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을 읽고 by프리드리히 헤겔(4편)

불행한 의식

(5) 불행한 의식

(5-1) 불행한 의식이 가지는 철학적 의의

장 이폴리트 (Jean Hyppolite)는 불행한 의식을 정신현상학의 근본주제라고 말했다.


"불행한 의식은 <정신현상학>의 근본 주제이다. 의식은 아직 진리의 확신의 구체적 동일성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을 목표로 하기 대문에 원칙상 의식 자체는 항상 불행한 의식이다"


헤겔은 의식의 운동이 의식을 불행한 의식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견해로는 헤겔은 불행한 의식을 넘어설 수 있음을 그의 철학 전체에 걸쳐 저술하고 있다.


첫째, 헤겔은 의식이 자유를 얻기 위해 관념론으로 도피하고 그 결과 종교로 귀결되는 듯 한 여정을 보여준다. 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헤겔에게 절대적 관념론은 행복한 의식이 도야의 핵심이다. 관념론은 타자와의 공유 불가능성 등에 의해 불완전한 철학체계이다. 하지만, 절대적 관념론을 통해 사유와 존재의 통일 그리고 나와 타자의 같은 생각(이거 헤겔식 표현이 있는데)으로 고양된 의식은 진리와 확신의 구체적 동일성에 도달할 수 있다.


둘째, 정신현상학 서론에 꽃이 열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씨앗, 열매, 꽃 전체로의 과정이 진리라고 말한 것처럼 헤겔에게 진리는 전체이다. 불행은 진리가 아니지만, 진리가 전개되는 필연적 계기이다. 헤겔은 의식이 가진 목표, 목표를 달성하려는 욕구, 행동하는 도구 그리고 결과 모두가 전체로서의 진리이다. 따라서, 불행한 의식의 불행은 부분으로 보면 부정적 의미를 가지지만, 행동을 전체로서의 진리로 본다면 불행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행위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5-2) 스토아주의 회의주의에서 불행한 의식으로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는 의식이 자기를 정립하려는 실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의식은 둘 사이 반복되는 부정과 열망이 자신 내부에서 기인한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는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내 내면의 분열이 진리에 이르는 길을 파괴하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자아는 고통받는다. 그리고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를 통해 자기의식의 모순을 자각한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 된다. 회의주의는 정립된 진리를 부정하고,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하면서도 일관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안의 운동성을 자기 자신의 활동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외부적 조건에 휘둘리는 상태로 머문다. 하지만, 불행한 의식은 이 운동을 자기 스스로가 만든 의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피안에 대한 의식의 열망은 금욕주의의 관념적 자유를 진리로 피안(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시키고, 회의주의의 모든 부정을 차안(현실세계)에 위치시킨다. 이는 부정을 통한 통합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에 의한 결과다. 금욕주의는 자기 관념 속의 진리를 추구하지만, 그 진리는 현실과의 충돌 앞에서 회의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회의주의의 모순을 느낀 자기의식은 다시 금욕주의적 관념을 진리로 파악하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그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를 거쳐 불행한 의식으로 가는 정신의 여정에서 <정신현상학>이 가진 원환운동으로서의 통일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의식은 대상을 통해 본질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이에 무한한 보편자와 고요한 법칙의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거쳐온 자기의식은 다시 한번 절대자라는 피안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의식의 고요한 법칙의 세계와 동일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를 모두 자신의 의식으로 파악한 불행한 의식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대립시킨다. 하지만, 회의주의를 통해 자신의 불안정성을 인식했기에 지금의 삶은 비 본질적인 것, 그리고 본질적인 절대자를 상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려는 과정 자체가 불행한 의식의 운동이며, 이 운동이 종교의 형식을 거쳐 더 이상 피안에 머물지 않게 될 때 의식은 비로소 정신으로 이행한다.


장 이뽈라뜨에 따르면, 의식은 이제까지의 여정을 통해


“의식은 즉자적인 진리 자체를 파악했다고 자처하였지만 단지 대자적인 확신으로 추락했을 뿐이다. 확신은 자신에 도달했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만 그러한 확신에 도달한다.”


의식은 사물의 그 자체 즉 즉자적인 진리(대상자체의 진리)를 추구했지만 나의 관념이나 규정이 포함된 대자적인 존재(의식을 통해 파악된 대상)만 파악했을 뿐이다. 자기 확신은 자신을 이해했다고 믿지만, 이는 단지 주관성에 도달한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편성, 즉 자기 주관성을 소외시킬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의식의 진리와 자기 확신은 진정한 자기 동일성이 될 수 없기에,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 된다. 이러한 불행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의식은 절대적 보편성을 지닌 절대자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헤겔은 불행한 의식의 고양을 3단계로 나누었다. 역사적 실례를 든다면 첫 번째 단계는 유대교에, 두 번째 단계는 초기 기독교의 형태에 대응하며, 세 번째 단계는 유럽의 중세로부터 르네상스에로 그리고 근대적 이성에로 나아간다.


(5-3) 본질과 비본질의 대립으로서의 불행한 의식: 유대교

금욕주의와 회의주의 모두를 경험한 자기의식은 자기 삶의 무상성을 경험한다. 회의주의적 사고로 인해 타인의 삶의 부정으로 통해 자기를 정립하는 자기의식은 우연성의 포로가 된다. 타자를 기반으로 자기를 의식하는 자기의식은 자기 동일성을 찾을 수 없다. 자기의식은 자기만의 진리를 가지지만, 타자 또한 타자의 진리를 가진다. 문제는 자기의식이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타인을 통해 나를 인식하기에, 자아와 자기의식은 동일시될 수 없다. 이에 불행한 의식은 타자가 아닌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를 통해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헤겔은 유대교가 불행한 의식의 첫 단계라고 말한다. 유대교는 자아를 차안에 그리고 도달하고자 하는 절대자를 피안에 둔다. 불행한 의식은 절대자에 닿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도달할 수 없다. 헤겔에게서 칸트, 특히 피히테의 반성철학은 절대자를 의식의 외부에 남겨둔다는 점에서 불행한 의식의 첫 번째 형식과 구조적으로 대응한다. 피히테는 자아가 스스로를 정립하고 피안을 형성한다고 했지만, 이는 자아의 자유를 대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피히테의 자아는 절대자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가 아니라 결핍과 고통 그리고 좌절을 필연적으로 가진 자아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단계의 불행한 의식은 자기모순과 좌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좌절은 절대자가 단지 피안에 머무르지 않고 가변적 현실 속에 현현해야 한다는 요구를 낳으며, 이는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준비한다. 회의주의를 거쳐 본질을 찾으려는 자기의식은 가변적인 타자들 속에서는 자기 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에 불변의 절대자를 상정한다. 그러나 절대자를 피안의 본질로 설정하는 순간, 유한한 자기의식은 그 본질에 도달할 수 없으며, 바로 이 구조가 불행한 의식의 첫 번째 형식이다.


(5-4) 개별자와 불변자의 통일로서의 불행한 의식: 초기 그리스도교

첫 번째 단계의 모순은 불행한 의식을 불변자와의 통일로 나아간다. 유대교에서의 절대자는 피안에 위치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불변자는 인간의 몸으로 육화함으로써 가변적 개별성의 형식을 띠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불행한 의식이 자기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절대자는 예수의 몸을 빌려 세상에 등장했고, 가변자는 예수와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 불변자와 하나가 되려고 했다. 이는 예수의 존재가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로 발전한 불행한 의식이 예수라는 존재를 발명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장 이폴리트 (Jean Hyppolite)는


“여기서 불행한 의식의 의미가 변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까지 불행한 의식은 자신의 본질을 자체 내에 지니지 못하고 그것을 초월적인 상태에서 즉 존재를 넘어선 일자에서 추구하여야만 하는 생의 무상성에 대한 의식이었다. 이제 생과 개별적 실존 자체와 즉 주관성과 동일시될 것이다.”


를 통해 의식부터 이어져온 의식과 본질의 통합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스티븐 홀게이트 또한


“유한성과 가변성 속에 처해 있는 우리가 우리의 소외를 완벽하게 극복해서 마침내 불변자와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우리 안에 밝히는 촛불이다”


라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헤겔은 예수의 현현을 통해 불변자와 개별자의 관계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선을 보여준다. 불변자는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현현하는 주체적 실체로 이해된다. 그리고 개별자 또한 불변자를 통해서 본질을 얻고 행위할 수 있다. 이는 불변자가 개별자를 통해서 자신을 실현함과 동시에 개별자로 인해 변화를 받아들임을 말한다. “실체는 주체이다.”는 불변자와 개별자의 관계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육화 된 불변자와의 접촉을 통해 합치하려던 가변자는 육화 된 존재가 우연적이고 일시적임을 알게 된다. 예수는 시간과 공간의 어느 한지점에 나타났을 뿐이다. 육화 된 절대자는 인간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인간이 생에 포획된 유한성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는 불변자는 당시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 거기서는 그랬지만 여기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감각적 확신이 느꼈던 모순과 일치한다. 육화 된 절대자를 통해 합치를 갈망했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절대자가 육화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육화를 하나의 개별적·우연적 존재로 고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불행한 의식은 여전히 불행하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의 불행한 의식은 기도와 헌신을 위해 불변자와 통일된 상태로 고양하려고 노력한다. 엄밀히 말해 기도와 헌신은 합치를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불변자에 다다르지 못하지만 다다를 수 있다는 감정 속으로 불행한 의식을 인도하고 의식은 합치된다는 감정을 느낀다. 불행한 의식의 노동과 향유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다른 향상으로 나타난다. 주인과 노예에서 자기의식은 자기의 의식이 대상화되는 과정으로 노동을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으로 향유한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의 불행한 의식은 절대자와의 합치를 위해 사유하기에 노동과 향유는 절대자를 향해있다. 노동을 통해 사물을 변형하고 향유를 통해 사물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의식에게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절대자가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은 절대자를 위해 그리고 향유는 우리의 만족이 아니라 절대자의 만족이어야 한다. 이처럼 불변자는 자기를 포기하고 불행한 의식이 노동과 향유를 하도록 하고, 불행한 의식은 자기의 능동성을 포기한다. 양자의 포기를 통해 합치의 감정을 느끼지만, 불행한 의식은 즉각적으로 모순에 빠진다. 왜냐하면 노동과 육화는 스스로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불행한 의식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며, 자기부정을 통한 구원을 갈망하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고행을 반복해도, 의식은 자신의 개별성을 떨칠 수 없다는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이제 불행한 의식은 자기의 개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신을 적으로 선언한다.


(5-5) 개별성을 비우고 매개를 통한 절대자와의 합일: 중세 그리스도교

가변자의 의식에 절대자를 초대했지만, 이는 모순으로 귀결된다. 이에 불행한 의식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교화라는 매개를 통해서 절대자와의 만남을 추구한다.


장 이폴리트 (Jean Hyppolite)에 따르면, “개별적 의식은 자신의 대자적 존재를 소외시키고 자신을 하나의 사물로 변형시키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더 높은 단계의 진리를 획득한다”라고 말했다.


노동과 향유 그리고 헌신을 하는 개별적 의식은 대자적 존재다. 절대자와의 합치가 사유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라는 매개는 필연적이다. 이에 개별성을 완전히 지우는 방법은 스스로가 즉자적 존재 즉 사물로 변형하고 수동성을 띄는 것이다. 자아가 가진 특수성은 자아 내면에 녹아있기 때문에 자아가 절대자를 인식할 때, 대자적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절대자는 변한다. 이는 절대자를 통해 즉자대자존재가 되고자 하는 불행한의식을 좌절시킨다. 따라서, 절대자의 매개인 교회에 완전하게 복종할 때 불행한 의식은 자기의식의 완전한 부정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제 의식은 자신의 노동의 결실을 향유로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그것을 바치고 자기감정을 부정한다. 또한 절대자의 현현으로 인해 세상은 절대자 그 자체이다. 여기서 2중의 부정이 일어난다. 절대자는 자신을 포기하고 개별자들이 노동을 통해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허용하고, 개별자는 개별적 행동을 통해 얻은 개별적 대상을 교회에 바치는 행위를 통해 개별성을 지워낸다. 이제 의식은 가난과 순결 그리고 복종의 길인 금욕주의로 다시 들어선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의 금욕주의는 자기 사유의 절대화이지만, 불행한 의식의 금욕주의는 자기 사유의 절대정 부정이다.


또한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주관성의 추구를 통해 진리를 찾으려는 자기의식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세 그리스도교의 자기부정은 불변자와 개별자의 합일로 이어진다. 개별자는 자신의 포기를 통해 사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대자성을 지우고 즉자적으로 불변자와 합일이 된다. 나의 개별적 행위가 보편자의 뜻과 다르지 않다는 확신이 신을 저 멀리 피안으로부터 현실로 끌어내린다. 의식은 더 이상 불행한 의식이 아니며 오히며 “나의 이성이 곧 세계의 본질이다”라는 긍정의 단계로 나아간다. 헤겔은 이를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언표 한다.


중세시대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은 중세시대의 신 중심 시대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신 중심시대적 사상을 끝까지 사유하여 얻어낸 정신의 승리이자, 필연적인 발전이다. 나와 불변자의 합일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된 자기의식은 자기를 찾기 위해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이는 관찰하는 의식이 된다.


(5-6). 종교의 탄생: 미르체아 엘리아데와 헤겔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 타자를 희생하기도 하는 존재다. 그런 인간이 보이지 않는 신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종교를 만들어낸 것은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미스터리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성과 속』에서 종교를 문화나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라고 본다. 그는 모든 종교는 원시 종교에서 비롯된 ‘변형’이자 ‘지속’이라 설명하며, 고대와 현대 종교를 연속선상에 놓는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인간은 불확실성과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세상에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한다. 성스러운 것은 초월적 질서, 의미, 기원을 제공하는 중심축으로서 존재하며, 인간은 이를 통해 세계에 방향성과 확실성을 부여받는다. 반대로, 속된 것은 변화 가능하고 불안정한 일상의 영역이다. 성과 속의 이분법은 인간이 세상과 자기 존재를 질서화하고자 하는 본능적 시도다. 또한, 엘리아데는 종교가 특정한 권력 구조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이라는 보편적 구조가 지속된다. 이는 다양한 종교의 탄생과 속성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의 단계적 발전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헤겔의 설명은 탁월하다. 헤겔은 유물론적 입장이 아니라 의식의 관념에서 종교의 탄생과 발전을 설명한다. 그는 유대교,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중세 그리스도교의 발전을 설명했다. 종교가 발전하는 이유는 초기 종교는 그 이전 단계의 의식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의식이 당면한 문제가 바뀌면서 자연히 종교의 속성은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 기도, 헌신 그리고 노동에 대한 설명은 엘리야 데와 같은 종교 철학자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종교 안에서 노동이 가지는 입장은 각 종교마다 상이하다. 중세의 종교는 노동은 교회를 위해서 존재했다. 인간의 향유는 신의 향유의 부정이기에 보장받지 못했고 금욕의 길로 가야 했다. 하지만, 막스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설명한 것처럼 어느 순간 노동의 의미는 변한다. 그리고 자본의 축적이 찬양되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헤겔의 절대자와 가변자의 합치를 위한 의식의 노력으로 이런 과정을 보면 설명이 가능하다. 금욕주의적 종교는 개인의 향유를 부정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절대자의 의식을 실현하는 것이 경제적 발전이다. 절대자가 만든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절대자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종교의 항상성을 강조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이자 욕구이기에, 어디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에 우월하지 않음을 말한다. 반면에,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종교의 발전과 당면한 문제의 극복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이처럼, 둘의 종교에 대한 설명은 다르지만 상호보완적이다.


(5-7) 자기의식은 칸트, 피히테 그리고 셸링으로의 여정이다

헤겔은 자기의식의 장이 정신이 절대지가 되는 여정이라고 <정신현상학>에서 밝혔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특히 로버트 피핀은 자기의식 장을 자연적 욕망에서 벗어나 상호적 정당화와 책임이 가능한 규범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피핀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자기의식의 발전 단계가 아니라 주인은 규범을 규정하는 자, 노예는 규범을 따르는 자로 설명한다. 그리고 규범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재화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다고 말한다. 이런 해석은 타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죽음의 공포를 통해서 주인에게 복종하기로 한 노예가 어떻게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기존 질서의 부정과 새로운 보편성의 정립을 통해 보편적 인정의 재구성을 재정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둘째, 피핀의 해석에서 불행한 의식의 종교적 해석은 의미를 잃는다. 왜냐하면 노예에게 규범이 강요된 거처럼, 교회를 따르는 사람에게 규범이 강요된다. 하지만, 왜 불행한 의식은 복종을 자신의 진리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설명할 수 없다. 규범이 헤겔의 철학에서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은 헤겔이 생각하는 절대지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지 이게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셋째, 피핀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관념론이 아닌 유물론으로 읽어내는 과오를 범한다. 헤겔의 기초가 관념론인데, 이를 유물론이라는 렌즈로 해석된다면 결과물은 모순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피핀은 자연적 욕망을 인간 행동의 시작으로 읽고, 지배와 피지배 계급의 상호작용에 따른 규범의 생성활동으로 전개한다. 이런 분석은 헤겔이 생각하는 의식이 자기 동일성에서 비동일성이라는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변증법이 결여되었다.


오히려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은 칸트, 피히테, 셸링으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에 대한 내재적 비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장은 개별 관념론이 하나의 의식 형식으로 실현될 경우 드러내는 한계를 현상학적으로 제시하며, 오직 절대적 관념론만이 즉자대자의 운동을 통해 자기의식의 진리를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직접적 경험은 아니지만, 이성에 의해 원리적으로 인식 가능하다고 전제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본질로 상정하고 이성에 의한 직관은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고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본질을 신에 의해 창조된 질서라고 정의 내리고 신의 계시는 우리에게 본질로의 길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기하학적 이성이 본질에 다다르는 열쇠라고 했다. 하지만 칸트는 물자체는 있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물자체론은 우리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


장 이폴리트는


“이러한 유한성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오성이 한계 없는 오성의 이념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라며 헤겔에게 있어 유한성은 주어진 게 아니라 의식이 무한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규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무한성을 생각할 수 있는 의식은 유한성을 초월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초월하기 위해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반면에 칸트에게 유한성은 소여 된 것이다. 물자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일 뿐만 아니라, 원리적으로 넘어서려는 인식의 시도 자체가 금지된 대상 따라서, 칸트의 철학 체계에서 의식은 유한성에 갇혀있게 된다. 이런 모순은 칸트의 도덕적 자기의식에서 신 존재를 요청하기는 하지만, 헤겔은 이를 칸트의 한계로 파악했다. 자기의식의 첫 장 욕구는 유한한 무기체의 소유를 통해서 본질에 다다르려고 하는데, 내 견해로는 헤겔이 칸트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욕망에게 당장 충족되어야 할 것은 유한한 것으로 이는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 욕망은 무한성을 가진 살아있는 다른 자기의식을 통해서 다음 단계로 고양되는데, 이는 물자체라는 초월적 잔여를 전제하지 않는 자아,

다시 말해 자기 운동 속에서 무한성을 실현하려는 자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무한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칸트의 이미 주어진 범주로는 절대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를 넘어서려는 피히테는 물자체를 철학적 설명 원리로써 제거하고, 세계를 자아의 자기 정립 운동으로 파악하려 했다. 세계는 자아가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으로 비아이고 피히테에게서 자아=자아는 자아의 정립운동을 통해 산출되는 결과라기보다, 모든 철학적 설명의 출발 원리로 전제된다. 그러나 헤겔에게 자아=자아는 차이와 매개를 결여한 추상적 자아일 뿐, 어떠한 운동도 산출하지 못하는 공허한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아의 정립운동이 중요할 뿐 비아는 자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지만 헤겔에게 타자는 자아의 정립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피히테의 자아와 비아를 단순히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피히테적 자아–비아 구조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현될 경우 드러나는 모순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아는 주인의 의식이지만 이는 노예에 기대고 있다. 수동적이라고 느껴지는 노예는 의식의 발전을 이끄는 주체이고 이는 비아에 해당한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피히테의 추상적 자아를 비판하고 소외되었던 비아를 의식 발전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셸링의 동일성 철학은 모든 것을 절대자 안에서 동일시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자연과 정신의 차이를 제거한다. 그리고 매개와 부정의 순기능을 사상하여 질적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불행한 의식 전에 나오는 행복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매개와 부정을 두려워한 나머지 변화의 계기를 제거하고, 동일성 속에 머무는 것이 셸링의 동일성 철학이다. 헤겔은 이러한 동일성 철학을 두고 “어둠 속에서는 모든 소가 검게 보인다”라고 비판한다. 헤겔은 행복한 의식이 어떻게 불행한 의식으로 필연적으로 이행하는지 그리고 불행한 의식의 이성으로 이행을 보여주면서 셸링을 넘어선다. 행복한 의식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의식의 발전을 뒤로한, 자기기만적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를 받아들이고 불행한 의식으로 나아갈 때에만, 자기의식은 비로소 이성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6) 결론

자기의식의 여정은, 의식의 여러 단계를 거쳐 결국 자기 내부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다. 그러나 그 결론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만 보편적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른다.

작가의 이전글정신현상학을 읽고 by프리드리히 헤겔(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