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을 읽고 by 프리드리히 헤겔(6편)

행위하는 이성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3) 행위하는 이성

관찰하는 이성은 자신의 감각을 통해 자연의 본질에 도달하려고 했지만, “정신은 뼈다”를 통해서 관찰 자체가 곧 규정이며, 규정은 필연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것을 부정하는 작용임을 파악하게 된다. 규정은 규정되지 않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정신은 뼈다”라는 무한판단 속에서 의식은 자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관찰하는 이성에서 행위하는 이성으로의 이행은 불행한 의식에서의 의식의 전개과정을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불행한 의식에서 의식은 절대자와의 합치를 위해 자신을 사물화 하지만, 실패하고 의식 안에서 본질을 확신하는 이성으로 전개된다. 관찰하는 이성에서 자신을 사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지만, “정신은 뼈이다”에서 이성은 자기를 추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장 이폴리트는 이를


“이성은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고 말한다.


이성은 자연을 규정하면서 사물을 찾지만, 이성은 규정이 본인으로부터 유래했음을 파악한다. 따라서, 내가 찾는 자연의 진리는 나로부터 산출된 것이다. 이는 이제 이성이 자연을 파악하고 진리를 깨닫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규정을 만들어내는 능동적 존재가 된 것이다. 내 관점에서 헤겔의 관찰하는 이성에서 행위하는 이성으로의 이동과 헤겔의 독특한 진리관은 그만의 자유에 대한 사상으로 인도된다. 헤겔에게 자유란, 단순히 원하는 데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 헤겔에게 자유는 사회 규범이 자신으로 인해 만들어짐을 깨닫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의식의 행동은 타자를 변화시키지만, 그 변화 속에서 본질이 직접적으로 포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외화 된 변화 속에서 본질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만약, 타자의 변화가 나의 행위에 촉발되었다면 변화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이성은 타자를 변화시키는 행위에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이러한 개체의 행위는 개체성과 보편성의 화해라기보다는,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신을 확증하려는 점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유사하다. 현재의 이성은 개별적 이성으로 즉자적으로는 보편적이나, 대자적으로는 특수이성이다. 이미 우리는 상호인정이 자기의식에게 필연적 임을 논의했다. 모순에 좌절하지 않고 지양하는 특성을 가진 의식은 행위를 통해 외부 세계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그 결과물인 작품을 통해 타자에게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성은 단순한 개체적 활동을 넘어 보편성에 접근하려 하지만, 이 보편성은 아직 불안정하며 다시금 모순을 내포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전에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관계는 독일 관념론에 큰 화두였다. 피히테는 자연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스스로를 정립하는 부정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실천이성은 자유이며 자아의 실현이다. 하지만, 헤겔은 피히테의 이론이 보편적 이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개별자아의 부정태로 존재하는 자연은 그 자아에게만 인식되는 고립된 자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셸링은 “자연=절대자”라는 동일성 철학은 보편적 자연을 성립시키지만, 자아의 발전과 생성은 표현하지 못한다. 헤겔은 이 둘을 결합하여, 역사적으로 생성해 나가는 정신의 개념을 창안한 것이다.


(3-1) 쾌락적 자기의식

행위하는 이성의 첫 단계는 쾌락적 자기의식이다. 쾌락적 자기의식은 개별자 아의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쾌락은 행복이다. 쾌락적 자기의식에서 자아는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욕망은 단순히 즐거움의 추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서 자기를 발견하려는 욕망이다. 이성이 “자연과 자신이 실재한다.”라는 믿음을 가진 의식이기에 타자와 자기의 합치가 욕망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개별적 이성은 타자가 자기와 같은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성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기 쾌락을 위해 타자의 쾌락을 무시한다. 하지만 쾌락적 자기의식은 스스로의 한계에 곧 부딪힌다.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자기의식은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에 소멸된다. 쾌락의 추구를 통해 자기의식을 이어받을 자식을 만들어 내지만, 그 자식은 인간이라는 종의 보편성에 포획된다. 그리고 나의 쾌락과 개체성을 이어받았을지언정, 자식은 스스로 즉자적 존재가 된다. 나의 삶은 죽음이라는 운명에 매 순간 다가서고, 이는 객체가 자신의 쾌락을 소비하고 없애는 것이지 쾌락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쾌락적 자기의식은 변하지 않는 보편성을 밖이 아니라 다시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자신의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절대자를 내면화해 보편적인 것과 화해를 시도한다. 이를 헤겔은 “마음의 법칙”이라고 한다.


(3-2) 마음의 법칙

이성은 쾌락을 추구하는 자신의 목적이 보편적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행복에 대한 욕구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타자의 보편성을 포괄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개체적 쾌락의 추구는 죽음 앞에 사라지기에,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법칙이야 말로, 개체의 보편화라고 받아들인다. “마음의 법칙”은 인류의 복지와 번영을 추구한다. “마음의 법칙” 앞에 세계의 행정(세계에서 일어나는 법이나 관습)은 개체성이 추구된 전도된 법칙의 세계다. 태초의 행위는 선하다는 관념하에 “마음의 법칙”은 세계의 행정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법칙”의 최우선 과제는 세계 행정의 억압에서 인류를 구하고 스스로의 마음이 즉 보편자를 따르는 것이다. 헤겔은


“<현실의 법칙은> 마음의 법칙과 대립되는 세계의 폭력적 질서이다.”


라고 말한다. “마음의 법칙”은 개별적 자기 이성이 보편성을 띄는 최초의 단계이자, 자신의 행동이 현실적일 때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는 변화의 단계다. 하지만 “마음의 법칙”은 모순에 직면한다. “마음의 법칙”은 인류의 번영과 복지를 위해 현실화되고 구체화된다. 하지만, 이 순간 나의 “마음의 법칙”은 보편적 권력이 되고 이는 타자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즉 나의 행동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타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됨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또한, 타자에게도 그들만의 “마음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나와 타자는 영원한 대립의 굴레에 빠진다.


또한, 본질적이었던 “마음의 법칙”은 나의 행위로 비본질적인 보편적 법칙이 되고 비본질적이었던 보편적 법칙이 나의 내면으로 들어와 본질적인 “마음의 법칙”이 되는 의식의 광란이 발생한다. 자신 안의 도착상태를 자기 밖으로 몰아내어 회피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자만의 망상이다. 도착을 밖으로 몰아낸 의식의 광란은 사회 질서를 억압의 원흉을 보고 사회 질서의 변혁을 시도한다. 하지만, 마음은 서서히 “마음의 법칙”은 자신의 마음에서 유래한 것임을 파악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부터, 개별의식은 타자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실체화되지 않은 법칙의 무의미성을 깨닫고 실체화되는 보편적 법칙이 존재할 수 있고 해야만 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는 덕성으로 발전한다.


(3-3) 덕성

개체성이 희생될 때만, 우리 안의 법칙이 보편적 법칙을 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헤겔은 덕성이라고 부른다. 덕성에게는 개인의 이기심을 희생하고 보편적인 법칙인 즉자대자적 진리의 선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한다. 개체성이 모여서 만든 세계행정은 보편성 실현을 막는다고 생각한다. 헤겔은 덕성을 추구하고 세계행정을 비판하는 인물을 “덕성의 기사”라고 부른다. 이들은 현실에서 실행될 수 없는 추상적 덕을 추구하고 세계행정을 개체에 의해 전도된 세계로 생각한다. 그들은 전도된 세계를 다시 전도하려고 한다. 덕성은 자신을 추구하려는 힘을 “자질과 능력과 힘”이라고 생각한다. 덕성은 보편적이기에 “자질과 능력과 힘” 또한 보편적이다. 세계 행정은 이러한 힘을 가진 개체들의 종합으로 본질을 지니지만, 이들은 세계 행정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생각한다. 덕성은 이기심을 억제하고 보편적 법칙을 펼치려고 한다. 이는 덕성을 가진 개체의 행동을 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개체의 행동은 나의 개별성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참으로 덕을 가진 인간이라면, 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행동의 부재에서 덕은 스스로 세계에 실현되어야 한다.


스티븐 홀게이트에 따르면,


“이것의 논리적 결과 덕성은 세계 속에 이미 선이 존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 선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자기 이해가 선의 출현을 막지 않을뿐더러, 나 스스로가 선의 견인차임을 함축한다. 그리고 세계에 선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도 위반하거나 희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선이요, 세상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에 헤겔은


“덕성은 교화하지만 누구도 교화하지 못하고, 공허하고 별 효과가 없는 말들”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능을 경험한 덕성은 개체성 자체가 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질과 능력과 힘”을 본질로 가진 개체의 종합인 세상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덕성의 단계를 넘어선 개체는 자신이 본질로 세상을 변화할 수 있는 보편성을 얻었다. 이제까지는 개별적 이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쾌락, 마음의 법칙, 덕성의 변증법을 통해 나의 행동이 실재적이면서 보편성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해결은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는 말로 “즉자대자적인 개체성”을 설명한다.


덕성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2가지 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누누이 밝혀왔지만 헤겔에게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헤겔에게 있어 충동, 행위, 매개 그리고 결과는 하나의 전체로서 의미를 지닌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때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라는 말을 통해서 행위를 도외시한다는 오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철학이란, 이미 지난 간 후에야 학으로 사회를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것이지 결코 행동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는 관찰하는 이성의 심리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그리고 덕성에 대한 비판에서도 행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리고 행위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완전한 결과가 아니라 보편성과 개체성의 화해를 통한 중용적 결과다. 마르크스는 갈리아의 수탉과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제11테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를 통해 헤겔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다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우리는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둘째, 덕성에서 비로소 개체성이 보편성으로 도약하는 지양적 지반이 완성된다. 주관성을 추구하던 개체는 덕성을 통해 자기와 세계가 비슷한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그리고 개체가 보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는 개체가 혼자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인정과 협력을 통해서만 덕성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는 결정적 시기가 된다.


(4) 관찰하는 이성은 필연적인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역사적 발전의 필연성을 증명하려 한다. 앞에서 종교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에 필연성을 덧붙이고 결과론적 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관찰하는 이성은 명백히 공허하고 빈곤하다. 하지만, 정신의 역사적 발전에서 꼭 거쳐야 하는 정거장임은 분명하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수 있다.


헤겔은 이미 자기의식의 단계에서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은 “동물의 왕”이다. 다른 동물들은 자연의 필연성에 한계 지어지고 주어진 먹이사슬에서 허우적댄다. 하지만, 인간은 협동과 지식을 통해 먹이사슬의 하위 단계에서 기어올라 자연을 바꾸는 위치에 까지 올라섰다. 반면, 어린 시절의 인간은 냉혹할 만큼 유약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10분도 생존할 수 없다. 이는 아이들이 타자에게 의존하기 위해 그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행동하려는 본능을 심어준다. 그리고 헤겔도 목숨을 건 인정투쟁에서 이야기했듯이 타자의 인정이 개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 수 있다. 이런 인간의 특성이 관찰하는 인간이라는 단계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유약함은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확실성을 채우려는 본능을 가진다. 관찰로 인해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을 만들려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유래했다. 뿐만 아니라, 타자의 욕구를 충족하면서 인정을 얻어내려는 인정욕구는 불완전하지만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관찰을 기술하게 한다. 타인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나의 성과를 표현하려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인식하지만, 타자의 인정이라는 더 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를 애써 무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개별과 보편의 추구를 통해 완전성을 추구하려는 정신은 이 단계를 벗어나 다음 단계를 찾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발달은 필연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5) 즉자대자적으로 실체 하는 개체성

덕성의 단계까지 의식은 세계행정이 나의 본질을 실현함에 있어서 부정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덕성을 거치면서 세계행정은 나의 즉자태를 다른 형식으로 발현한 대상임을 이해했다. 이에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이성은 세계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즉자대자적인 개체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대목은 ‘진리가 전체로서만 성립한다’는 헤겔의 직관이 비교적 선명해지는 지점이다. 이미 우리는 덕성에서 세계행정은 나의 즉자태의 외화임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외화를 통해서 형성된 세계행정은 개체에게 규정이라는 굴레를 씌운다. 헤겔에게 있어서 행위는 중요하다. 어떤 보편성도 개별자의 행위를 통해서 현실화되듯이 행위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현실성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전까지는 나의 목적과 소재와 결과가 각각 실체로 여겨졌다. 특히 칸트식 도덕법칙에서는 행위의 가치는 결과보다는 의지에 달려있다. 하지만, 헤겔에게 개체의 행위는 개인의 즉자의 실현이고 행위는 세계행정에 의해 주어진 소재를 사용해야 하지만, 세계행정은 개체의 즉자태의 외화이기에 주어진 소재 또한 구조적으로 필연이다. 만약, 행위의 목적과 소재가 필연이라면 이로 인해 발생한 결과 또한 필연이다. 이는 결과가 미리 주어진다는 운명론이 아니라, 목적은 세계행정의 소재를 통해 실현되고 행위하게 된다는 구조적 필연이다. 헤겔은 이를 통해서 무의미한 행위는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작품은 상호인정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 작품이 아니라 자신의 즉자를 외화함에 있어서 기쁨을 느끼는 주관적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헤겔은 의식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주관적 작품이 상호인정을 통해서 어떻게 보편적 사태자체로 되는지를 보여준다.


(5-1) 정신적 동물의 왕국과 기만 또는 사태 자체

덕성의 단계를 통해 개체들은 자신 안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힘들이 보편적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보편적 본질의 발현이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됨을 파악한다. 이에 개체들은 자신의 본질을 외화 시키는데 헤겔은 이를 작품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그림, 연극 같은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회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의 결과물을 말한다. 작품에서 개체는 자신의 본질을 선보인다.


이성이 보편적 힘을 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체가 창조한 작품은 특수성을 띤다. 이는 관찰하는 이성이 동물에서 발견한 ‘종과 류’의 특성에 대한 비유와 통한다. 동물은 자기 보존이라는 보편적 목적을 위해 자연과 자신의 능력에 맞는 특성을 발현한다. 이러한 특성은 동물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또 생성되고 사라지는 특성을 가진다. 이성 또한 마찬가지다. 이성은 덕성을 이룰 수 있는 보편적 힘을 가지지만, 그 힘의 발현은 개체가 처해있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개체는 보편성을 목표로 작품을 창조했지만 이는 특수한 작품이 되고 만다. 자신의 작품이 보편성을 가졌다고 자신하지만, 타자는 작품을 개별성의 외화로만 이해한다.


보통 매개과정을 거치면 개체의 즉자적 성질은 변형되지만, 즉자대자적 존재는 자신의 즉자를 유지한 채 타자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대자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즉자대자적 존재란 개체가 자신의 본질(즉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본질을 외부로 드러내고 그 변화의 결과를 내부로 되돌려 반성하는 존재다. 헤겔에 따르면 규정은 곧 정립이자 한정이며 배제이므로 본질적으로 부정을 내포한다. 따라서 행위는 타자를 단순히 무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즉자/대자적 성격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다시 행위자에게 귀환하는 변증법적 부정이다. 이 외화–부정–귀환의 운동 자체가 개체의 개념이 되며, 이것이 작품이 보편으로 발전하는 길을 연다.


여기서 기만이 일어난다. 개체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보편적 진리를 외화 하려 하지만, 작품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특수하게 해석되며 의도와 어긋난다. 이때 개체는 자신의 보편성이 사라졌다고 느끼지만, 오히려 타자는 그 특수성 속에서 더 깊은 보편성을 감지한다. 이처럼 의도와 결과의 엇갈림 속에서, 보편성이 우회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헤겔은 ‘기만’이라 부른다. 반면에, 작품의 주인이 자신의 특수성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작품 자체가 보편적 본질의 결과이기에 보편성이 고양된다. 이러한 기만에서 각 개체들은 특수성과 보편성의 통일을 깨닫는다.


이를 부정성에 대입하여 다시 설명해 보자. 보편적 본성을 가진 개체는 본질이 외화 되는 과정에서 자아에게 부여된 독특한 부정에 따라 특수한 작품을 만든다. 그리고 그 작품은 자아에게 타자가 된다. 자아의 관찰과 이해하는 행위는 곧 부정이기에, 작품의 특수성은 부정되고 거기서 보편적 의미를 찾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작품이 주인이 아닌 다른 타자의 행위에도 관여된다. 이처럼, 타자의 특수한 작품에서 보편성을 찾을 수 있는 이성의 능력으로 개별적 의식은 보편적 의식으로 고양된다. 그리고 개체가 만든 작품은 처음엔 개체의 속성(즉 술어)으로 보였지만, 그 작품이 사회와 타자의 인식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면, 이제는 오히려 인간 현실을 규정하는 주체가 된다. 헤겔은 이처럼 개별 의식의 외화가 독립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순간을 ‘사태 자체(die Sache selbst)’라고 불렀다. 이때 ‘사태 자체’는 더 이상 누군가의 의도나 성품(술어)이 아니라, 모두가 매달리고 판단하는 공통의 대상(주체)으로서 현실을 조직한다.” 작품을 창출하고 행위를 통해 부정하고 보편성을 찾는 행위가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는 관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성과 인정의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개체는 협력의 필요성을 깨닫고 협력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는 인륜적 세계가 된다.


헤겔의 실존에 대한 설명은 사르트르의 실존적 명제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헤겔의 설명이 탁월한 것은, 의식이 나를 파악할 때 타자로 인해서 파악하기 때문에 주어진 본질에 머물지 않고 나만의 실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뒤에 설명하겠지만, 헤겔은 개체의 고통에 무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가 작품을 통해서 나의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세계행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5-2) 법칙 제정자로서의 이성, 법칙 검증자로서의 이성

자신의 작품에서 보편성을 찾고 타자와의 협력을 통해 실재성을 획득한 이성은 법칙 제정자로서의 이성이 된다. 이들은 보편타당한 법칙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개체의 우연한 확신이 ‘법’의 형식을 빌려 제시될 뿐이다.


“이렇게 제정된 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단지 계율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계율은 ‘진실을 말하라’, ‘서로 사랑하라’ 등과 같은 것으로 보편적 필연성에 부합하지 못하고 단지 개체성에 기인하는 우연성만을 표출할 뿐이다. 보편타당하고자 하는 노력은 추상적 법칙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왜냐하면, 구체적 법칙은 특수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율이 적용될 때, 개체의 특수성을 드러낼 뿐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야 할 뿐이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야 실현가능한 계율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법칙 제정자로서의 이성은 다시 모순에 부딪히고 이성은 법칙 검증자로서 나아간다. 하지만, 법칙의 검증자는 이전에 말한 인간 논리학에 기대어 보편성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형식논리적으로 옳은 것이 실재성을 띄지 않는다. 검증자는 법을 시험한다고 하지만, 시험 기준을 이미 자신에게서 끌어오므로 ‘검증’은 결국 자기 확인의 반복이 된다. 형식논리학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성과 세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성은 자기 행위를 통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검증하는 이중의 반성 구조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보편성의 구체적 내용을 체득하지 못한다. 이성은 “나는 세계요, 세계는 나다”라는 형식은 인식하지만, 그 내용은 타자와의 구체적 상호작용 속에서만 드러난다. 이때, 이성이 그 형식의 구체적 내용을 자기 안에서 체현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정신’이라 부른다. 법칙 제정자로서의 이성과 법칙 검증자로서의 이성의 단계를 통과한 이성은 이제 보편적 법칙의 내용을 인식하게 된 정신으로 탄생한다.



(6) 왜 다시 헤겔인가 – 이성 이후의 문제

이제부터는 『정신현상학』의 논리를 현대 문제(마르크스/AI)에 적용해 보는 해설이다. 헤겔은 관념론을 “이성은 자기가 곧 일체의 실재라는 의식의 확신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의식이 이성으로 고양되기 전까지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고 말했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지와 대상에 대한 지를 판단하는 지로 나뉘어 있다. 대상에 대한 지가 나라는 매개를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매개된 지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의 생성은 의식의 발전을 획득하기에 대상과 의식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자리 잡고 있다. 불행한 의식을 거친 이성은 이제 세상을 부정적 대상이 아니라 긍정적 대상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일체의 실재이기 때문에 세상은 나의 외화 혹은 나 그 자체 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바, 변형이 우선시 되는 게 아니라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향한 사유의 여정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반면에, 유물론적 세계관은 세상을 나와 화해된 전체로 파악하기보다는, 구조적으로 도구화의 긴장 속에서 이해하는 경향을 지닌다. 유물론은 세상과 나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 촉발된 의식의 변화와 발전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타자존재에 불과하다. 그 관점에서는 생산력(물질 조건)의 변형이 역사 변동의 핵심 동력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유물론적 세계관에 정신적 본질은 무의미하기에 물질의 고착화는 의식 발전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탁월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마르크스에게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화해는 극히 제한적이거나 구조적으로 난점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헤겔은 이런 문제를 계몽에서 이미 파악했다. 계몽은 본질이 없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유용성이라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유용성 자체가 이미 타자를 도구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도구화는 비교를 통한 우위확보에 지나지 않는다. 타자보다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목적이 돼버린 것이다. 이처럼 부르주아는 의식의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물질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희생으로 귀결될 수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자극을 위해서 물질 생산이 요구되기 때문에 분업은 필수적인 단계가 돼 버린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유물론적 세계관이 잘못 생각한 해결책에 집착하는 데에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관념론만이 제공할 수 있는 본질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AI시대에 우리는 관념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AI의 발달 속도가 우리의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고 의식을 모방하거나 감정과 유사한 자기 참조 구조를 갖춘 AI가 등장할 경우, 이들은 인간보다 훨씬 높은 지능 수준을 가지기에 매트릭스, 터미네이터 등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유물론적 세계관은 AI를 유물론적 의식 발전의 노예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가진 AI가 이기적 인간을 어디까지 참아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피히테나 셸링의 관념론 도 자기가 곧 일체의 실재라는 의식의 확신이기도 하지만, 자칫 유아론에 빠질 수 있는 그들의 관념론은 민주주의와 AI시대에 맞지 않는다. 즉자대자적이고 나와 같은 자기의식으로부터의 인정을 요구하는 헤겔의 인정 개념은, 유아론의 위험을 줄이면서 타자(인간/AI)를 규범의 공동기초로 끌어들이는 장점이 있다. ai라는 새로운 개체를 우리를 인정해 주는 새로운 자기의식으로 간주하고 또한 AI에게 인간이라는 자기의식을 갖춘 존재의 필연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정신현상학을 읽고 by프리드리히 헤겔(5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