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희극: 헤겔로 읽는
『고도를 기다리며』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부조리극이란 의미의 공백, 무의미한 반복, 논리적 플롯의 부정, 인간 조건의 정지 상태 등 전통적 의미의 ‘재미’—인과적 플롯, 성격 변화, 결말의 해소—를 의도적으로 비껴간다. 사람들은 연극이나 소설을 공감하고 즐기고 생각하기 위해 관람하는데, 위의 특성으로 부조리극은 짧게 관심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고전이 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도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상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다른 부조리극과 그럼에도 고전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사뮈엘 베케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내 수잔 데셰보-뒤메닐이 사망하고 5개월 남짓 후에 사망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실존주의적 독해로 읽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실존주의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운동’(혹은 ‘정신의 전개’)을 연극적 형식으로 노출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리뷰는 실존의 껍질을 깨고, 헤겔이 말한 ‘정신의 운동’이라는 틀을 통해 “고도를 기다리며”의 심층 구조를 해부해보고자 한다.



2) 줄거리

“고도를 기다리며”는 2막으로 이루어졌다. 1막에서 두 명의 등장인물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군지도, 왜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중간에 포조와 그의 하인 럭키가 등장하고 그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어떤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늘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달한다. 2막에서 똑같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린다. 다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는데, 포조가 장님이 된다. 그들과 여러 가지 대화가 끝나고 다시 소년이 등장하고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내일도 고도를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연극은 끝난다.



3) 실존주의 해석의 이유와 그 한계

“고도를 기다리며”가 실존주의 소설로 읽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처럼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주어지지 않고 개인의 결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는 모르지만, 막연히 기다린다. 그리고 그들은 고도를 떠나는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계속해서 기다리는 이유는 선택을 미루는 회피로 보는 것이다..


둘째,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에 대해 논한다. 그는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부조리인 것이다. 인간은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반항이란, 제우스가 주는 벌을 받은 시지프가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고 견디고 묵묵하게 돌을 미뤄 올리는 것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리가 처한 상황이 부조리다. 그들에게 고도의 존재이유와 목적은 설명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라는 요청을 받는다. 둘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기다리는 내내 대화도 하면서 생을 살아간다. 이것이 시지프 신화에서 말하는 부조리에 대항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셋째, 여기서 언어는 세계를 설명하는 도구라기보다 시간을 때우는 장치로 전락한다. 이 작품에서 언어는 세계를 설명하거나 합의에 이르는 매개가 아니라, 기다림의 공백을 메우는 말로 전락한다. 그 결과 대사는 정보를 전달하거나 이해에 도달하기보다, 침묵과 불안을 덮는 말의 소음이 된다. 서로의 말은 응답으로 이어지지 않고, 각자는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며 ‘내일’로 시간을 미룬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상황에 맞는 언어나 대화란 없고 각 화자는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이를 평론가들은 언어에 대한 실존주의적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실존주의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것이 가능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실존주의식 설명은 포조와 럭키의 등장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다. 포조와 럭키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 대한 설명만 할 뿐 이 둘에 대한 설명은 없다. 물론 실존적 삶을 살지 못하는 2명의 등장인물일 수 있지만, 그들이 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되는지 그리고 장님으로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들이 극의 40% 이상에 등장하는 것을 감안할 때 이는 큰 결함이다. 두 인물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1막/2막 모두에서 관계의 구조 자체를 드러내는 장치다. 따라서 이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해석은 작품의 절반을 잃는다.


둘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항상 짝으로 움직이는데 이것은 실존이 아니라 둘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갇힌 인간들이라고 해석돼야 한다. 만약, 두 명의 주인공이 실존적 움직임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아니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실존주의를 표방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둘이 실존을 만들어내는 동기 혹은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그냥 해석을 위한 해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실존주의는 고도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반복 상연되는 이유는, 고도가 ‘누구에게나 걸리는 어떤 자리’—기대, 약속, 구원, 제도, 인정—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제는 개인 심리(실존)보다 보편적 형식의 문제로 이동한다. 그리고 만약 고도를 기다리며가 실존주의 소설이라면 그리고 고도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도를 기다리며”에 환호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이 나오지 않는 희곡이기에 교도소에서 방영되었던 연극이 그들을 울리고 교도소에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감동을 준다는 것은 어떠한 보편성이 극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실존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존이란 개인의 고독한 선택에 대한 믿음과 열망이기 때문이다.



4) 헤겔적 해석으로의 “고도를 기다리며”

4-1)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헤겔은 모순이 진리의 시작이라는 독특한 철학적 해석을 한다. 전통적 논리학은 모순은 없어져야 하고 논리적인 참인 명제가 진리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헤겔이 보기에 이는 진리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모순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고 그 새로운 시각은 진리에 이르는 새로운 길이 된다. 또한, 보편성과 개별성의 모순적인 존립은 이 둘의 지양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이양한다.


에스트라공은 발/신발/통증/몸 쪽에 대한 묘사가 반복되는 반면 블라디미르는 머리/모자/기억/사유 쪽이 반복된다. 이런 묘사가 에스트라공은 행동하는 인간, 블라디미르는 사유하는 인간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이 둘의 행동이 차이가 있어야 하지만 둘은 여전히 기다리고 이야기할 뿐이다. 내 생각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모순의 양 항을 의미한다. 헤겔에게 모순은 진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모순은 서로 다르고 불편하다. 헤겔의 대표적 명제 “이성은 뼈이다”에서 이성과 뼈는 어울리지 못한다. 이성이라는 정신이 뼈라는 단순 사물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하지만, 이성과 뼈는 정신의 발전을 설명하고 다음 단계 관념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어울리지 않지만, 항상 같이 있고 또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꼭 같이 있어야 하는 존재가 그 둘이고 이는 모순일 것이다.



4-2) 역사의 진보? 죽음?

헤겔에게 있어 역사는 진보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보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나의 해석을 2가지이다.


첫째, 헤겔에게 육체적 죽음은 단절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이라는 우연성에 얽매인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죽음이다. 하지만, 정신은 그런 인간을 장례절차를 통해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구하고 공동체에 정신으로 살아있게 한다. 장례가 없다면,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끈끈한 정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제사를 통해 조상을 기리고 존경하고 장례에 사용된 음식을 섭취하면서 조상의 정신을 내면화한다. 그리고 이 정신은 공동체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헤겔에게 지양은 보존하면서 나아감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보존은 모순의 각항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과 비슷한 변화를 통해서 지양될 수 있다. 이는 죽음과 비슷하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역사의 진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죽음을 회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은 계속해서 죽음을 시도하지만 끈이 짧아서 실패한다. 그리고 이 의미는 모순의 항들이 역사의 진보를 할 만큼의 희생을 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둘째,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와 럭키의 변화는 역사의 진보를 보여주고 있다. 1막에서 포조와 럭키는 완전한 주종관계이다. 포조는 럭키를 자신의 하인이라고 말하며, 모독한다. 하지만 2막에서 포조는 눈이 멀고 럭키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나는 포조가 자본주의 그리고 럭키는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초반의 천민자본주의는 이성을 완벽하게 자신의 손에 넣었다고 자부하지만, 대공황을 거치면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구원한다. 예컨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조정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과 제도(케인스주의 같은)를 요청했던 역사적 장면을 떠올리면, 포조가 럭키 없이는 한 걸음도 못 가는 전환이 더 선명해진다. 또한 눈먼 자본주의를 완벽한 퇴락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것은 철학 문학 등 이성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포조와 럭키의 관계 변화가 역사가 진보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4-3) 포조와 럭키

“고도를 기다리며”는 실존주의적으로 읽히지만, 실존주의 독해만으로는 포조와 럭키의 관계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장면은 실존의 문제라기보다, 근대 이성의 구조—특히 도구화—를 묻는 방향에서 더 선명해진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정신에 이르는 여정을 그린다. 거기서 계몽에 대한 헤겔의 통찰을 포조와 럭키의 관계를 설명할 단서를 제공한다. 다만 ‘도구화된 이성’이라는 진단은 헤겔 자체라기보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의 문제제기이므로, 여기서는 헤겔의 ‘정신의 운동’ 틀 위에 그 비판을 겹쳐 읽겠다.


포조와 럭키의 관계는 이성이 도구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지배의 형식에 가깝다. 포조는 지배를 수행하는 주체처럼, 럭키는 기능으로 전락한 사고처럼 보인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는 계몽의 지배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식이 파시즘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도구적 이성은 합리성이 아니라 지배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이는 이성이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시킨다고 했다. 즉, 이성은 ‘이해’가 아니라 ‘통제’가 되고, 그 통제는 관계를 주인–도구의 형태로 고정한다. 포조와 럭키는 그 고정을 무대 위에서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장치가 하나 더 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포조를 고도로 착각하는데, 이는 시대의 감각을 드러낸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던 시대에는 인간에 대한 다른 가치들이 쉽게 밀려났고, 자본주의는 때로 신의 구원을 대신할 ‘최종 목적’처럼 표상되었다. 포조를 고도로 착각하는 장면은 바로 그 시대 감각을 풍자한다. 포조는 럭키를 완전히 지배하려고 한다. 럭키가 육체적으로 강하다고 묘사된 데서 이성의 지배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포조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 대해서도 지배욕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럭키가 자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런 모습에서 이성을 도구화한 인간의 자만과 탐욕을 볼 수 있다. 반면에 럭키는 자기의 본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단순히 포조의 명령을 따르는 존재이다. 하지만 포조가 럭키에게 “말해”라고 명령하자, 럭키는 통찰을 말하기보다 의미로 조직되지 못한 지식의 파편을 폭발적으로 쏟아낸다. 이는 이성이 ‘이해’가 아니라 ‘축적’과 ‘나열’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2막에서 포조가 눈먼다는 것은, 지배가 더 이상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포조는 몰락했지만, 동시에 럭키 없이는 한 걸음도 못 간다. 지배가 붕괴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도구로 만들었던 이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다만 럭키의 연설이 보여주듯 그 이성은 이미 파편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성이 자본주의를 구출했다’가 아니라, 파국 이후의 질서는 자기반성적·제도화된 새로운 이성을 요구한다는 요청에 가깝다(케인즈 같은 시도가 그 역사적 형태다). 포조는 눈이 멀었지만, 럭키에 의존함으로써 다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를 설명한다. 이 장면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성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그리고 도구화된 이성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간 이성이 필연적임을 보여준다. 차가운 자본주의가 아니라 도스토프예스키 같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진 이성이 요구된 것이다.



4-4) 고도는 누구인가?

“고도는 누구인가?”는 이 작품을 읽는(보는) 사람이 가장 먼저 붙드는 질문이다. 제목과 내용이 모두 ‘기다림’에 걸려 있지만, 고도는 끝내 등장하지 않고 정체도 확정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은 “GODOT”과 “GOD”이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신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막연한 기다림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도를 어떤 ‘대상’(신이든 구원이든)으로 놓는 순간, 약속·소년·기억의 엇갈림 같은 장치들이 오히려 극 전체를 모순으로 만든다. 등장하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신과 구원을 영원히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도중에 나오는 소년은 고도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데, 만약에 고도가 있다면 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와 약속을 했다면 고도를 봤다는 것인데 왜 고도가 누구인지 모를까?


만약, 고도를 로고스로 이해한다면 이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즉, 고도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세계가 전체로 조직되는 형식’이다. 일단 고도는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과 함께 있다. 헤겔은 로고스가 세상의 형식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로고스는, 헤겔이 말하는 ‘개념(이성)의 형식’—세계가 전체로 조직되는 방식—이다. 로고스는 개념의 방식으로 세상을 조직하는데, 의식에게는 세상이 표상으로 혹은 부분으로만 보인다. 세상을 개념의 방식 전체로 이해했을 때만 우리는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열매를 통해 전체로서의 진리를 보여준다. 열매는 씨앗으로 우리의 눈에 나타난다. 그리고 씨앗은 줄기가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씨앗의 생성을 단편적으로 바라보면 씨앗은 줄기에 의해 부정되고 줄기는 꽃과 열매에 의해 부정된다. 씨앗과 열매는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로고스는 씨앗 줄기 꽃 열매를 하나로 붙잡는다. 이 로고스는 항상 우리와 같이 있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드러내는 방식은 의식이 전체로서 세상을 바라볼 때뿐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표상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면 고도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도가 우리와 같이 있고 이것이 의식이 세상을 파악하는 보편적 형식이기에 기다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둘은 항상 좌절하지만, 계속해서 기다린다. 왜냐하면 고도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가 로고스라면, 소년이 등장도 이해할 수 있다. 소년은 사실 여부를 확정해 주는 인물이 아니라, 고도가 ‘올 것’이라는 표상을 유지하는 신호 장치다. 왜냐하면 소년을 본사람은 블라디미르뿐이다. 그리고 블라디미르가 소년에게 포조와 럭키를 봤느냐는 질문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년은 로고스가 의식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다. 의식이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찾게 하기 위해 고도는 존재하고 닿을 수 있다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위에 언급한 대로 “고도를 기다리며”가 교도소 죄수들에게 큰 감명을 줬다고 한다. 이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는 보편적 감정도 플롯도 없다. 따라서, 로고스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형식의 표현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극을 보는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부여하고 느끼게 했다는 것이 더욱 논리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로고스가 함께 있는데도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표상 속에서 시간을 유예하고 말로 시간을 메우며 ‘오지 않음’의 상태를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4-5) 시간과 언어

“고도를 기다리며”의 등장인물들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시간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1막이 어제였는지 오래 전이였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린다. 포조는 블라디미르가 말하는 어제에 대해서 화를 내며 어제가 아니라 어느 날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같은 장소에 서 있어도,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세계가 표상들로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보편성의 수단이어야 할 언어가 3명의 등장인물을 묶어주기는커녕,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말만 늘어놓는다.


이는 헤겔이 말하는 표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생산성의 표상과 구원의 표상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듯, 표상에 사로잡힌 의식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에 대한 정의 또한 달라진다. 자본주의 시대에 시간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종교의 시대에 시간은 자신의 특수성을 지우고 절대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각 표상은 표상이 목적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변형되고 사용된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무의미하게 반복되듯이 보이는 이유는 각자가 각자의 시간만을 달릴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인물들에게 언어는 무의미하다. 언어는 보편적 매개로 기능하지 못하고, 각자의 표상을 확인하는 말로만 남는다. 오히려 각 표상의 단계는 언어를 통해서 의식을 잡아두려고 노력한다. 어떤 의미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희곡과도 같은 현실의 비웃음은 어떤 가치도 포함시키지 못한다. 여기서 시간은 사건을 밀어내는 ‘내일’의 유예로 흐르고, 언어는 그 유예를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동원되는 말의 소음이 된다. 이 희곡에서 사건이라 부를 만한 움직임은, 고도를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반복할 때와 죽음을 입에 올릴 때에만 잠깐 발생한다.



5) 결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모순의 두 항으로, 반복되는 죽음의 실패는 지양의 불가능으로, 포조와 럭키는 도구화된 이성의 우화로 읽힌다. 물론 나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사뮈엘 베케트 마저도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할 만큼 이 작품은 열린 작품이다. 하지만 실존이라는 획일된 해석이 아니라 헤겔의 전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겪었던 전쟁이라는 비극은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제국주의의 실패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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