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을 읽고 by 프리드리히 헤겔(7편)

주관정신에서 객과정신으로의 이해 ~ 도야의 세계

정신

(1) 주관정신에서 객관정신으로의 이행

장이폴리트의 독해를 따라, 이성에서 정신으로의 전환을 주관정신에서 객관정신으로의 이행으로 읽어보겠다. 의식, 자기의식 그리고 이성을 거쳐온 주관정신은 객관정신이 되었다. 주관정신과 객관정신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헤겔이 의미하는 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내려야 한다. 헤겔의 정신이 개별의식이 진리를 찾아내는 지각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볼 때, 정신을 신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헤겔이 계몽과 신앙의 비교에서 둘을 동일한 실체의 다른 측면으로 밝힌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종교는 표상의 형식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단계로 보고 있다. 이는 헤겔이 최소한 전통적인 개념의 신을 의미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신은 만인의 행동을 위한 굳건한 근거이자 출발점이며… 동시에 각자 모두의 행동을 통해 산출된 보편적 작업성과이다.”

정신은 개인들 위에 떠 있는 신이 아니라, 개인들의 행위가 서로 인정되며 제도·규범으로 굳어진 것이며, 동시에 그 제도·규범이 다시 행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 정의는 정신이 ‘주어져 있는 보편성’이면서도 ‘행위를 통해 생성되는 보편성’ 임을 동시에 말한다. 따라서 정신은 어떤 외부의 동력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성립하는 조건이자 그 행위가 낳는 결과로써 전개된다.


다만 의식의 출발점에서 정신의 보편성은 아직 은폐되어 있기에, 의식은 정신을 외적인 진리에 대한 막연한 '추동'이나 주관적인 '확신'으로만 경험한다. 이 단계에서 정신은 자아와 분리된 채 '파악해야 할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의식은 감각적 확신에서부터 매개의 필연성을 깨달으며 점차 규범의 등장을 예고한다. 하지만, 의식은 감각적 확신에서부터 매개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어렴풋이 규범의 등장을 예고한다. 개별의식은 자기의식의 단계와 이성의 단계를 거치면서 더욱 확실하게 주관만으로는 세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의 법칙은 실행의 문제에 부딪히고 덕은 세계행정의 필연성의 문제에 부딪힌다. 그래서 주관정신은 단지 ‘내가 옳다’는 확신만으로는 진리를 유지할 수 없고, 행위가 타자에게 인정되며 지속되는 객관적 형식을 필요로 한다. (이 필요가 주관정신에서 객관정신으로의 이행을 강제한다.) 이에 의식은 상호인정을 통해 나의 작품이 만인의 작품이 되는 경지에 이르고 이는 객관정신으로 화한다.


객관정신은 이제 상호주관성을 획득했기에 보다 높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정신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를 찾아가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체를 통해 현실성을 지닌다. "객관정신 단계에 진입해서도 정신은 개별적 주관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신은 여전히 자신과 대립하는 '대상'과의 부정적 관계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인식하며, 이 과정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이 발생한다. 의식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대비 속을 살아가고 개체에 의해 외화 된 보편성과 개별성은 운명이라는 이름 속에서 비극적 상황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비극은 정신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고 지양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헤겔에게 역사란, 개체성의 자기실현보다는 개체성이 행위를 통해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보편성을 형성하는 단계이다. 물론 개별 인물들의 영웅적 행위가 역사의 나아감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정신을 실현하는 개체성의 행위라는 면에서 이는 보편성과 개별성의 대립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는 필연적으로 정신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위해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객관정신에서 헤겔은 서양의 역사가 보편성과 개별성의 대립을 통해서 발전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객관정신의 여정의 시작은 그리스이다. 그리스는 개인과 공동체의 규범이 아직 분열되지 않은 직접적 인륜(Sittlichkeit)의 형태로서 정신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헤겔의 절대정신이 철학을 의미하고 그리스가 철학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헤겔의 선택은 일관성을 가진다. 지금부터 정신은 개체성의 자기실현과 그들이 마주하는 비극적 운명을 통해 지양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2) 참된 정신 인륜성

장이폴리트는


“최초의 정신은 직접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역사적 소여로서, 즉 민중의 실존으로서 현존한다.”라고 했다. 정신이 직접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은, 개별자가 아직 실체를 자기 원리로 반성적으로 분해·비판하지 않은 채, 관습과 제도 속에서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살아내는 단계라는 뜻이다. 인륜의 세계에서 개별자들은 인륜적 본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인륜성의 실체는 인간법과 신법으로 분화되며, 고대 인륜세계에서는 이 분화를 담지하는 방식이 자연적 차이(성차)와 결합된 역할 분담으로 나타난다.


고대의 직접적 인륜성에서 정신은 자신을 자연적 차이의 형식으로 곧바로 분지화하며, 그 결과 여성은 가족(신법)의 자리로, 남성은 국가의 자리로 배치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헤겔이 자연적 성차를 단순히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연이 부여한 직접적인 차이를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 내에서 어떤 윤리적 의미(가족/국가)를 떠맡느냐를 문제 삼는다. 즉, 성차라는 자연적 사실은 정신의 운동 속에서 '역할'과 '의무'로 매개됨으로써 비로소 인륜적 가치를 획득한다. 이로써 자연은 정신 안에서 의미로 고양되며, 단순한 차별을 넘어선 보편적 질서의 일부가 된다. 장이폴리트는



“이렇게 해서 자연은 초극된다. 왜냐하면 자연이 아니라 자연 속의 의미에 가치가 부여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통해서 헤겔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했다고 보인다. 즉 성차라는 자연적 사실이 그대로 윤리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어떤 의무와 의미를 떠맡는지(가족/국가의 역할 구조)가 문제로 전환되는 순간, 자연은 정신 안에서 의미로 매개된다.


인간의 법과 신의 법 모두 인륜적 실체이기 때문에 우연적이지 않다. 국가는 규범, 법, 가치등을 매개로 인륜적 형식을 형성한다. 정치에 참여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따르면서 타인에게서 인정받는다. 특히 국가는 전쟁을 통해 자기 목숨의 보존이나 사적 안위가 공동체의 기준이 되는 관념을 깨뜨려, 국가가 단순히 개별의 수단이 아니라 윤리적 실체임을 드러낸다. 신의 법인 가족 또한 우연성을 벗어나는 형식이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일부일처제라는 형식을 확립했다. 가족이 인륜성에서 차지하는 가장 큰 역할은 장례에 있다. 인간은 자연적 죽음에 직면한다. 죽음은 인간을 자연적 소멸 속으로 되돌리지만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은 인륜적 정신이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이에 가족은 장례를 통해서 인간을 자연의 무화로부터 끌어내고 정신의 한 부분이 되게 한다. 장례로 죽은 조상을 기리면서 조상의 생각과 의미가 규범의 생성에 영향을 미친다.


헤겔은 행위와 비극의 긍정성에 대해 논한다. 물론 행위와 비극은 자체로 부정적이지만, 정신이 지양되기 위해서는 이런 부정은 필연적이다.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은 본래 하나의 정신에서 양분된 두 가지 실체지만, 실체를 행위로 실현하는 개체는 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행위하고 죄를 짓는다. 헤겔에게 안티고네의 '죄(Schuld)'는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한쪽의 정당한 법(신의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쪽의 정당한 법(인간의 법)을 침해하게 되는 '일면적 행위'를 의미한다. 두 실체는 원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기에, 한쪽의 승리는 곧 실체 전체의 균열을 의미하며 결국 공동체의 파멸(비극)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비극은 파괴로 끝나지 않고, 개별과 보편이 분리되어 있던 직접적 인륜성을 파괴함으로써 더 고차원적인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지양의 필연적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는 헤겔에게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개별과 보편의 양극으로 갈라졌던 실체가 새로운 실체로 지양되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비극 없는 역사의 발전은 없다. 그리고 비극은 개체의 선택이 아니라 본질의 표현으로 필연적으로 행위되어진다.


인간의 법은 신의 법의 수호자와 대립하여 그들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개별자들이 공동체를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이는 자연 자체의 부정이라기보다, 자기 보존과 사적 안위를 공동체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을 억제하는 계기다. 하지만 전쟁은 공동체를 보존하는 동시에 개인에게 부정성의 위력을 경험하게 만들어 공동체의 가치를 잠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용맹의 표출과 전리품의 획득과 같은 과정을 통해 개별적 부정성의 위력을 개체에게 전시한다. 이는 개별성의 보편성에 대두되는 결과가 된다. 도시국가 속에 융합되었던 개별적 공동체들은 신의 법의 파괴와 전쟁을 통한 개별성의 대두를 통해 도시국가에 대항하게 된다. 이는 개별성을 보편성 속에서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체의 탄생을 요구하고 이는 추상적 법적 보편성의 왕국으로 이어진다. 즉 인륜적 ‘관습의 통일’이 깨진 자리에서, 개별성을 보존하면서도 보편을 성립시키는 방식으로 ‘인격/권리’라는 추상적 형식이 전면에 등장한다.



(2-1) 법적 상태

개체와 실체의 통일로서의 인륜적 상태가 해체되면서, 개인은 공동체의 가치가 아니라 ‘법적 인격’이라는 형식적 보편성으로 매개되어 나타난다. 신법과 인간법의 비극을 통해 각 개인은 개인의 기반에서 본질을 추구하려고 하고 이는 법 앞에서 추상적 보편성이 된다. 즉 개인의 가치는 지워지고 ‘권리’로만 규정된다. 물론 현대적 의미의 법치국가에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이런 개념은 자유와 연관되지만, 법적 권리의 생성에 아무런 권한을 가지지 않고 통치자의 생각에 좌지우지되는 법은 추상적 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로마제국에 해당한다. 로마는 다양한 공동체와 도시국가를 통합하고 제국을 형성하지만, 이 개별자들을 하나로 묶을 가치는 만들지 못하고 추상적 법을 통해 평등이라는 가치를 만든다.


이는 자기의식의 스토아주의에서 회의주의로의 이행과 일치한다. 스토아주의가 삶의 실질을 바꾸기보다 ‘생각의 자유’라는 형식에 머무르듯, 로마의 개인도 공동체적 가치를 잃은 채 ‘권리’라는 형식으로만 평등해진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생각의 외화를 경험하지만,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사유의 자유만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화된 회의주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긍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회의주의는 불행한 의식으로 지양된다. 반면 로마의 법적 인격은 부와 지위의 불균형이라는 현실을 법 앞의 추상적 평등으로만 처리한다. 이 추상적 권리는 현실에서 재산(소유)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확정하며, 개인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자”로서 인격을 증명하려 한다. 그 결과 법적 인격은 다른 가치들을 밀어내고 소유에 의지하는 사적 인격체로 고립된다. 물론 회의주의와 마찬가지로 소유는 소유자 보다 소유 자체의 가치를 중시하고 이는 본질적 가치를 찾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장 이폴리트는 이교의 종교가 한순간에 사라진 이유를 역사적 텍스트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장 이폴리트는 헤겔의 그리스에서 로마로의 이행이 스토아주의에서 회의주의로 그리고 불행한 의식으로 이행하는 것과 같은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 개체는 국가에서 본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본질을 찾는 그리스도교 같은 종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쿠스교 같이 쾌락을 추구하는 종교가 유행한 이유는 보편성이 아니라 개별성을 확보하려는 의식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본질을 결여한 로마의 추상적 법의 세계에서 본질을 잃은 개별성은 종교에서 보편성을 찾으려고 했고 이는 이교도의 몰락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탄생이 된다. 장이폴리트는 이 전환을 역사적 텍스트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인격적 원자들의 절대적 다수성으로 분산되었던 것이 제국의 황제라는 하나의 집중점으로 결집된다. 제국의 황제는 법의 평등성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이면서 모든 인격자를 포괄하는 개별적 인격자로 보이지만, 그 보편성은 실체적 내용을 가지지 못해 공허하다. 제국의 황제는 혼자일 경우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휘두르는 권리와 폭력에 복종하는 신민을 필요로 한다. 이는 주인-노예 관계에서 노예의 처지와 닮아 있다. 제국의 황제는 내용이 없고 불안하기에 자신의 불안을 감추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단독적인 자아의 광란에 처럼 보인다. 법적 인격은 껍데기뿐인 평등 아래에서 자신과 실체 사이의 깊은 소외를 경험한다.


소비와 향락이라는 형식은 로마적 인격의 공허를 드러내는 증상이며, 그 공허가 제국의 통일을 지탱하던 형식을 잠식한다 이를 헤겔적으로 설명하자면, 사적 인격체들은 부에서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부는 황제, 법, 경제상황등 우연적으로 결정되기에 공허할 따름이다. 하지만, 부가 주는 현실적 편안함으로 부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추구한다. 공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족들은 소비와 향락에 의존한다. 하지만, 소비와 향락을 추구하는 의식은 2가지 파괴를 경험한다.

첫째, 부와 향락에 의존해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된다. 의식은 자기 스스로에게 그 어떤 확신도 본질도 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공허한 행동에 스스로를 가둔다.

둘째, 계속된 부와 향락을 추구하기 위해 의식은 더 많은 부와 향락을 요구한다. 하지만, 부와 향락은 유한한 자원일 뿐만 아니라 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 결과 법의 보편성은 형식만 남고 실질은 우연성에 종속되며, 의식은 이 분열을 단순히 견디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낯설게 하는 경험 속에서 도야(Bildung), 곧 문화의 세계로 나아간다. 즉 개인은 자연적 즉자성 그대로는 보편성 속에 들어갈 수 없어서, 자신을 사회적 형식(언어·관습·제도)으로 ‘소외시키는’ 과정을 거쳐야만 현실적인 자아가 된다. 이게 도야가 ‘상실’이 아니라 ‘필연’인 이유다.



(3)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정신: 도야

(3-1) 도야와 그 현실의 왕국

법적 인격이라는 추상적 보편성의 형식을 거친 의식/정신은 이제 도야의 세계로 이행한다. 도야의 세계는 소외를 상실이 아니라 보편성의 생산 메커니즘으로 보여준다. 개체는 여전히 자연적 욕망과 특수성(즉자성)을 출발점으로 갖는다. 인륜성의 시대에는 그 특수성이 가족·국가의 관습 속에서 곧바로 윤리적 역할로 정착하며, 개인은 그것을 자기 바깥의 실체로 ‘느끼기’보다 자기 삶으로 즉시 수행했다. 법적 상태는 개인을 보편성에 결속시키지만, 그 보편성은 내용이 빈 형식이어서 곧 실체와 개인의 분리(소외)를 드러낸다. 실체는 더 이상 개체 안에 즉자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관습·제도·언어 같은 객관적 형식으로 외화 되어 개체와 마주 선다. 실체는 개체들의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 하지만 개체는 여전히 자연적 욕망/특수성에 묶여 있어, 그 객관화된 실체를 자기 것처럼 살지 못하고 오히려 대립적으로 경험한다. 개체는 보편성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자연적 즉자성’ 그대로 두지 않는다.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을 내면화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교양된 인격’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정신은 개인의 행위를 관습·언어·제도 같은 객관적 형태로 고정시키고, 그 객관적 형태가 다시 개인을 길들이는 방식으로 개체와 실체를 매개한다 따라서 개인은 실체에 단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실체를 재생산하고 미세하게 변형한다.. 신사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연적 욕망을 억누르고 매너를 익히는 것으로 실체와 동일시한다. 매너는 개체들의 요구에 따라 시대를 변화한다.


인륜성의 세계를 지나온 의식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대립을 그대로 간직한다. 인륜성의 세계에서는 이것들이 국가와 가족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보편적 힘이 국가 권력과 시민사회(부)가 되는 외화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대립이 된다. 의식은 국가와 부에 대해서 판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판단 없이는 의식이 어떤 것도 본질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판단에서 국가권력은 구성원들에게 보편성을 제공하고 숭고함 희생이기에 선이고 부는 무상한 의식만을 발견하고 개별성만을 향유하기 때문에 악이다. 반면에 다른 판단에서는 각 개인을 자기의식에로 고양시켜 주는 부가 선이고 이를 억압하는 국가권력이 악이다.


우리는 여기서 헤겔의 탁월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헤겔 전까지의 본질은 운동이 아니라 고정된 진리이기에, 국가권력이 선이거나 부가 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헤겔에게 본질은 운동이기에, 선과 악은 개체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국가권력에서 동등성을 발견하는 개체는 국가권력을 선으로 부에서 동등성을 발견하는 개체는 부를 선으로 판단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개체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이 두 판단의 각각에는 동등성과 부등성이 존재한다. 이중적인 동등성과 이중적인 부등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실재하는 두 개의 본질성에 대한 대립적 관계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동등성과 부등성은 국가권력과 부를 판단하는 실체 안에서 판단되었지만, 국가권력이 동등하면서 부등 하고(국가권력이 모두에게 본질적인 지반을 제공하지만, 이 안에서 차별이 존재함) 부가 동등하면서 부등 하기 때문에(부는 사람이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일 수 있지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하자로 나뉨) 동등성과 부등성을 자기의식 자체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성격은 내용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의식의 형식이 된다.


장이폴리트는


“우리가 동등성을 자기의식 자체의 본질로서 간주한다면 우리는 고귀한 의식, 즉 국가권력과 부 모두에게 어울리는 의식에 도달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만일 우리가 부등성을 자기의식의 본질로서 간주한다면 우리는 천박하거나 혹은 비천한 의식에 도달할 것이다.”


의식은 이제 단순한 가치 규정인 '판단'을 넘어, 실체와 자신을 실질적으로 연결하는 ‘추론(Schluss)'의 단계로 이행한다. 판단이 대상을 "선이다" 혹은 "악이다"라고 명명하는 데 그친다면, 추론은 개별적인 자아가 ‘봉사'나 '희생'이라는 매개체(Middle Term)를 통해 보편적 실체와 하나가 되려는 역동적인 운동이다. 예를 들어, 국가권력이 선이라는 판단은 내가 국가를 위해 나의 특수성을 희생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비로소 현실적 진리가 된다. 이에 의식은 자신의 추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행위의 추론을 시작한다. 장이폴리트가 말한 거처럼, 동등성을 사유의 형식으로 삼은 고귀한 의식은 국가를 선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를 소외하고 국가의 보편성을 세우는 봉사의 영웅주의가 된다. 그들은 봉사를 통해 보편성에 이바지하고 선의 부분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외가 죽음의 단계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대자적 측면을 소멸시키지는 못하고 실체와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 못한다. 반면에, 국가권력 또한 보편적 국가권력일 뿐, 국가권력 자체의 대자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여기서 언어가 등장한다. 언어는 발화하면서 자아를 현실에 내놓고 경청되면서 자아는 타자들에게 보인다. 그리고 언어가 효율적이라면 타자가 국가권력의 선함을 받아들이고 국가권력에 봉사하게 된다. 그리고 언어는 군주를 국가권력의 정점으로 만든다. 경청된 언어는 아첨의 언어가 되고 군주는 힘을 고귀한 의식은 부를 얻게 된다. 동등성을 사유의 형식으로 삼았던 자아는 아첨의 언어를 통해 비동등성이 자신의 형식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국가권력 또한 현실에서는 힘을 가지고 휘두르지만, 자신을 보좌해 주는 귀족들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비본질적 실체임을 깨닫는다.


실체의 또 다른 형식인 부 또한 국가권력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아첨을 통해 군주로부터 부을 얻은 고귀한 의식은 부에서 본질을 얻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첫째, 부는 다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기에 자체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매개에 불과하다. 둘째, 국가권력과 마찬가지로 부는 외부의 우연성에 의지한다. 시장 상황, 법 또는 군주의 변덕에 부를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게 된다. 셋째, 나는 부를 소유했다고 믿지만 실은 부가 나를 소유하게 된다. “정신현상학”에서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부가 본질이 없기 때문에, 부를 통한 향유 또는 소유에서 만족을 느낀다. 이런 만족은 계속해서 더 큰 크기의 부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부에 대한 만족은 그 크기에 비례하고 타자가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으면 나는 타자가 누리는 본질에 비해 적은 본질만을 소유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의 특성에 의해 주와 객은 전도되고 고귀한 의식은 부의 노예가 된다.


이처럼 국가권력과 부가 자기모순이 있음을 깨달은 고귀한 의식은 저열한 의식과 하등 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고귀한 의식과 저열한 의식 모두 분열된 의식이 된다. 분열된 의식은 ‘라모의 조카’에서 처럼 세상을 조롱하는 화려한 변설가로 등장한다. 이는 국가권력 뒤에 숨은 폭력을 부 뒤에 숨은 비굴함을 여과 없이 폭로한다. 정직한 의식은 고정된 선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통속의 디오게네스의 냉소조차 사회와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디오게네스가 매개가 되어 부와 국가권력의 허망함을 밝혔다는 뜻) 이러한 분열된 의식은 정신의 운동을 설명해 준다. 고정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바뀌는 전도된 세계의 춤 속에서 의식은 ‘자유로운 사유’의 힘을 얻게 된다. 단순히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고, 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얻음으로써 간과할 수 있는 비굴함도 조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의식의 단계에서 전도된 세계와 불행한 의식에 대응한다. 이 세계에서 본질을 찾지 못한 의식은 불행한 의식은 피안에서 본질을 찾으려 주관종교로 귀의한다. 반면에, 이런 분열을 통해 도달한 분열된 의식은 피안에서 종교를 찾으려는 객관적 신앙과 자기로 돌아와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고 자기 안에서 세상을 찾으려는 계몽으로 나뉘게 된다.



(3-2) 도야의 세계의 의의

도야의 세계는 헤겔의 의식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드러나는 장이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자기 동일성에서 본질을 찾으려고 했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의 존재에서,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의 집합인 ‘선험적 통각’이 자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헤겔에게 ‘나=나’는 현실성이 결여된 추상적 자아에 불과하다. 자아가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도야를 통해 자기의 직접성을 덜어내고 현실에 존재하는 실재에 다가서야 한다. 이러한 소외의 과정을 통해서만 자아는 실재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헤겔의 자기의식에서 논했던, 타자존재의 필수성에서 유래한다. 나는 나를 바로 바라볼 수 없기에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타자를 통해서만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나는 실재를 통해서만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나와 같다. 그리고 실체는 각 타자의 특수성 모두를 포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체는 모든 타자들의 공통된 지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는 자기의 특수성을 희생함과 동시에 실체를 공유하고 그리고 실체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체를 통해서 보이는 나” 사이의 괴리는 우리의 의식을 만족할 수 없는 불행한 의식이 되게 한다. 여기서 헤겔은 종교가 의식의 발명품임을 보여준다. 의식은 나와 세상의 일치에서 만족을 느끼는데, 이런 만족을 느낄 수 없게 형성된 사회는 의식이 스스로 종교라는 현실의 도피처를 형성하게 만든다.


또한, 헤겔의 “자기 소외”를 통한 실체의 동일화는 “사회 계약론”을 설명할 수 있다.


장이폴리트에 따르면 헤겔은


“우리는 마치 시민들이 모여서 숙고한 것처럼 그리고 마치 다수표가 일반의지를 창출한 것처럼 일반의지의 구성을 상정한다.”


라고 사회계약론의 무비판적 필연적 운동을 비판했다. 이는 피히테와 셸링이 의식을 철학적 의식으로 출발점을 삼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제까지 야만적으로 서로 싸우던 개체들이 어떻게 사회계약론에 동의할 것인가? 장이폴리트의 책에는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내 생각에 서로 싸우던 개체들은 상호인정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특정 개체게 사회계약론이라는 사상 자체를 만들었고 이는 다양한 개체들이 “자기 소외”를 통해 이 실체와 동일화시키게 만들었다. 이처럼 헤겔의 자기의식의 상호인정과 사상 자체라는 개념을 이용하면 설명가능하다. 또한 사회계약론이란, 부와 국가권력 모두 본질적으로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들이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 헤겔은 도야의 세계에서 선과 악이라는 판단이 붕괴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사회계약론에 정신이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사회계약론은 개체가 국가권력 혹은 부에 부여한 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국가권력과 부에서 만족을 느끼는 개인이 어떻게 자기를 희생하는 사회계약론에 동참하는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하지만, 국가권력과 부 모두에서 동일성과 본질을 찾지 못한다면 상호인정을 통해서 동일성을 찾고 본질을 찾으려는 정신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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