의 관계를 관찰하고 서술하고자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둘째, 법칙은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양적 측정으로 귀결된다. 만약, 외면과 내면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기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하기에 양적인 측정을 불가하다. 오직 질적인 반응만 존재한다. 따라서, 양적측정에 대한 이성의 집착은 모순에 빠지고 만다.
헤겔은 뉴턴 과학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셸링의 자연철학도 양적 측정에 따른 자연의 관찰이라는 점에서 비판한다. 셸링의 자연철학은 절대자의 존재를 상정하고 모든 실재 속에서 동일한 직관만을 발견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철학은 질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에게 자연은 정신의 발전을 통해 생성된다. 이는 발전의 단계에 대한 질적인 차이를 반영할 수 있는 반면, 처음부터 절대자의 표출인 셸링의 자연은 질적인 차이를 사유할 수 없다. 유기체의 내면을 양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생명체를 기계적 대상처럼 다루게 만들며, 이성은 다시금 자기모순에 빠진다. 유기체는 자기 복귀적 내면을 통해 변화를 수반하지만, 그 변화는 자연적 목적성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며 자유로운 보편성을 실현하는 대자적 존재에는 이르지 못한다.. 유기체는 자연에게서 주어진 본능에 묶여있고 이를 넘어서려는 공동체를 통합 협동의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다. 이에 이성은 유기체에서 자신을 찾는 것을 단념하고 자기의식을 관찰하려고 한다.
(2-3) 자기의식의 관찰
무기체와 유기체 그리고 자연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이성은 자기의식 스스로에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식의 관찰에서 헤겔은 관념론을 이야기한다. 자연이라는 외적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인식을 찾으려는 시도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일치를 의미한다. (즉, 나 자신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연이 나의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은 나의 구조의 모양에서 자연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이성 자체에서 법칙 생성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성은 논리학으로 눈을 돌린다.
(2-3-1). 논리학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이후,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이성은 논리학에서 2가지 문제를 발견한다.
첫째, 논리학은 논리의 형식만 다룰 뿐 세상 자체와 관계하지 않는다. 참과 거짓을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이 아니라 단순히 관념으로만 파악하려는 이런 방식은 “생”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이는 자기의식의 과정에서 금욕주의가 경험했던 한계와 비슷하다.
둘째, 논리학에 의해 법칙화된 사유는 변화하는 지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유에 의해 포착된 지만 형식화 시킨다. 이 또한, 변화와 생성의 주체인 지 자체를 표현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성은 형식화된 사유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행동에서 자신을 관찰하려고 하는 이는 심리학으로 나아간다.
헤겔에게 진리는 개념의 운동이기에 모순이 필연적이다. 모순을 담지하지 못한 진리는 죽은 진리일 뿐이다. 따라서, 전통적 논리학 즉 a=b라는 모순을 배제한 참을 찾는 논리학은 헤겔에게 지양되어야 하는 형식인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 동일하다는 헤겔의 관점처럼 전통논리학의 고정된 형식은 고정되고 죽은 내용만을 생산한다. 헤겔은 이미 서론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논리학에 대해 설명했다. 주어가 술어에 잠식되었을 때, 우리는 주어를 다시 찾으려고 노력하고 이런 운동은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는 것이다. 엥겔스와 레닌은
"관념론은 지배계급의 세계관이며, 유물론은 피지배계급의 해방적 세계관이다.”
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경제체제(하부구조)가 관념(상부구조; 법 교육 철학 등)을 규정한다. 경제체제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주도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은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만, 경제체제라는 물질은 변화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에 진보적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헤겔에게 있어 관념만이 주도적이다. 물론 개별적 관념은 타자의 영향을 받기는 하겠지만, 헤겔의 관념론은 고정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체계가 아니라, 모순을 내재한 개념 운동으로서 기존 질서 자체를 불안정화한다.
(2-3-2). 심리학
이성은 인간을 내면과 외면을 연관 지어 설명하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 이를 통한 인간의 행동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인간이 어떠한 이유로 “폭력적이 되는가?”, “살인은 어떤 심리상태에서 일어나는가?” 등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서 법칙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유를 규정하는 종교, 풍속, 자연환경등을 분석해서 그 연관성을 찾으려 한다. 이는 인간의 개체성을 보편적 정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아프리카는 따뜻한 기후로 게으르기 때문에 계몽이 필요하다는 과거 식민지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사유와 유사하다. 심리학은 자연(즉자적 실재)을 주체의 내면 상태를 표현하는 도구(대자적 대상으로서의 자연)로 환원함으로써, 자연의 복잡성과 자율성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한다. 또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이지 행동을 촉발하는 심리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리학적 접근은 인간의 개별성을 사상한다. 어떤 원인이 있던지 간에 행동하는 것은 개체이다. 그리고 관념론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그 개체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 원인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심리적 원인으로 파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인이 되는 요소는 각 개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체가 보편성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보편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체가 헤겔에게는 무한성이자 개념으로서 운동을 가진 의식이기에 심리학은 실패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의 원환론적 접근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심리학은 관찰하는 이성이 법칙을 통해서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고정된 존재를 탐구하려는 오성의 태도와 유사한 것이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학과 심리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실패를 반복한다. 전자는 형식 속에서, 후자는 내면 속에서 운동을 고정시켰다. 이성은 이제 사유도, 심리도 아닌 곳에서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곳이 바로 신체이다. 신체는 관찰과 행위가 분리되기 이전의 자리이며, 이성이 세계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최초의 형식이다. 이러한 이성의 접근은 여전히 진리를 고정된 것으로 보려는 오성적 의식을 담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편적인 나를 자연에서 찾기 위해 이성은 우연성과 변화로 흩어지는 자연이나 심리, 혹은 형식적 논리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지속성을 지닌 신체를 진리의 장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신체 역시 곧 행위와 습관, 노동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임이 드러나며, 이성은 다시 한번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게 된다.
(2-3-3). 관상학 및 골상학
인간의 신체는 무엇인가? 인간의 내면이 즉자적인 요소라면 인간의 신체는 대자적임과 동시에 대타적이다. 대자적이라고 함은 인간이 자신의 즉자적 요소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신체를 사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대타적이라는 말은 타자가 나에 대한 인식을 신체를 통해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신체는 타자에게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면과 외면의 통합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고 이성은 신체의 관찰로 나아간다.
이성은 처음은 얼굴에서 그다음은 뇌의 모양에서 인간의 내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 발과 같은 신체가 내면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얼굴 표정이 가장 직접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얼굴표정 및 신체에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두뇌로 관심이 이어진다. 헤겔은 인간의 행동과 작품에 의해서 파악가능하지, 내면의 표현의 얼굴표정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관상학을 비판한다. 관상학은 어떠한 직접적 연결도 없이 관찰자의 의견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골상학은 인간의 살아있는 “뇌”를 고정되고 죽어있는 뼈에서 관찰하려고 하는데 이는 유기체에서 무기체로의 퇴보를 의미할 뿐이다.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으로 자신을 파악하려던 고정된 사물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살아있는 “생”이 아니라 존재에 고정된 관념이나 이성의 활동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은 이제 관찰에서 벗어나, 실천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사유와 존재가 동일하다면, 그리고 그 사유가 내 것이라면, 변화하는 진리는 나의 행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성은 수동적 관찰에서 능동적 변화로 이행하게 된다.
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골상학에는 긍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첫째, “정신 = 뼈이다”라는 무한명제는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관념론의 최대 난제는 정신적 요소가 어떻게 물질적 요소로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관념론에 대해 오해를 한다. 하지만 관념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이 물질로 변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한 바가 인간을 행위하게 하고 그 행위를 통해 물질을 산출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정신 = 뼈이다”라는 무한 명제 속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관념론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이런 무한명제는 위에 설명한 헤겔식 논리학에 따르면 자아에 대한 새로운 세계로 이어진다. 무한명제에 맞닿은 의식은 정신을 더 이상 뼈와 같은 고정된 존재에 정착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정신을 행위와 욕구, 힘의 운동으로 다시 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관념은 정신이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어떤 욕구 혹은 힘으로 정신을 재정립하고 이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