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을 읽고 by프리드리히 헤겔(2편)

지각 ~ 오성

(2-2) 지각

감각적 확신은 개별자로서의 이것을 취하려고 했지만 좌절에 부딪히고 의식은 지각을 통해 진리를 파악하려고 한다. 감각적 확신의 마지막 단계를 거친 지각은 보편자를 통해 진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지각에게 진리란 무엇인가? 먼저 지각에게 진리는 직접적으로 감각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지각의 대상의 원리가 보편자이기 때문에 대상은 다수의 특성들을 지닌 사물로 나타난다. 특성은 규정된 것으로서 “이것”은 “이것이 아님” 또는 지양된 것으로 정립된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하나의 규정된 무 도는 어떤 내용의 무, 즉 이것의 무이다.”


이를 스피노자는 “규정은 부정이다.”로 표현했다.

사물은 자아의 존재 혹은 변화와 관계없이 그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지각에게 사물은 본질적인 것이고 자아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자아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즉, 사물의 자기 동일성 혹은 자기 동등성이 진리인 것이다. 자아가 지각을 통해 사물을 모순 없는 그 자체로 파악하면 진리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사물에 모순이 생기면 이는 사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자아의 문제로 파악된다. 지각의 경험에서 사물의 모순을 발견하면, 자아는 사물 자체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자아에 의해 발생한 모순으로 파악하고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지각의 형식을 변화하려고 한다. 헤겔에 따르면,


“대상의 한 가지 계기는 제시하기의 운동이 되었고, 다른 한 가지 계기는 이와 똑같은 운동이지만 단순한 것으로서의 운동이 되었다. 전자가 바로 지각함이고 후자는 대상이다.”


사물은 하나의 사물자체(일자)로 지각되기도 하지만, 그 사물을 이루는 다양한 속성(역시)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소금을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소금이라는 사물자체(일자)로 소금을 지각한다. 하지만, 소금은 하얗고 짜고 입방체인 다양한 속성(역시)으로 지각되기도 한다. 소금의 속성인 하얗고 짜고 입방체인 것들은 보편적이다. 이런 속성은 하얀 설탕, 짠 간장 등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소금을 설탕과 간장과 구분 짓는 것은 소금 안의 다른 속성들이 설탕과 간장과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금 안의 속성은 보편적이면서 배타적이다. 속성인(역시)는 보편적 성격이 강하지만, 사물 안에서 무관심하게 존재한다. 다른 속성의 존재가 특정 속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반면에, 모든 속성이 한 장소에 집결하기 위해서는 그 특수성을 부정하고 다른 속성과 섞이면서 배타적인 사물(일자)을 만들어야 한다. 지각에게는 이런 속성과 사물의 관계가 모순으로 남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모순으로 인해 일자 혹은 역시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 일자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면 속성의 보편성이라는 모순에 이르게 되고 역시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면 사물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는 모순에 맞닿게 된다. 헤겔에게 있어 지각은 일자와 역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순환운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 사상에 대해 자세히 이해하게 된다. 헤겔에게 진리는 이러한 운동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고 모든 사물은 유기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유기체적 특성은 본질 안에 비본질 그리고 보편 안에 특수를 담는다. 따라서, 보편과 특수 그리고 본질과 비본질의 통일이 그가 생각하는 정신인 것이다.


여기서 헤겔의 진리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헤겔에게 진리란, 사물도 모나드도 아니고 실체이자 주체이다. 소금이란 주체는 짠맛, 희색이라는 규정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소금이라는 대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소금을 파악하기 위해 소금이 아닌 다른 것을 부정한다. 이는 설탕도 아니고 돌도 아닌 소금이다.(1차 부정) 이런 1차 부정은 소금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성만을 표현할 뿐 그 어떤 대상도 산출하지 못한다. 그리고 소금이 가진 속성을 다른 대상과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소금자체를 설명하지 못하고 관계성 혹은 보편성에 묻힌다. 이때 2차 부정이 일어난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부정한 소금이 소금으로서 정립되는 것이다. 2차 부정은 소금이란 실체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규정과 대상의 유동하는 운동으로 정립된다. 소금은 여러 규정을 가진 대상인데, 이 대상은 설탕과 다른 대상과 차이를 드러내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속성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런 동일성(소금자체)과 비동일성(소금의 성질) 간의 동일성이 실체는 주체라는 말을 표현한다.


(2-2-1) 일이 실재, 다는 기만

사물 자체는 속성에 대한 배타적 일자일 뿐이며, 다양한 속성은 주관적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지각은 자신의 감각과 사물의 일치가 진리라고 보는 바, 다른 사물과의 배타성을 기반으로 구분되는 일자가 진리라고 귀결되는 것이다. 물론 일자와 대치되는 역시는 자아의 반성으로 생긴 기만이다. 이는 로크의 소박한 실재론적 관념과 일치한다. 로크에게 사물의 일차적 성질은 존재하지만, 이차적 성질은 허구다. 이차 성질은 주관성의 결과로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사념된 속성인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입장을 따르면 인간이 공통적으로 사물들 간의 차이를 통해 개념화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인간이 다른 사물을 느끼지만 사회문화적 영향으로 같은 것을 본다고 설명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객관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주관화 시키고 객관의 껍질을 씌우는 일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순을 느낀 인간은 다가 실재, 일이 기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2-2-2) 다가 실재, 일이 기만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분 지어 주는 다(역시)가 사물의 본질이고 이를 하나로 묶는 일(일자)은 사념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소금을 설탕과 구분 지어 주는 것은 소금이라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소금의 짠맛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속성을 지각해야 한다. 그리고 속성과 모순되는 일(일자)은 인간이 속성들을 묶고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흄의 다발이론과 불교의 무아사상과 일치한다. 이들에 따르면, 속성만이 실제고 사물은 거짓이다. 이들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들어가면, 인간의 자아 또한 우연의 결과물일 뿐이다. 자아란 지속적 실체가 아니라 지각, 감정, 기억 다발들의 묶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모순에 부딪히고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사상은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우연성 아래 위치시킨다.


지각이 사물을 일자와 역시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은 둘을 통합하는 운동으로 극복된다. 역시는 사물이 자신을 표출하려는 대타적 측면이고, 일자는 모든 다양성을 배척하는 단일한 사물의 계기로서 대자적 측면이다. 지각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관찰가능 하지만, 두 가지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이처럼 사물은 대자존재이고 대타존재이다. 이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이것이며 저것인 것 부정을 매게로 한 보편자다. 이를 헤겔은 무제약적 보편자라고 부르고 이런 무제약적 보편자는 오성의 관찰대상이 된다.


헤겔에게 있어 인식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자기반성을 통해 대상을 재구성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지각 단계의 의식은 이러한 자기반성을 통해 통일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자와 역시 사이에서 진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분열된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지각의 능력에서 두 가지가 하나라는 것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지각은 일자와 역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로 남는다. 하지만, 의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반성을 통해 일자와 역시를 하나의 운동으로 파악한다. 이런 의식의 움직임은 지각을 오성의 단계로 고양시키지만, 사물은 일자와 역시를 가진 단순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변화한다.


(2-2-3) 의식주의에 대한 비판

장 이뽈리뜨에 타르면 헤겔은 칸트의 물자체가 지각단계에 빠져있다고 주장했다. 물자체는 모든 감각적 규정을 사상한 순수사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의 “지각”에 대한 사유를 따라가 보면, 칸트와 흄이 다른 방식이지만 같은 대상에 대해 느꼈던 모순은 의식 자체의 모순이다. 의식은 대상을 고정된 실체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상과 표출된 규정 사이의 이동의 운동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운동을 파악하려는 노력 대신에 물자체라는 피안을 상정해 두고 사유의 연장을 차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헤겔이 모순에 대한 독특한 시선에서 유래한 것이다. 헤겔 전까지의 논리학은 모순은 문제로 치부했지만, 헤겔은 모순을 진리의 시작으로 진단했다. 모순이 진리의 시작이기에 헤겔식 사유에서 모순은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필연적 단계이다. 하지만, 이전 논리학처럼 모순은 이율배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낭떠러지 라면 낭떠러지를 피하는 칸트나 흄이 생각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장애물을 넘어서려는 의식에 대한 배반임에는 틀림없다. 후에 더 설명하겠지만, 칸트가 자신의 윤리에서 신존재를 요청한 것은 도덕적 모순에 대한 이러한 사고에서 출발했음이 틀림없다.


의식은 지각에서 대상이 하나의 일자로서 자기 동일성을 지니는 동시에, 여러 속성(역시)들의 보편성으로 흩어져 나타난다는 점을 경험하는데, 이 두 측면은 지각의 입장에서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채 모순으로 남는다. 그래서 지각은 감각적 규정을 사상한 무제약적 보편자를 통해 이 모순을 붙잡아 보려 하고, 그 보편자를 탐구하는 운동이 곧 오성으로 이행한다.


(2-3) 오성

감각적 확신을 거친 지각은 사물에서 일과 다, 대자존재와 대타존재와 같은 상반된 존재를 발견하고 이를 모순으로 인식한다. 지각은 모순을 자신의 감각을 사상한 무제약적 보편자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무제약적 보편자란, 지각의 모순을 담지할 수 있는 보편자를 말한다.


무제약적 보편자는 오성의 탐구대상이다. 무제약적 보편자는 지각의 감각을 사상한 부정성을 띠지만, 2가지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 무제약적 보편자를 통해 의식은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무제약적 보편자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의식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둘째, 무제약적 보편자는 대자존재와 대타존재의 통일로 이제 의식은 다르게 보이는 두 계기를 통일하게 된다.

위의 2가지 긍정적 요소는 오성이 자기의식으로 고양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장이뽈리뜨는


“오성은 실체에서 원인으로 사물에서 힘으로 고양된다. 오성에게는 우선은 모든 것이 힘이다. 그러나 이 힘은 개념, 감성적 세계에 대한 사유, 이 세계의 자기 내적 반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오성은 일과 다를 힘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힘은 두 가지 계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을 표출하는 힘(다)이고 하나는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고유한 힘(일)이다. 헤겔은 이 2가지 힘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구별되지 않는 힘이라고 말한다. 자신 안으로 들어온 힘은 우리가 관찰할 수 없다. 표출되는 힘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지만 고정된 실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표출되는 힘은 실제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오성은 고정된 진리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오성에게 자신 안으로 들어온 힘은 내면의 세계 즉 변화하지 않는 본질이 된다.(첫 번째 보편자) 반면에, 표출되는 힘은 매개된 현상으로서 본질의 표출이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하지만 오성이 불안정성에서 발견하는 것은 힘의 표출 방식이라는 보편자를 발견한다.(형식적 보편자)


오성은 현상을 통해(두 번째 보편자) 변화하지 않는 본질(첫 번째 보편자)을 추론하려고 하지만, 내면을 현상과 분리된 순수한 치안으로 전제하는 한, 본질을 확정할 수 없기에 추론은 필연적으로 좌절된다.


“의식에 대해서는 내면이 여전히 순수한 피안이다. 오성은 아직 사물의 내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현상이 비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은 내면 또는 초감각적 피안의 본질이며 실은 그것의 충족이다. 초감각적인 것은 현상으로서의 현상이다”라는 말을 통해 현상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오성은 계속해서 내면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힘의 법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법칙은 현상의 다양성을 사상한 법칙들의 정적인 왕국이 된다. 오성은 현상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사상해 법칙들의 정적인 왕국을 세움으로써 본질을 붙잡으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면과 현상의 살아 있는 매개가 제거되어 둘의 통일성이 오히려 공허해진다. 힘의 법칙은 잡다한 법칙들의 발견으로 이어지지만 이는 통일성으로 세상을 파악하려는 오성에게는 모순이 된다.


이에 모순은 모든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고 이는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은 법칙 자체와 배치된다. 법칙은 각 항의 구별로 인해 존속하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은 모든 계기들을 사상하고 현실의 다양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따라서, 오성은 다시 구별자들의 자립적인 계기라고 표현되는 법칙으로 되돌아간다.


전기라는 대상을 설명하는 법칙과 운동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이 다시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법칙은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하고 동어반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식물의 잎이 왜 녹색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잎과 엽록소를 구별한다. 그리고 그 구별을 지양하면서 즉 엽록소의 색이 녹색이기 때문에 잎이 녹색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번개의 설명에도 적용된다. 번개와 전기를 구별하고 번개는 전기의 방전과정과 같다면서 다시 구별을 지양한다. 이는 설명항과 피설명항이 같다는 것으로 전혀 새로운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는 오성 내부의 추론일 뿐, 실제 세계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현실은 오성을 넘어서는 사유에 의해 접근되어야 한다. 이런 법칙의 자기 동일적 설명은 2가지 긍정적인 면을 내포한다.


첫째, 현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법칙의 붕괴는 전도된 세계로 나아가는 변증법의 추동력이 된다. 통일 속에서 비동일성을 찾고 동일한 것과 비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이 되는 현상은 고요한 법칙의 왕국이 변화에 노출되고 이는 전도된 세계가 된다.


둘째, 장이뽈리뜨는


“오성은 하등의 구별일 수도 없는 구별이 발생한 것이 현상 자체의 법칙임을 경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성은 여하한 구별도 이 경우에 진정한 구별이 될 수 없는 탓으로 이것은 다시 지양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한다. 오성의 형식적 운동을 거친 후에 파악된 개념은 자기 자신과 반대되는 것으로 역전되고 도 형식은 형식대로 다시 내용에 의하여 풍부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절대적 개념 또는 무한성을 가진다.”


라는 문장을 통해 자기 동일적 설명의 긍정적인 점을 설명한다. 헤겔에 있어 진리는 동일성 속에서 비동일성을 발견하고 이 모순을 통해서 지양할 수 있어야 한다. 헤겔 이전에는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을 집필한 동기에서 밝혔듯이 “총각은 미혼이다”와 같이 주어가 술어를 표현하고 있는 명제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추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에게 동일하다는 것은 개념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동일성은 규정을 필요로 하고 규정은 부정이기 때문에 동일성은 부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동일한 것의 비동일화 또는 동일한 것과 비동일한 것의 동일화가 절대자가 주체가 될 수 있는 개념의 운동으로 표현된다.



(2-3-2) 전도된 세계

오성이 지각의 모순을 표상적으로 해결하려 했지만(법칙, 힘, 본질/비본질) 모순은 해결하지 못하고 전도된 세계로 필연적으로 나아간다. 오성이 설정한 원인과 결과가 뒤집히기도 하고 형식이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전도된 세계란, 법칙이 고정된 동일성으로 현상을 정렬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현상으로, 현상이 내면으로 뒤집혀 드러나는 세계이다. 오성의 법칙 아래선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가져와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또한, 범죄자를 벌하는 것은 범죄자에게 피해를 주고자 함이지만, 기독교의 세계에서 그 벌은 범죄자를 천국으로 이끌기도 한다. 이 “전도된 세계”는 변증법을 통해 이성으로 우리를 이끈다.


“전도된 세계”를 통해 오성은 무한성을 발견한다. 위에 설명한 것처럼, 법칙이 현실에서 깨지고, 예측불가능한 결과가 도출된다. 오성 스스로가 스스로가 세운 법칙은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법칙의 규정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 무한성으로 도야한다. 무한성이란, 특정 법칙에 얽매인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그 유한한 존재를 품은 무한한 존재다. 무한한 존재가 유한성을 품으면 유한성이 자체 운동을 통한 경계의 극복은 새로운 가능성에 다가가게 된다. 오성은 무한성이 생명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오성을 뛰어넘는 의식은 이를 자기 정립과 그 정립의 부정을 통해 자기 생성의 운동을 하는 생명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리고 생명을 진리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자기의식으로 발전한다. 또한, 오성의 법칙의 의식의 운동임을 자각하고 자기 대상을 자기의식에서 찾고자 한다.


헤겔의 오성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 의식의 폄하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정신 현상학이 정신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지, 문명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기 바란다. 과학적 인식은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을 발견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하지만, 헤겔의 설명이 오른 점은 과학적 법칙이 예외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과학적 법칙을 통한 기술의 발전은 완벽하게 효율적인 기계를 만들 수 없다. 자연과학에서의 법칙 역시 항상 이상화된 조건 하에서만 성립하며, 실제 현실에서는 언제나 예외나 오차를 수반한다. 이러한 에너지 손실이나 불완전성은 단순한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법칙이 세계를 전면적으로 포괄하지 못한다는 필연적 결과다.” 하지만, 과학적 인식이 기계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헤겔의 철학에서도 필연적이다. 과학적 법칙은 사물의 힘을 표현하고 그 힘이 표현되는 것이 기계, 기술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은 증기라는 사물이 힘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3) 결론

자기의식 이전 단계의 의식은 진리를 고정된 실체에서 찾는다. 의식은 대상에 고정되고 감각적 확신, 지각 그리고 법칙등을 통해 변화하지 않는 진리를 찾는 ‘무기체적 의식’이다. 대상은 의식에 의한 대상이기 때문에, 의식이 무기체에 고정되어 있다면 대상 또한 무기체적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인식 태도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 현상계와 본질계를 구분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는 입장 - 과 유사하다. 이후 기독교는 이를 계승하여, 현세와 초월적 진리 그리고 이를 이끌어가는 신으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정립했다. 이러한 관점은 헤겔 이전까지도 철학의 중심적 틀이었다. 하지만, 헤겔은 인간의 정신이 자체의 능력을 통해 유기체적 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정해진 대로 돌아간다는 인간의 의식은 인간의 본능과 부합한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이는 과거부터 이어진 본능으로 익힐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본능에 길들여진 인간의 의식은 유기체적 진리보다는 무기체적 진리에 탐독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본능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자기반성을 통해 본능적 경향을 넘어서는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과 진리의 탐구와 규정은 부정을 내포한다. 그리고 규정에 대한 부정(현상세계와 진리의 부조화)은 내포된 부정과 결합하여 규정을 깨뜨리고 무한성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의식의 자기 초월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제도와 문명을 구성하며 살아온 역사적 여정과도 닮아 있다. 즉, 본능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개인의 정신뿐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발전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헤겔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정태적이고 이원론적인 인식 틀에 의존한 채, 진리를 고정된 실체로 탐구하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 무한성을 파악한 의식은 자기의식으로 고양되었고 유기체적 진리를 탐독하게 된다.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의 단계에는 두 가지 공통된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인식 방식과 형식을 통해 대상에 개입한다. 이 개입은 필연적으로 모순을 낳는데, 그 이유는 의식이 자신과 대상의 관계를 전체 운동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대상’이라는 표상적 대립으로 고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단계들의 의식은 아직 자기의식이나 타자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공통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진리로 간주한다. 감각적 확신은 직접태를, 지각은 규정을, 오성은 법칙을 진리로 삼으며, 이들은 모두 개별적 감각을 넘어서는 보편적 관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이 단계들에서 진리는 언제나 보편성의 형식 속에서만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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