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식 ~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 금욕주의 ~ 회의주의
자기의식
(1) 자기의식과 욕구
의식은 진리를 대상과 관념의 일치를 통해 찾으려고 한다. 이는 대상은 본질적, 자아는 비본질적이라는 체계에 상응한다. 이전에도 설명한 것처럼, 대상은 변하지 않는 반면 나의 자나는 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의 고정성은 오성이 무한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무너진다. 의식은 자기 스스로 정립하고 그 정립을 부정하는 무한성의 운동을 생명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무한성의 등장은 변화하는 법칙 또한 유기체적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자기의식으로 전개된다. 자기의식은 대상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이 어떻게 대상을 산출했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자기의식에게 진리란, 칸트가 물자체를 인식 불가능한 한계로 설정했던 것과 달리, 고정된 어떤 본질이 아니라 생명적 의식의 운동, 즉 부정과 매개를 통해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에게 세상의 대상은 자기의식의 발현이다. 자기의식은 자연을 소여 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하며, 이렇게 형성된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인정을 확보하려는 욕구를 지닌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정립하지 않은 초기 자기의식은, 아직 매개를 거치지 않은 즉각적인 욕구의 충족을 추구한다. 형성이나 노동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 단계의 자기의식은 대상을 변형하거나 지속적인 형식으로 자신을 새기지 못한다. 따라서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발견하고 따는 행위는, 세계를 통해 자신을 형성하려는 행위라기보다 배고픔이라는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하려는 자기의식의 초기적 표현에 해당한다.
하지만 욕구의 충족은 공허하다. 만약, 진리가 스스로 정립하고 이의 부정을 통한 자기 생성의 운동이라면 욕구는 진리가 될 수 없다. 욕구는 대상을 부정하고 파괴한다. 자기의식은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대상을 변형시키고 소비한다. 그 과정에서 대상 자체가 사라지기도 하고 욕구가 사라지기도 한다. 예컨대 빵은 배고픔이라는 욕구를 충족시키지만, 그 충족과 함께 대상과 욕구는 동시에 사라진다. 명품가방 역시 소유의 순간 이후 곧 권태로 전환된다. 이처럼 욕구의 충족은 자기의식을 정립하지 못하고, 오직 변화만을 남긴다. 그리고 대상의 부정을 거친 자기의식은, 더 이상 동일한 자아로 머물지 않는다. 헤겔에게 자기의식은 자아=자아라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자기의식은 대상과의 접촉 그리고 부정과 복귀를 통해 변화하는 자아다.
따라서 무기체를 통해 욕구를 충족하려는 자기의식의 행위는 그 한계를 드러내며 부정된다. 무기체는 부정됨으로써 사라지기 때문에, 자기의식을 지속적으로 반영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자기의식은 충족되더라도 소멸되지 않는 무한성을 지닌 다른 자기의식을 향해 나아가며, 욕구의 차원을 넘어 자기 자신을 확증받고자 한다. 자기의식이 타자를 통해 인정을 요구하는 이유는, 자기의식이 욕구의 충족처럼 소멸되지 않는 지속성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의식이 오직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정은 강요되거나 일방적인 것일 수 없다. 인정이 진정한 근거를 가지기 위해서는, 나를 인정하는 타자 역시 자기의식으로서 자유롭고 자립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기체를 통해 충족하려는 자기의식의 욕구는 그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스스로의 충족 조건을 소멸시킨다. 따라서 욕구의 충족은 자기의식을 지속적이거나 안정적인 방식으로 정립하지 못한다. 타자를 통해 자기의식은 나와 같이 무한성을 가진 타자의 자기의식에 비추어 나를 확보할 수 있다. 헤겔의 분석은 현대사회에도 유효하다. “내가 나를 파악할 수 있을까?” 내가 도덕적인 사람인지, 비도덕적인 사람인지 혹은 가족적인 사람인지는 모두 상대적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하는 판단은 가능할지언정, 유효하지 않다. 나의 행동은 타자 즉 대상의 행동과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항상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자기의식은 타자가 빈곤하지 않고 풍부한 자기의식 일 때만 자기도 풍부할 수 있다. 이는 상호존중으로 이어진다.
헤겔의 자기의식과 타자에 대한 의존성은 키에르케고르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비판받는다. 헤겔은 자기의식이 자기를 타자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개체성은 유한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개인의 삶은 중요하지만 개인의 삶은 사회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고 이는 크게 보면 정신의 출현을 예고한다. 개인의 삶의 개별성은 죽음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과 정신에 통합된다. 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밈의 의미와 맞닿아 보인다. 인간은 종의 특성에 얽매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문화와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헤겔이 삶이 중요하지 않고 개체는 전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한다면 실존주의자들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헤겔은 그 누구보다 생의 수다성과 다양성의 중요성을 설파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체성의 생과 몸부림은 변증법과 그로 인한 정신의 도야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2)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상호존중을 통해서 자기의식을 충족하려던 의식은 목숨을 건 생사투쟁으로 귀결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타자와의 상호존중은 가변적이다. 내가 상대를 존중했지만, 상대는 나의 의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 타자 자기의식이 나를 대상으로 취급하면 자기의식은 대상화되고 자기의식으로서의 본질을 잃는다. 상호존중이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자기의식은 존중을 확실한 것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며, 이 시도는 경험상 생사투쟁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둘째, 비록 자기의식 간의 상호존중이 보장되더라도 생명을 매개로 한 자기의식은 순수한 자기의식이 아니다. 생명에 집착하는 의식은 무한성을 가진 생이 아니라, 자연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에 대한 집착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본능이라는 매개체에 의해 자기의식이 발현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이는 헤겔에 의해 논의된 것은 아니지만 욕구 추구가 자기의식의 충족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고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욕구의 추구를 통한 대상의 발현은 자기의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세상에 제한된 물질이 존재하고 제한된 물질을 다른 자기의식과의 경쟁을 통해 획득해야 하기에 생사투쟁은 제한된 물질을 추구하려는 자기의식의 투쟁인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존중을 보장하고 생명이라는 매개체에 연연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기의식은 다른 자기의식과 생명을 건 자기 투쟁으로 귀결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특정 시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간이 타자를 의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사회적 관계에 따른 상하관계는 존재했다. 하지만, 헤겔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상하관계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억압된 상황에서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예나 주인은 이전 의식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 운동을 자기의 운동으로 보지 못한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 처한 모든 자기의식이 헤겔의 변증법에 따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예와 주인의 관계의 모순을 인지하고 이를 새로운 관계로 정립하려는 시각을 가진 의식만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로마의 스파르타쿠스였을 수도 있고 혹은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존 메이드 케인즈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사상을 뒤집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헤겔은 의식의 세계정신으로의 여정이 현시된다는 주의로 관념론에 속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경제구조에 따라 의식이 결정된다는 유물론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에서 고통받는 노동자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을 전개했다. 마르크스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꿈꿨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최소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프롤레타리아 에게는 희망을 고삐 풀린 힘을 사용하는 부르주아에게는 경고를 했음은 확실하다.
a. 주인의식
주인은 생명에 연연하지 않는 생의 부정성을 보여줌으로써 목숨을 건 생사투쟁에서 승리한 자기의식이다. 주인은 노예로부터 보장된 인정을 받고, 생이란 매개 없이 자기 자신을 내보이며 세상의 물질을 자기의 욕구에 따라 변형할 수 있는 대자적 존재이자 자기의식의 현시다. 하지만, 주인의식은 그 자체로 모순을 가진다. 생에서 자유로운 부정성을 통해 자기의식을 정립하려 했지만, 노예의 인정에 기대게 된 것이다. 또한, 물질의 소비를 지배하게 된 주인은 물질의 향유를 통해 욕구를 충족시킨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단순한 욕구의 충족은 자기의식에 공허하다. 계속해서 새로운 욕구를 찾아다녀야 하기에, 무한성으로서의 생이 아니라 유한한 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노예의 인정은 강요된 것이고 풍요로운 것이 아니기에, 주인이 느끼는 인정은 자기의식에게 도야의 발판이 아니라 퇴보의 발판이 된다. 노예의 인정은 자기의식이 자기의식을 자유로운 자기의식으로부터 확인받는 인정이 아니라, 생명에 종속된 의식으로부터 강제로 확보된 승인에 불과하다.
b. 노예의식
노예는 죽음을 두려워해, 주인에게 굴복한다. 생을 잃어버린다는 절대적 두려움이 자유와 자기의식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주인을 자기의식의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주인을 인정하고 노동하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지배한다고 보이는 주인은 역사발전의 운동력이 아니라 오히려 예속된다고 보이는 노예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노예는 주인을 인정하지만, 강요된 인정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노예는 주인에 대한 적대감과 반발을 가지고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노예를 변증법 발전의 주체로 삼는 것은 그가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노동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노예를 생에 연연하는 자기의식으로 만들었지만 또한 생 앞에 다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함을 인식케 했다. 이는 주인이 생을 포기하면서 가졌던 부정성을 노예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다른 점은 주인은 자신의 방식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개체성을 추구하지만 노예는 모든 것을 허무하다는 인식하에 모든 가능성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에 열려있다. 또한 노동을 통해 노예는 자연과 환경을 변화시킨다. 노예의 노동은 주인의 소비처럼 욕구를 충족하지 않지만 자기의 관념이 현실화되는 것을 목격한다. 노동은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하는 행위가 아니라, 욕구를 지연시키고 사물을 보존한 채 변형하는 행위다. 이 지연 속에서 노예는 자신의 사유가 대상 속에 지속적으로 현존함을 확인한다. 이는 노예를 즉자대자존재로 이끈다. 노예는 죽음의 공포 앞에 선 부정성을 통해 즉자적 존재가 됨과 동시에 노동을 통해 사물에 자신을 표현하는 대자적. 존재가 된다. 노예는 자신의 관념이 현실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이는 노예의 자기의식을 금욕주의로 이끈다.
c.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리고 현대사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현대사회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산업혁명의 고삐 풀린 천민자본주의에 희생된 노동자들이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킨 이후로 주인 계급이 스스로 무너지고 노예계급이 사회변혁 주체로의 등장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주인 계급은 교육과 혁신등을 통해서 계속해서 사회를 변혁시키고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있는 반면, 노예 계급은 분업이라는 자본주의의 발명품에서 대상에 자신을 새기기는커녕 교체가능한 부품으로 하루하루 자기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헤겔에게 노동은 노예가 자연을 변형해 완성품을 만들면서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분업은 노동자들이 완제품의 부분만을 획일화된 방법으로 생산하게 한다. 이는 자기표현은커녕 그 물건에 대한 통제도 현시도 없는 자기 소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과 ‘노예’는 자기의식의 개념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비유적으로 적용한 표현이다. 예전처럼, 주인이 노예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지만, 직업을 통제함으로써 생명을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주인이 로마시대의 콜로세움, 프랑스 절대왕정의 마르세유 궁전등으로 대표되는 퇴폐문화를 추구하는 상황에 이르러야 한다. 퇴폐는 눈 밑에 피어나는 다크서클과 내일이 없다는 듯이 놀아재 끼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퇴폐란 자기 지배력을 상실한 주인이, 현실의 위태로움과 불확실성을 감추기 위해 감각적 과잉에 몰입하는 상태다. 이는 자율을 상실한 채, 마치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다는 듯 행동하려는 자기기만적 반응이다. 이를 위해 이들은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향락에 빠져 산다. 이런 향락은 주인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상유지도 힘들게 한다. 주인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갖가지 도전에 직면한다. 새로운 기술 혹은 새 경쟁자의 등장으로 그들의 위치가 위태로월 질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은 물 밑에서 죽을 듯이 다리를 휘젓는 백조처럼 계속해서 경쟁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더 이상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진 그때 주인은 노력을 중지하고 소비와 향락에 빠지게 된다. 이때의 주인은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짐작하지만, 이 불안을 없애기 위해 지금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기에 없애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불확실성을 없애지 못할 때 인간의 선택은 불확실성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기만적 행동이 퇴폐문화다. 현대 사회의 주인계급이 아직 퇴폐로 빠지지 않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와 지속적 기술의 발전은 주인이 계속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이는 주인이 퇴폐에 빠져 향락에 집중하기보다는 더 큰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예전과 다르게 노예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은 효율, 경쟁, 경영, 회계와 같이 기관의 중추가 되는 부분을 직접 조작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된다.
(3) 금욕주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예를 의식변화의 주체로 삼는다. 주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체적 존재로 인정싸움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주인은 노예로부터 강요된 인정을 받고 사물을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향유하기만 한다. 따라서 주인은 자기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식 변화의 객체로 전락한다. 반면에, 노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삶을 선택한다. 이는 노예를 삶에 의해 규정되는 즉자존재로 만든다.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자기를 보지만, 강요된 노동을 통해 사물에서 자기를 본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의 존재로부터 나온 인식으로 사물을 변형하고 이는 사물에서 자기를 보는 계기가 된다. 이를 헤겔은 사유라고 한다. 사유란 자기의식이 자신을 대상에 투사하고, 그로부터 다시 자신을 반성적으로 인식하는 운동이다 사유는 자기의식이 자신의 생각을 외화함으로써, 자기를 잃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형식이다. 이런 노예의 사유와 노동의 결합은 노예의 자기의식을 금욕주의로 인도한다.
노예는 자연이나 욕망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만들어 내면서 자기의식을 발견하고 이는 정신의 실현으로 보인다. 자기의식은 자기의식이 곧 물질이라는 관념에서 시작했기에 이는 놀라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노예는 곧 자연과 삶에 주어진 우연성이 자신을 옭매어 옮을 알게 된다. 노예는 사용가능한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에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삶의 우연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는 자기의식이 외부 자연의 우연성과 타율성을 부정하고, 자기 안의 필연성을 탐구하게끔 만든다. 사유가 자신 바깥의 사물로 대상화되지 않더라도, 자기의식은 이제 자기 내면에서 자유로운 사유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기에 이른다. 노동은 자기의식을 사물에 새기게 했지만, 그 행위는 여전히 외적 조건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다. 금욕주의에 이르러서야 자기의식은 처음으로 자유를 경험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현실을 변형하는 자유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물러남으로써만 유지되는 자유다. 이 자유는 외부 세계를 소유하거나 변형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 소여 된 자연적 규정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내적 자유다. 이로써 금욕주의는 사유와 자유를 최초로 결합시키며, 자기의식이 자신의 사유와 존재를 일치시키려는 운동의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금욕주의는 보편성의 형식과 내용의 특수성이라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금욕주의는 사물을 부정하고 사회와 자연으로부터 등 돌리기 때문에, 현실대상과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은 같은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사유는 그 어떤 경험도 부정하기에 다양한 형태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대상을 단순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는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하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답하지도 못한다.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금욕주의는 이성적인 것이면 진리와 선을 간직하고 있다”라는 대답 밖에 주지 못한다. 이는 자기 전개와 확장을 도모할 수 없다. 다양성의 부정은 보편성과 다양성의 변증법을 통한 도야의 가능성을 버린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러한 금욕주의는 권태에 빠지고 만다. 또한, 금욕주의는 자기의식의 발전과정을 무시하고 지금만 강조하는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식은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등의 진리와 육체의 교류를 통해서 발전했기 때문에 감각과 지각은 필수구성요소다. 하지만, 이를 무시한 금욕주의는 모순에 빠진다. 금욕주의자는 세상의 모든 것 속에서 사유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자 한다. 하지만, 세상과의 교류가 부재한 금욕주의는 사유와 세상의 괴리라는 이원성을 드러낸다. 금욕주의가 세상과 단절된 자기 동일성에 머무르는 한, 그 사유는 보편성을 주장하면서도 현실의 구체성과는 유리되어 있다. 이로 인해 자기의식은 자신이 철저히 세계와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자각 자체를 사유의 내용으로 삼는 ‘회의주의’로 이행한다. 금욕주의는 사유의 자유는 보장했지만, 세계의 규정성 자체를 사유 속에서 해소하지는 못한 채 그대로 남겨둔다. 이로써 의식은 자유로운 사유와 규정된 세계 사이의 모순을 자각하게 되고, 그 모순은 규정 일반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전환된다.
(4) 회의주의
회의주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에 해당한다. 주인의식의 실패는 자기의식이 회의주의로 나아가는 변증법의 시작이다. 주인은 목숨을 건 인정투쟁에서 승리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향유하려고 한다. 주인은 경험을 통해 자아를 외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세상을 변형하지 못하고 따르기만(향유) 하는 주인은 자기를 정립하지 못한다. 회의주의자는 세상의 모든 규정에서 자기를 정립하지 못하는 한계를 자기 안으로 끌고 들어와 무화시킨다. 쉽게 설명하면, 회의주의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다 옳다고 하고 세상과 등을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규정을 부정하고 자신의 의식을 정립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세상이 정립한 모든 기준을 부정한다. 이런 기준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사유만이 중요할 뿐, 그런 사유를 제한하는 것을 거부한다. 자아는 이제 자신의 자유를 확고 부동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자기 확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의주의적 자아는 고유한 자기 자신을 정립할 수 없다. 이 자아는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이 없기 때문에 타자를 부정함으로써만 자기 확신을 정립할 수 없다. 먼저 회의주의자는 타자의 기준을 부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립한 부정이 긍정되었을 때,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부정했던 차이를 다시 부정한다. 만약, 회의주의자가 A라는 것을 반대했다고 치자. 그 후, 어떤 무리가 A의 부정을 옳다고 한다면 어떠한 정립된 규정도 없는 회의주의자는 A의 부정에 대한 부정을 하여 처음 자기가 반대했던 의견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처럼, 회의주의자의 의식은 부정과 긍정을 돌고 도는 환원론적 성격을 띤다. 그래서 이 자아는 맹목적인 우연에 지배되었을 뿐, 그 어떤 것도 정립할 수 없다.
이를 장 이뽈라뜨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회의주의자는 차이들의 불일치와 자아의 동등성을 대립시킨다고 했다. 그리고 동등성은 다시 하나의 구별이며, 자신에 대립하여서는 하나의 불일치라고 했다.
회의주의는 자아의 주관성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려 했다. 사회나 자연의 객과적 기준은 우연적이고 타자에 매개된 것일 뿐, 진실일 수 없고 오직 스스로 정립한 자아만 진정한 자기의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회의주의가 타자의 부정을 정립의 시작으로 삼음으로써, 오히려 삶의 우연성에 얽매이게 된다. 회의주의는 우연적으로 나타난 타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회의주의가 행하는 부정은 우연성에 기반한 부정일 뿐이다. 회의주의 앞에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다. 그리고 회의주의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우연에 기반한 우연일 뿐이다. 이처럼, 회의주의는 세상에 모든 기준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하지만, 어떨 때 회의주의는 세상의 기준에 무엇보다 얽매여 있는 것이다. 또한, 회의주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만, 이는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내면화된 회피다. 그래서 주체는 자기를 확인할 기회를 상실하고, 무한한 자기 확신의 순환 속에 갇힌다.
이 지점에서 회의주의의 철학적 의미가 드러난다. 회의주의는 스토아주의가 개념적으로만 주장했던 자유를 현실의 의식 형태로 끝까지 실현한 단계다. 스토아주의가 외적 세계로부터의 무관심 속에서 사유의 자유를 말했을 뿐이라면, 회의주의는 실제로 모든 규정과 기준을 부정함으로써 그 자유를 실천한다. 이 점에서 회의주의는 퇴행이 아니라, 이전 단계의 필연적 심화다. 그러나 바로 이 철저함 때문에 회의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회의주의는 모든 규정을 부정하지만, 그 부정은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형식을 가진 자아는, 정작 자기 자신을 동일하게 유지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 결과 회의주의적 자유는 세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우연과 상황에의 예속으로 전도된다. 이 단계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사유하거나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자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유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부정 속에서도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는 데 있다. 회의주의는 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하지만, 바로 그 실패를 통해 ‘지양 없는 부정’이 왜 공허한지를 드러낸다. 이로써 의식은 자기 분열을 더 이상 외부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되며, 그 분열 자체를 의식의 문제로 끌어안는 불행한 의식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를 파악한 자기의식은 자기를 불행한 의식으로 간주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로 자기의식을 인도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사상적 고양이 아니라 혁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사상적 고양뿐만 아니라, 노예의 혁명도 그의 책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주인의 폭정에 지친 노예가 행동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단순히 삶의 고됨이나 핍박이 혁명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없다. 헤겔에 따르면, 삶에 대한 집착이 목숨을 건 인정투쟁에서 노예가 된 이유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인간들은 삶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물론 몇몇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행동하는 독립군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에 따르는 선택을 했다. 삶의 집착이 노예의 행동을 방해하는 조건이라면, 외부의 조건보다는 내면적 조건만이 행동의 동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외부적 요인중 생명보다 강력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확신을 발명하는 동물이다. 확신이 없으면 좀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지금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 혹은 높은 가능성이 있다면, 행동할 수 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는 노동을 통해 사물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의 사유가 실현될 수 있음을 느낀다. 주인과의 관계에서 환멸을 느낀 노예는 주인과의 관계 역전을 추구하고 이런 사유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확신이 지도자에 의해 집단의 확신으로 변하면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라는 부정적 자기의식이 되지 않고 행동하는 자기의식이 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헤겔은 모든 의식은 결국 자기 부정과 외적 조건의 통일 속에서 고양된다고 본다. 따라서 노예가 단순히 억압된 존재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 세계를 변형할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 주체로 전환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 확신이 집단적으로 공유될 때, 역사적 사건 — 즉 혁명 — 으로 나타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