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을 읽고 by
프리드리히 헤겔(1편)

서론 ~ 감각적 확신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1-1) 정신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정신현상학”은 인간의 의식이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한 책이다. 헤겔은 의식이 감각적 확신에서부터 자기의식, 이성, 정신, 종교를 거쳐 절대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하나의 필연적 전개로 보여준다. 이 책의 제목에 붙은 '현상학'은 의식의 다양한 '현상(Erscheinung)'들, 즉 의식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여러 단계와 형태들을 면밀하게 기술하고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때,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우리가 가진 선이해, 욕망 그리고 언어에 의해 사물을 해석한다. 현상학은 인간이 가진 해석을 버리고, 사태 그 자체를 기술하려는 시도다. “정신현상학은” 인식이 진리를 찾아가는 길을 그 자체로 기술한다. 『정신현상학』은 인식이 진리를 찾아가는 길, 즉 인간 정신이 자기 안의 모순을 통해 절대지에 이르는 길을 변증법적으로 기술하며, 이를 통해 정신이 필연적으로 객관적 진리를 자기 안에 가진 절대정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헤겔이 정신의 발전 과정을 현상학을 통해서 보여주려는 의도는 명백하다.
a. 스티브 홀게이트는 헤겔이 “자연적 의식은 필연적인 단계를 거쳐 철학적 의식으로 나아간다”라는 것을 『정신현상학』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다고 한다. 자연적 의식에게 철학적 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표상으로 나타난 것을 개념으로 이해하라는 요구이다. 이는 생소할 뿐만 아니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내가 이제까지 믿어왔던 것을 쉽게 내던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을 통해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진 것이다.


b. 헤겔은 의식의 도야는 자체 내에 목적과 과정 모두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의식 스스로가 자기의 깨달음을 통해 모순을 파악하고 그 모순을 넘어서는 힘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현상학이 아니라 다른 방법론을 택했다면 스스로의 운동에 외부의 힘이 가해졌음을 말하고, 이는 의식의 운동을 그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위의 2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헤겔은 현상학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1-2) 정신현상학의 시작: 칸트, 피히테 그리고 셸링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칸트와 피히테 그리고 셸링을 반박하고 종합한 철학이라고 알려졌다. 먼저 칸트와 피히테는 인간 의식과 물자체를 나누는 비판철학이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틀에서만 이루어지기에, 물자체는 알 수 없고 현상만 알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피히테는 '자아(Ich)'가 스스로를 정립하고, 그 반대편에 '비아(Nicht-Ich)'를 정립함으로써 외부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는 물자체 개념은 버렸지만, 여전히 인간 인식작용에 한계를 두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물자체 즉 진리에 인간은 도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주관적 결과일 뿐이다. 반면에, 셸링은 절대지 자체가 자연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물자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인간은 자연 그 자체의 진리를 인식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셸링의 철학에서 절대지가 정립되면, 인간 개체의 현상지(현상세계의 지)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할 수 없다. 이에 헤겔은 칸트와 피히테의 인식개념, 즉 현상지에서 출발해 셸링이 말하는 절대지로 도달해야 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 길은 정신 자체 내부의 부정에 대한 부정을 통한 변증법의 길이고 필연적 길인 것이다.


(1-3) 정신의 길은 고난의 길
“정신현상학”에서 제시되는 정신의 고양과 도야의 길은, 고난과 실망의 연속이다. 의식은 자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규정을 끊임없이 부정당한다. 부정 앞에서 좌절하지만, 스스로 부정을 해체한 뒤, 다음 단계로 도야한다. 이처럼, 의식의 발전은 고난과 부정의 길이지만, 파괴나 죽음의 길은 아니다. 의식의 부정은 항상 그 부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진리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명제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사과를 사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대상이 배나 복숭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를 규정하는 것은 사과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규정은 부정이기에 특정 진리가 오류로 드러나면 규정 내부에 포함된 부정이 진리의 길이 된다. 이 길은 규정의 경계를 붕괴하고 그 바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처럼 의식은 자신의 진리의 규정의 부정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벽을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따라서, 규정이 포함한 모순은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고 생산적인 힘이다. 인식의 규정 밖은 무한이기에, 규정의 부정을 통해 발 디뎌진 새로운 세계는 이전보다 풍부하고 포괄적이다. 따라서, 의식이 현상지에서 절대지로 고양하기 위해서는 고난과 절망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현상지 내에 부정을 품고 있기에 이런 고난은 필연적이다.


(1-4)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전통적으로 대상과 인식의 일치라고 정의되어 왔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불변의 세계를 상정하고, 인간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대상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인간이 감각과 욕망을 초월하여 지성적 통찰을 한다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진리 개념은 인간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기에, 진리는 현실 속 인간에게 멀고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었기에 진리에 대한 인간의 한계 인식이 신적인 절대자에 대한 의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위에 언급한 대로 칸트는 “물자체”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선언해 플라톤의 진리개념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의 선언은 공허하다. 이에 반해 셸링은 진리를 절대정신 그 자체로 주장했지만, 인간의 개체성과 역사를 통한 발달 과정을 설명할 수 없기에 마찬가지로 공허하다.


헤겔은 "진리는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고전적 정의는 유지하면서도,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동의 과정이라고 본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경험 속에서 개념을 형성하고, 그 개념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헤겔에게 진리는 단순히 사유(개념)가 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자기 외부로 대상화되고 다시 개념으로 회귀하며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은 점차 깊어지고 변화한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 존재를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광물을 발견했다고 하자. 처음에는 인간에게 이 광물에 대한 개념이 없기에, 인식과 대상 사이에는 괴리가 생긴다. 그러나 이 광물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과정은 경험으로 축적되고, 인간은 이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경험은 새로운 광물을 발견하게 하고 괴리는 다시 발생한다. 이렇게 형성된 개념은 곧 진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이와 같은 개념의 갱신은 다시금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며, 인간은 이전보다 더 풍부한 진리의 영역에 다가선다. 결국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간 인식과 세계가 서로를 매개로 하여 점진적으로 일치해 가는 과정이다. 진리를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이상으로 치부하는 관점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며, 진리를 변화 속에서 포착하려는 시도가 더 철학적으로 의미 있다. 따라서 진리는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살아 있는 운동이며, 개념과 경험의 상호작용 속에서 진리 자체도 변형되고 심화된다.


진리에 대한 헤겔만의 독특한 시각은 절대지라는 그의 목적이 정당함을 보여준다. “~을 향함”이라는 지향성을 가진 의식은 “나의 의식이 대상이 되는 대상에 대한 지”와 “내가 가진 대상에 대한 지에 대한 지”라는 2가지 지를 필연적으로 가진다. 대상에 대한 지는 나를 매개로 발생하고, 나의 대상에 대한 지 또한 “나” 혹은 “관습”과 같은 자연적 의식에 매개되어 발생한다. 이는 지와 대상의 일치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또한 변증법을 통해 대상에 대한 지가 지양되었다 하더라도 의식이 새로운 지를 획득했기 때문에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고 과거의 지양된 지는 의미를 잃게 된다. 따라서, 헤겔은 절대지, 즉 자아가 외화를 통해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더라도 자신의 동일성을 잃지 않고 또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대상을 산출하는 운동을 개념으로 파악하는 단계를 진리의 최종 단계로 삼은 것이다.


(1-5) 정신현상학의 난해함
정신현상학이 우리가 겪는 정신의 도야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자, 우리라는 자연적 의식에게 철학적 의식으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보여주고자 한 책이라는 점에서, 책의 난해함은 이해하기 어렵다. 책이 난해하면 난해할수록 책에 대한 이해는 떨어지기에 우리가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서술했다는 인식적 용이함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목적 달성에 어려움을 가진다. 하지만, 헤겔은 정신현상학이 그 목적과 내용적 특수성에 의해서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첫째, 헤겔은 우리가 표상에 의해 사태를 파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본다. 표상은 진리를 개념이 아니라 부분으로 해체해서 우리에게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 온 “논리적으로 참인 명제는 참이다”라는 명제가 이에 해당한다. 헤겔은 표상적 분석에 익숙한 개인이 진리를 개념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즉자, 대자, 자기 동일성, 순수부정” 등의 단순한 규정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한다.

“학문 연구에서 관건이 되는 문제는 개념의 긴장된 노력을 떠맡아 감당하는 일이다. 이러한 노력은 개념 자체에 주목할 것을, 예를 들면 즉자존재, 대자존재, 자기 동일성 등과 같은 단순한 규정들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은 생소한 규정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이런 규정들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둘째, 헤겔은 참인 명제는 죽은 명제라고 규정한다. 참인 명제는 주어를 술어에 귀속하고 주어를 사상한다. 표상적 파악에 익숙한 우리는 죽은 명제를 진리로 받아들이지만, 학문 연구에 필요한 개념을 통해 문장을 파악하면 사상된 주어를 되살리고 주어의 내용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유는 주어에서 술어로 이행하면서 전진하는 대신에 오히려 주어가 소실되기 때문에 저지당했다고 느끼고 주어가 사라지게 된 것을 아쉬워하기 때문에 주어에 대한 사고로 돼 던져진다.”

이는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교육서의 목적에 부합한다. 정신현상학은 일반적 의식이 헤겔의 살아있는 철학에 접근하기 위한 안내서이기에, 일반적 의식이 이를 통해 개념적 파악에 익숙해지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문장 자체가 난해하고 다양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제까지 요구되었던 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통해서 작품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헤겔은 저자의 죽음이 아니라 저자는 생생한 형식적 문장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죽음”은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진리성을 정당화하지만, 이는 공허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헤겔의 형식적 완성을 통해 어느 정도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의식
(2-1) 감각적 확신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자연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철학적 의식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쓰인 교육서이기도 하다. 자연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시각이 다른 시각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고 인간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풍만한 자신감은 “지금 나” 그리고 “독립적인 나”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헤겔이 생각하는 절대정신이라는 큰 줄기에서 파생된 개인의 시각이라는 개념을 자연적 시각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은 인간의 의식은 감각적 확신으로부터 시작해서 필연적으로 절대정신으로 고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견이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상대가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가 자연스럽게 나의 의견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는 우월성을 설파하는 반발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의 시작은 감각적 확신이다.

장 이폴리트는 감각적 확신이 헤겔의 개념으로서의 진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정신현상학 마지막 장인 절대지와 첫 번째 장인 감성적 확신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헤겔에게 진리는 “‘나=나’로서의 자아가 자기를 타자화시키고 모순의 반성을 반성하고 자기 동일성을 통해 시원의 나로 돌아오는 원환운동이다.” 이는 감각적 확신(정신현상학의 시작)과 절대지(정신현상학의 끝)가 동일하지만,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장 이폴리트는

“감성적 확신에서는 직접태가 있는 데 반해 마지막 장에서 그 직접태는 본래의 직접태로 생성된 것이다.”


에서 둘 다 직접태라는 동일성을 가지지만, 감성적 확신은 사물에 대한 직접태, 절대지는 자신을 존재로 정립한 직접태로 차이성을 가지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물론 헤겔은 절대지와 감각적 확신의 차이를 보유한 동일성에서 끝을 내지만, 그의 논리는 절대지의 다음 단계가 지각과 차이를 보유한 동일성을 가져야 함을 함의한다. 절대지가 정신현상학의 끝이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부분의 부재가 현대 철학자들이 헤겔을 동일성의 철학자로 치부한 원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헤겔은 절대지를 형식상의 완성이지 내용상의 완성을 이야기하지 않았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절대지는 원환운동이라는 형식을 보유했지만 그 안의 내용은 지각의 특성인 규정성과 다양성을 포괄해야 한다. 이는 현대식 민주주의로 설명될 수 있다. 헌법이라는 보편적 가치 아래 다양성을 담아내는 다원적 민주주의가 절대지의 다음 내용이라면, 헤겔의 논리는 닫힌 논리가 아니라 열린 논리일 것이고 우리는 헤겔을 동일성 철학자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2-1-1) 대상적 측면
감각적 확신은 아무런 매개도 없이 사물 그 자체를 느낄 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앞에 존재한 사물을 이것으로 인식한다. 사물 자체만을 인식하기에 사물의 특징이나 차이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것 혹은 지금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 있는 것을 나무라고 지칭할 때는 나무가 다른 사물과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매개하고 나무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감각적 확신에게는 비진리, 즉 매개를 통한 인식이기에 지양된다. 하지만, 감각적 확신을 통한 진리 추구 방식은 사물의 즉자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은 그 어떤 사물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이라고 표현한 존재는 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낮이 된다.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은 “나무”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몸을 돌리면 이것은 “집” 아니면 여타의 사물이 된다. 헤겔에게 있어서 보편자는 부정을 통해 생성되는 개념이다. 보편자는 개별자들의 차이를 통해 드러나며, 단일 개별자의 특수성과는 구분된다. 감각적 확신에서 말하는 ‘이것’은 정작 아무것도 특정하지 못하는 점에서, "감각적으로 주어진 직접성"은 그 자체로는 진리를 담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을 통해 보편 개념을 도출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여기”, “지금”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매개 없는 순수한 진리를 대상으로 찾으려는 감각적 확신의 노력 또한 좌절된다. 대상은 “나”라는 자아를 매개로 존재하고, “나” 또한 대상을 인식하면서 존재한다. 이중의 좌절을 겪은 감각적 확신은 비본질이라고 여겼던 자아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2-1-2) 주관적 측면
하지만, “자아”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각적 확신에게는 차이라는 매개가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상황은 대상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사물의 특징에 따른 구별이 없다는 것은 “자아” 사이의 구별도 없음을 의미한다. 나의 자아와 타자의 자아는 감각적 확신에게는 동일한 자아다. 따라서, 내가 본 대상은 진리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타인의 자아도 앞에 있는 어떤 사물을 보고 그 사물 또한 “자아”에 의해 관찰된 자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보편적 자아 개념은 나와 타자뿐만 아니라 내 안의 무수히 많은 자아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칸트에 따르면, 통각은 무수히 많은 나의 자아를 통일하는 능력이다. 나는 어제의 자아가 본 것과 지금의 자아가 본 것을 통각으로 통일해 하나의 자아 아래로 수렴한다. 감각적 확신에게는 통각이라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헤겔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통각이란 무수히 많은 자아를 하나의 자아 아래로 수렴하는 능력으로 차이의 인식을 전제한다. 이 자아도 저 자아도 나의 자아라는 것은 이 자아와 저 자아의 구분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감각적 확신의 자아가 나와 타자의 자아이든, 내 안의 자아이든 간에 진리 획득에는 실패한다. 개별자를 추구하려던 그의 노력은 보편자로 대체된다. 감각적 확신은 자아와 대상의 통합을 통해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다.

장 이폴리트는 감각적 확신의 주관적 측면은, 관념론의 유아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말한다. 관념론은 나의 관념이 실재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모든 자아가 공통된 세상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헤겔은 여기서 모든 자아들이 자신의 관념을 세상의 실체라고 주장한다면, 그 무엇도 실체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우리가 행동하고 살아가는 이 세계는 공통된 실체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관념론은 필수적으로 보편성을 가진 형식 혹은 내용을 가져야 한다. 헤겔은 정신의 여정을 통해 “나는 곧 우리이며, 우리는 곧 나이다.”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2-1-3) 세 번째 경험
첫 번째 경험에서 대상은 본질, 자아는 비본질로 여겨졌고 이는 “지금”, “여기”라는 보편자를 밝혀내는 데에서 진리에 다가가는 데 실패한다. 두 번째 경험에서 자아는 본질, 대상은 비본질로 진리에 다가가려고 했지만 자아 일반에 다다를 뿐이다. 이에 세 번째 경험은 대상과 자아의 통일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고자 한다.


장 이폴리트는 이런 자아의 운동을

“대상과 지의 직접적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본질은 오로지 이러한 단순한 관계의 통일일 뿐이다”


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대상과 지의 통일은 스스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가 대상에 다가가서 그것을 진리라고 명시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감각적 확신은 직접성을 버리고 매개를 품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다시 실패하게 된다.


내가 지금이라고 명시했다.


지금을 명시하는 순간 지금은 과거가 된다.


그리고 존재했던 지금을 진리로 찾기 위해 2번째 명제를 다시 부정한다.


이를 통해 감각적 확신은 처음의 지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부정의 부정을 통해 도달한 지금은 과거의 지금과 동일하지 않다. 내가 명시한 지금은 수많은 지금 중의 하나이다. 이는 특정한 지금은 자아의 규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존재하는 다양한 “지금” 중의 하나이고 “여기”는 존재하는 다양한 “여기” 중 하나일 뿐이다. 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매개한 “지금”과 “여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자아와 대상을 포괄하는 3번째 시도는 지각으로의 길을 열어준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와 그 자아가 바라보는 대상이라는 개념은 차이에 대한 인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대상에서 진리를 찾던 첫 번째 시도와 자아에서 진리를 찾던 두 번째 시도는 추상적 보편자에 다다랐다. 하지만, 자아와 대상을 포괄하는 세 번째 시도는 차이의 인식을 통해 구체적 보편자에 도달했고 이는 사물을 그 특징으로 인식하려는 지각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몇몇 사람들은 언표 할 수 없지만 자아가 느끼는 바로 그것을 진리로서 간주한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언표 할 수 없다는 것은 단지 사념되었을 뿐인 가장 기초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언어란, 명시되는 대상을 사념으로부터 걷어내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감각적 확신의 구조는 추상적이지만, 이를 아동의 초기 인식 형성과정과 비교하면 그 본질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비유는 헤겔의 논증을 대체하지 않고, 구조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아기는 태어나서 주변 세상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다. 아이는 그저 주변 세상을 통째로 이해한다. 그래서 눈앞에 자기 손이 움직이는 것이 자기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못한다. 우유를 마시고 싶어도 우유를 특정하지 못해 엄마가 우유를 직접 먹여주기 전까지 아이는 울기밖에 못한다. 그다음 아이는 답답함을 울음으로 표현한다.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신호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울음은 아무런 정보를 전달하지 못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엄마도 바로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다음, 거울을 통해 자아의 존재를 파악한 아이는 내가 원하는 물건을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그리고 각 물건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지각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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