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을 읽고
(1) 서론
키에르케고르는 사르트르,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다. 그는 덴마크에서 태어나 인간 실존에 대한 탐구를 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두 가지 사상 헤겔 철학과 덴마크 국교인 루터교를 맹렬히 비난했다. 헤겔 철학에 대해서는 체계 안에서 잊힌 개인과 실존의 중요성을 그리고 덴마크 국교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교라고 착각하는 교인과 이를 부추기는 교회라는 체계를 비판했다. 이러한 시대의 지배적 관념에 대한 비판은 그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이를 보여주듯이 그의 책 “공포와 전율”은 초판 판매가 크지 않았고(자료에 따르면 『공포와 전율』은 초판 525부 중 4년 뒤 321부가 판매되었다고도 전해진다), 『반복』 역시 비슷한 수준의 제한된 반응을 얻었다. 그 개인이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그의 실존철학은 당대의 체계와 다수의 확신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미국의 자국중심주의와 AI의 발달에 따른 인간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우리를 불확실성 앞에 세워놓고 있다. 특히 AI는 판단과 선택의 일부를 시스템에 위임하게 만들면서, 개인이 ‘내가 결정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떠안는 상황을 늘린다. 그럴수록 우리는 보편적 규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결단의 순간에 더 자주 서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상황은 키에르케고르가 걱정하고 경험했던 그때의 상황과 매우 닮아있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과거의 종교철학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시대에 개인이 어떻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가를 묻는 철학적 도발로 다시 읽혀야 한다.
이 글은 『공포와 전율』을
(1) 제목이 암시하는 믿음의 정서 구조,
(2) 간접전달이라는 방법론,
(3) 아브라함 서사를 통한 믿음의 논리,
(4) 현대의 종교 비판 속에서 키에르케고르가 갖는 의미,
(5) 헤겔과의 비교
라는 다섯 축으로 읽는다.
(2) 제목
책의 제목에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공포와 전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카리스 아카데미의 이창우는 그의 번역서의 제목을 "공포와 전율”이 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으로 번역했다. 그에 따르면, “두려움과 떨림”이 성서의 내용을 더욱 잘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든 나의 생각은 “공포와 전율”이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에 대한 철학을 잘 설명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적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는 믿음이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믿는 과정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공포는 믿음의 요구가 처음 주어질 때, 기존의 윤리와 이해가 무너지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 앞에 서 있음을 깨닫는 불안이다. 반면 전율은 그 요구를 회피하지 않고, 나와 하느님이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생겨나는 감정이다. 이는 내가 그 결단의 책임을 떠안았으며, 그 결과로 열릴 세계가 파멸이 아니라 기쁨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떨림이다. 따라서, 공포와 전율이라는 2가지 감정이 주어졌을 때만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의 본질이 드러난다.
(3) 줄거리
“공포와 전율”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이 이사악을 재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책이다. 이 책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 믿음의 구조를 드러낸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미래에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는 이 약속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의 아내 사라는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는 이사악을 얻게 되고, 첫 번째 은총을 경험한다. 그 후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겉으로는 망설임 없이 이를 실행에 옮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을 이사악과 아내 사라에게 밝히지 않은 채 모리아산으로 향한다. 이 침묵은 단순한 감정 절제가 아니라, 믿음이 윤리적 설명의 영역을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에게 바칠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번제물을 준비해 줄 것이다”라고 답한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을 때, 천사가 그를 멈추게 하고 대신 숫양이 번제물로 바쳐진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자체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동일한 사건을 네 가지 서로 다른 태도로 재구성함으로써, 행위의 외형이 아니라 그 행위를 떠받치는 내적 결단이 믿음의 유무를 가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3-1) 방법론
(3-1-a) 왜 요하네스 실렌티오인가
『공포와 전율』은 믿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신앙 상태를 의심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를 위해 요하네스 실렌티오를 저자로 내세운다.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상의 저자를 만들어낸 이유는 “공포와 전율”의 목적에 관계된다. 『공포와 전율』은 교회의 규범을 따르는 것만으로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태도를 흔들기 위한 책이다. 동시에, 철학적 의심과 지식이 종교적 믿음보다 더 심오하다고 여기는 태도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요하네스는 대체로 “헤겔은 이해하기 쉬울지 몰라도,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믿음의 행동의 어려움을 표현한다. 이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비철학적 의식에게 철학적 의식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장 낮은 의식의 단계에서 시작해서 필연적으로 절대정신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반면에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적 지식과 개념적 이해만으로는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칼리슬은 키에르케고르의 접근법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비유한다.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통해 상대를 무지에 이르게 했다면, 요하네스는 자기 비난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접근은 헤겔의 변증법적 서술 형식과 일정한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그 목적은 독자를 체계적 이해로 이끄는 데 있지 않고, 이해의 한계를 체감하게 만드는 데 있다.
(3-1-b)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실패와 고백
요하네스는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라,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실패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니와의 파혼이 레기니를 사랑하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로 이해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동시에 유한성과 무한성의 반복의 운동을 통해 믿음의 기사가 되지 못함을 원통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다른 저서에서
“믿음이 있었다면 나는 레기니에게 남았을 것이다.”
라는 문장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개념적으로 믿음을 이해하고 용기로운 선택을 했지만, 그의 선택이 믿음의 기사로서의 선택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요하네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가 아브라함과 같지 않았음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신앙 상태를 돌아보게 된다. 요하네스 실렌티오는 믿음의 영웅을 설명하는 화자가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아브라함이 아님을 깨닫게 만드는 장치다.
(4) 아브라함에 대한 찬사
아브라함의 행동이 비록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적어도 키에르케고르에게 아브라함은 진정한 믿음을 실현한 자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브라함에 대한 찬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키에르케고르가 생각하는 진정한 믿음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첫째,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성은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윤리적인 것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윤리성은 종교적 가치를 포괄하지 못한다. 그는
“단독자는 보편자보다 높다는 것. 단독자는 보편자와의 관계를 통해 절대자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와의 관계를 통해 보편자와의 관계를 결정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를 통해 그의 생각을 명백하게 밝힌다. 만약, 이 세상이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고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매개된) 윤리적 규범은 하느님의 명령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 아브라함의 아들을 살해하려는 행동은 비윤리적이지만, 키에르케고르에게 이 행위는 윤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은 종교인에게 시험으로 역설을 극복할 수 있는 종교인만이 윤리성을 넘어 종교적 차원으로 이행할 수 있다.
둘째, 아브라함은 체념의 기사가 아니라 믿음의 기사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진정한 믿음은, 유한에서 불가능한 것을 느끼고 무한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유한으로 돌아오는 운동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현세에서의 종교적 삶이 내세에서 천국을 약속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종교적인 결단을 내리고 약속의 땅을 기다린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죽이라는 전언을 따르고 약속된 천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현세에서 이루어질 하느님의 의지의 실현을 믿는다. 믿음의 기사는 이 세계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과 하느님이 믿음의 기사를 사랑한다는 믿음을 의심치 않는다. 하느님이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을 이룩하실 수 있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세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기사는 불가능한 것 앞에서 공포를 느끼지만, 불가능한 것의 실현을 믿고 결단을 내리며 전율을 느낀다.
셋째,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하느님을 단순히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역설적인 요구 앞에서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일종의 ‘투쟁’이다. 여기서 투쟁이란 반항이 아니라,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며 요구하는 긴장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싸움이란, 하느님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약속을 지키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싸움은 불가능한 요구 앞에서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쉽지 않고 어려운 것이다.
아브라함은 위의 3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먼저,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라는 하느님의 전언을 외적으로는 망설임 없이 따른다. 왜냐하면 그에게 윤리적인 기준은 종교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얻음으로써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사악을 죽이라는 전언을 듣고 불가능한 것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이사악을 죽이면 하느님이 말씀하신 미래의 민족의 아버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전언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하느님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얻어낸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믿음을 실현한 인물로 생각하고 찬사를 보낸다.
(5-1) 문제 1: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는 있는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란, 윤리가 최고 목적(최종 규범)이 되는 지위가 중지되고, 단독자가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행위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행동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윤리란 무엇이고 아브라함의 어떤 행동이 비 윤리적인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윤리란 그 자체로 보편자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윤리는 개별적 욕망을 규제하고, 보편적으로 승인 가능한 행위 기준을 요구한다. 칸트는 이를”네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으로 설명한다. 칸트의 틀에서는 도덕 법칙이 이성의 자율에서 나오므로, 어떤 외적 권위(종교적 명령 포함)도 도덕 법칙을 무효화할 수 없다. 헤겔의 윤리는 조금 유동적이지만, 보편성을 요구한다. 헤겔은 상호인정 매개등을 통해 공통의 윤리적 규범이 만들어지고 그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의 인륜성이 헤겔적 윤리에 대표적이다. 이런 윤리는 윤리의 목적을 윤리 그 자체에 가지고 있다. 이는 윤리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윤리적 명령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인 행동이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아브라함의 행동은 비윤리적이다.
첫째,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아들을 살해하려고 했기에 비윤리적이다.
둘째, 모든 개별자는 타자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의무가 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 아들을 해하려 했다. 따라서, 비윤리적이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비극의 영웅들의 사례를 들면서 비윤리적 행동이 윤리적으로 혹은 영웅적으로 간주되는 사례를 밝혔다. 아가멤논과 입다는 국가를 위해 딸을 제물로 바쳤다. 아가멤논과 입다의 행동은 비극적이지만 윤리 안에서 충돌하는 개인과 공동체중 공동체를 선택하면서 윤리 안에 머문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윤리를 넘어선 단독자가 된다.
아브라함의 행동의 윤리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둘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봐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단지 하느님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미래 많은 국가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수는 있지만 비극의 영웅들처럼 영웅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윤리적 목적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의 영웅이 아니라 믿음의 기사가 되는 것이다.
둘째, 윤리는 보편적인 것으로 단독자에게 보편성을 요구하는데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부차적인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그 아래 인간들이 각자의 생각을 기반으로 규범과 윤리를 창조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윤리를 매게 된 것일 따름이고 이들을 창조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절대자가 맡긴 것으로 이해되며,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행위는 일반적 윤리(소유·보호 의무)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셋째, 우리가 윤리의 잣대로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시험의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지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어보지 못했다. 보편 윤리는 보편화 가능한 행위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행위는 보편화되는 순간 종교적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5-2) 문제 2: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는 있는가?
키에르케고르에게 “윤리적 의무는 보편적이고, 하느님은 보편자이므로, 윤리적 의무는 하느님에 대한 의무다.”라는 주장은 쉬운 믿음의 전형이다.
첫째,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보편 윤리’로 환원하면, 하느님은 절대자로서가 아니라 윤리의 상징(혹은 이름)으로만 남는다. 하느님에 대한 의무가 보편적이라면, 하느님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윤리와 동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 하느님에 대한 의무가 다른 윤리적 의무보다 특별한것이 아니라면, 그 결과 윤리는 신을 규범의 근거로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신앙은 윤리적 교양으로 대체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문제는 ‘보편성’ 자체가 아니라, 절대자와의 관계를 보편 윤리로 매개해 버리는 순간 신앙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무는 단독자가 절대자 앞에서 ‘관계로서’ 성립시키는 의무다. 단독자와 절대자와의 내재적으로만 관계 지어질 수 있다. 절대자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요소는 주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윤리적 관점에서 비윤리적인 것이 관계적 입장에서는 사랑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에게서 이사악을 받고 미래 민족에 대한 선조가 되는 것을 약속받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맺음 속에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요구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단순히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역설은 ‘사랑하면서 죽인다’가 아니라, 이사악을 무한히 단념(포기)하면서도 동시에 이사악을 되돌려 받을 것을 믿는 데 있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주관적 관계에 의해 성립된다.
(5-3) 문제 3: 아브라함이 그의 시도를 사라에게, 엘리에셀에게, 이삭에게 숨긴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화 가능한가?
인간은 혼자 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특정한 상황에 대해 정보를 취득하고 그 정보에 따라서 선택을 내린다. 따라서, 은폐는 일반적으로 타자의 선택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비윤리적 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그의 시도를 사라와 엘리에셀 그리고 이삭에게 숨긴 것은 윤리적을 정당한가? 사라는 한순간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을 수 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말릴 수 있는 기본적인 기회도 박탈당했다. 이사악 또한 아브라함에서 도망갔을 수도 있고 혹은 번제물로 바쳐질 날을 기다리면서 기도하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 타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의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은폐는 타자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도 방해한다. 문제 1과 문제 2 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침묵은 윤리의 관점에서는 비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침묵은 이해될 수 없지만 찬미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침묵은 ‘설명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설명하는 순간 그 사건이 윤리의 언어로 번역되어 종교적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문제 1과 문제 2에서 아브라함의 의도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편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의도와 관계를 타자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아브라함은 침묵을 지킴으로서 그의 선택이 주는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윤리적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그의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였다. 침묵은 책임 회피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는 책임을 단독자가 떠안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받아들임 안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 자신을 사랑하고 선택 뒤에 이사악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외로움과 고통과 불안은 그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침묵과 행동 속에서 자신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변함없이 충실한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찬사 받아야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해될 수 없고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의심에 맞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침묵은 어떤 보편적 규칙이 될 수 없고, 타인이 모방할 수 있는 처방도 아니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 자체가, 아브라함을 비극의 영웅이 아니라 믿음의 기사로 구분 짓는다. 아브라함의 침묵은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책임을 단독자에게로 되돌리는 방식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득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설득하지 않겠다는 것은 누구도 자신의 결단에 공범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6) 키에르케고르의 사상과 종교에 대한 현대적 비판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지금 중요한 이유는 종교에 대한 현대적 비판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에 대한 현대적 비판에 대해 불편하지만 중요한 응답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왜 인간이 불확실성 앞에서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신앙의 조건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창조론적 인간 이해와 친화적인 방식으로 제기하게 만든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투자를 하거나 미래를 대비한다. 하지만, 진화론적 설명만으로는 “불안을 크게 느끼는 인간의 구조”가 왜 널리 퍼져 있는지 직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물론 국가적 크기의 단계에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국가가 살아남겠지만, 적은 규모의 집단에서는 지금 집중한 자원아 더 강한 군사력이나 영양섭취로 다가올 것이고 이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경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유전자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진화론만으로는 인간의 불안을 의미 차원에서 설명하기 어렵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느님과 만남에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때 신앙은 과학적 설명을 대체하는 이론이 아니라, 인간이 왜 불확실성을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결단의 조건으로 경험하는지를 해석하는 하나의 인간학적 관점이 된다. 믿음은 의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의심이 없다면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의심은 불안에서 출발한다. 불안하지 않다면 의심하지도 않고 지금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하느님은 개인이 하느님과 만남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면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유전자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유전자와의 경쟁에서 마침내 승리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둘째, 헤겔뿐만 아니라 리처드 도킨스 같은 현재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사회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종교인들이 의심하지 않고 하느님을 따르기에 과학적 탐구를 저해한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은 역설에 대한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이는 고정된 진리 안에서 사회적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 하느님은 자신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시험을 모든 그리스도교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이는 아브라함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이사악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역설적 상황으로 다가온다. 역설적 상황은 윤리적 규범에 매어있는 종교인들이 하느님을 따르는 것에 장애물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용기 내어 행동하지 않고 세속적 삶을 선택한다. 이는 현실에서는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살 수 없고, 대부분은 종교적 역설 앞에서 일상의 윤리와 세속의 질서 속으로 되돌아간다. 키에르케고르의 논리에서 중요한 점은, 종교적 역설을 감당하는 용기가 보편적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인간은 윤리와 제도, 과학과 노동의 질서 속에 남아 세계를 유지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믿음은 개인적이기 때문에 용기 내어 믿음을 실현하는 아브라함과 역설에 굴복하고 세상의 삶을 사는 세속적 종교인들이다. 이는 종교의 온전한 실현이 세상의 발전과 양립할 수 있다는 논리적 설명이 된다. 용기를 내지 못한 사람들은 역설적이게 세상을 발전시키는 구성원으로 남는다. 아브라함 같은 종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후에 종교적 영웅이 되어 종교적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조화로운 세계는 종교와 사회발전이 양립가능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리처드 도킨스 같은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비판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7) 헤겔과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에게 헤겔은 인간 실존을 체계 속에 파묻어 버린 철학자로 종교적 실존을 위해서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철학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키에르케고르와 헤겔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고 또 다르다. 이 둘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7-1) 유사점
키에르케고르는 방법론적인 면에서 헤겔 철학과 많이 닮아있다.
첫째,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의 기사가 가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다시 유한으로 가는 변증법은 헤겔의 정신의 운동과 닮아있다. 헤겔은 무한자는 유한자를 통해서 실현되고 유한자는 무한자를 통해서 자기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무한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유한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그 과정에서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의미를 획득한다. 종교 공동체를 통해서 무한자는 현실세계에 실현되고 현실세계에서의 변증법을 통해 변화를 받아들인다. 믿음의 기사는 무한자가 아니지만, 무한자와의 관계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다시 유한으로 돌아오는 운동으로 드러난다. 믿음의 기사는 유한에서 맞이한 역설적 선택을 통해 무한자와 통일되고 다시 유한한 세상으로 돌아와 기쁨이 충만한 세계를 살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죽이라는 선택에 직면하고 행하려는 순간 무한자와 연결되고 다시 이사악과 사라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다.
둘째,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이 단순한 논리의 퇴행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이해를 무너뜨리는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의심과 믿음은 하나라는 그의 분석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헤겔의 철학과 비슷하다. 헤겔에게 무란 어떤 가치로부터의 무이기에 그 안에 새로운 가치를 담고 있다고 했고 또한 “정신은 뼈이다.”라는 무한 판단에서 어떻게 이성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을 통한 지양은 두 철학자의 사상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셋째, 키에르케고르에게 운동은 믿음에서 지울 수 없다. 인간은 한 번의 믿음으로 믿음의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시험되고 용기와 결단을 통해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이는 변화 속에서의 자기 동일성을 보여준다. 믿음의 기사는 실존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남고 이는 믿음의 기사를 정의 내린다. 헤겔에게 의식에게 주어지는 규범이나 질은 계속해서 바뀌지만 의식은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그 동일성이 모순을 만나며 변화를 추동한다.
이처럼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는 많은 방법론적 동일성을 가지지만, 진리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인해 많은 차이점을 가진다. 헤겔에게 진리는 운동이고 변화이지만, 진리의 추구는 체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키에르케고르의 진리는 하느님이라는 고정된 것이고, 진리의 추구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정열을 통한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다. 또한 헤겔은 매개를 진리 추구의 필연적인 행위로 반면에 키에르케고르는 매개를 진리 추구에 장애로 해석한다.
(7-2) 차이점
이는 5가지 큰 차이점을 만든다.
첫째, 개인 실존이 실종되는 체계 중심적 진리 추구는 키에르케고르에게 실존적 경험으로 대체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적 상황에 맞서 용기를 통한 결단을 내리는 개인의 선택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헤겔뿐만 아니라 당시 덴마크 국교 또한 체계 속에 묻어진 종교를 설파한다고 비난했다. 이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는 것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무책임한 믿음에 대한 반박이다.
둘째, 키에르케고르는 정열을 중요시했다. 여기서 정열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심리적 요인이다. 헤겔 철학에서 정열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안티고네가 가족의 법을 지키려는 행동은 정열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키에르케고르에게 정열은 개인적으로 발현된 것이고 헤겔에서 정열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지만, 그 정열은 종종 보편적 윤리(혹은 역사적 정신)의 운동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셋째, (7-1)의 결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키에르케고르에게 진리는 고정된 것이지만 헤겔에게 진리는 변화하는 것이다. 멈춰버린 진리는 헤겔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헤겔은 의식을 전진시키는 동력으로서 부정성과 모순의 경험을 강조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한계 없는 의심을 인간의 오만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데카르트는 모든 사람이 의심하라는 것을 의무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의심은 데카르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무조건적인 의심을 비판했다. 데카르트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이런 관점은 믿음은 개인적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허무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넷째, 키에르케고르에게 진리는 개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시험은 모든 사람마다 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보편성을 추구하는 규범은 종교적 가치 추구의 걸림돌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의 시험을 타자와 교류할 수 없다. 반면에 헤겔에서 진리는 공동의 규범과 제도 속에서 객관화된다. 헤겔은 상호인정 그리고 보편성과 개별성을 오가는 변증법을 통해 규범이 성립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헤겔에게 언어는 규범적 진리형성에 필수적인 것이다.
다섯째, 키에르케고르는 역사의 진보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그의 진리는 고정되어 있고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믿음을 얻은 영웅의 행동은 지금의 믿음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진리를 얻기 위해 개인은 독립된 시간 속에서 독립된 행동을 한다. 반면에, 헤겔은 과거의 행동은 지금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절대정신은 개념적으로 시간의 여러 국면을 포괄하며, 과거·현재·미래는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전개로 이해된다.
둘 중 어떤 철학자의 관점이 정답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같은 ‘운동’의 언어를 쓰더라도, 그것을 체계의 진리로 읽느냐, 단독자의 결단으로 읽느냐에 따라 철학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8) 결론
『공포와 전율』은 신에 대한 믿음을 다루지만, 그 핵심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결단에 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단독자의 절대자와의 경험은, 그를 외로운 결단의 순간으로 내몬다. 그리고 그가 내리는 결정에 대한 결과는 오직 그가 책임져야만 한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현대사회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정당화하기 힘들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극단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혼동될 위험을 지닌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믿음의 기사는, 타인을 설득하거나 동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모든 책임과 고독을 오직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존재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믿음의 기사에게 요구되는 이 모든 조건은, 테러리즘의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행동에 대해 고뇌하지 않고 종교지도자를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희생시키지 않고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것을 희생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관적 결단이 아니라 체계화된 결단일 뿐이다. 따라서 『공포와 전율』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결단이 얼마나 어렵고 고독하며 책임을 요구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