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을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로 읽기

실전과 전체사이에서

1. 서론

앙드레말로는 인간실존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를 한 작가이다. 그는 “인간의 조건”, “왕도”등의 작품을 통해 유한성에 의해 내몰린 인간의 고뇌와 선택에 대해 묘사했다. 앙드레말로는 특히 자본주의에 의해 내몰린 인간의 고통과 뒤틀린 삶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파악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보다는 인간이 거대한 역사적 수레바퀴 속에서 어떻게 '부속품'이 아닌 '주체'로 남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특히 “인간의 조건”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첨예한 대립이 역사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1927년 중국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한때 협력했지만, 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노동조직이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동맹은 급격히 붕괴했고, 혁명은 내부의 분열과 숙청, 공포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말로는 이 ‘역사의 균열’ 속에서 개인들이 어떤 선택을 강요받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떻게 집단의 운명과 충돌하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우리가 오늘 다룰 “인간의 조건”은 1933년에 발간되었지만, 지금 꼭 읽혀야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번영과 발전의 시대를 뒤로 하고 지금의 세계는 갈 길을 잃어가고 있다. 성장이 멈춰 선 지금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노동자들과 청년들이다. 그들의 느끼는 고통은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가 고통스럽게 바라보던 세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들처럼 테러리스트로 내몰리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내리는 선택의 기로는 지금 세대와 기득권 층이 맞닥뜨린 선택의 기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조건”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야 할 주제를 다루고 있다.


2. 줄거리

“인간의 조건”은 기요, 첸 그리고 카토프라는 가상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의 맞닥뜨린 현실과 그 안에서 실존적 선택이 소설의 핵심동력이다.


당시 상하이는 자본주의가 깊숙이 스며들었고 중국인 노동자들은 긴 노동시간 그리고 비인간적 대우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에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는 장제스에 저항해 공산주의의 깃발로 중국인민들을 해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벌 토벌이 끝나고 장제스는 압도적 무력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총구를 돌렸다. 이에 이들은 무력으로 장제스에 대항할 계획을 세운다. 첸은 무기 선적/인도를 가능하게 하는 문서를 빼앗기 위해 표적을 암살하고, 그 문서를 통해 혁명 세력이 무기를 확보하도록 만든다. 그 후 이들은 경찰과 군대와 싸운다. 이런 소모전은 충분치 않고 장제스가 혁명의 최대 장애물로 본 첸은 장제스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하고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후 기요와 카토프 둘은 장제스의 군대에 잡히고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감옥으로 보내진다. 수감자들은 산 채로 불에 태워질지 모르는 상황에 놓이고, 기요는 미리 가지고 있던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고 카토프는 자신의 청산가리를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인간의 조건』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읽고자 한다.

첫째,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실존(개별의 결단)과 전체(집단의 운동)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본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개념과 헤겔의 정신 개념을 대비하되,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두 힘이 긴장 속에서 결합하며 역사가 움직이는 방식임을 밝히고자 한다.

둘째, 체계가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방식을 살펴본다. 나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중심으로 논의하되, 동시에 공산주의 역시 하나의 체계로서 인간을 수단화할 위험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함께 검토할 것이다.

3) 역사의 원동력: 실존과 역사

3-1) 헤겔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정신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 안에 형이상학적 헤겔과 비 형이상학적 헤겔이 둘 다 읽히겠지만 오늘은 이 보다는 역사의 발전이라는 부분에 논점을 한정 짓겠다. 헤겔에게 있어 역사는 개체가 아니라 종에 의해 형성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정신에 대해 먼저 논의해봐야 한다. 정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한 사회가 공유하는 규범과 문화, 제도와 관습, 그리고 개인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집단적 자기 이해의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 『정신현상학』은 개별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충돌·재구성되는지를 따라가며, 그 과정에서 ‘보편’이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제도 속에서 형태를 갖추는 운동을 보여준다. 따라서 역사의 생성은 규범의 생성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 규범에 따라 행동하던 개체들이 모순을 만났을 때, 모순을 넘어가지 위해 행동하고 이는 역사로 현현한다. 영웅들은 역사의 생성에 중요하지만, 그 영웅들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다. 역사적 영웅의 부재는 역사의 종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웅의 출현을 말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역사적 전개는 모순과 충돌을 피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고통이 동반되기 쉽다. 다만 그 고통이 언제나 정당화되거나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기보다, 헤겔이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 사회가 스스로의 모순을 자각하고 새로운 규범으로 재구성해 나가는 운동이다.



3-2)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역사관을 개체의 상실로 비판한다. 헤겔은 전체로서의 진리에 집착한 나머지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실존의 고통과 삶을 사상해 버린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개인의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믿음의 아이콘인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는 도덕적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어주겠다는 하느님과의 약속과도 어긋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세상의 기준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행동한다. 바로 그때 천사가 내려와 아브라함의 행동을 멈추고 양을 내어준다. 모든 인간은 유한성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도록 저주받았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에 작동하는 기준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단독자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결단이야말로 실존을 성립시킨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역사’란, 지배적 규범이 균열 나고 다른 규범이 자리를 잡는 전환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지배적인 규범의 파괴와 새로운 규범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믿지 않고 사회적 규범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면 역사는 멈춰 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헤겔의 역사관에 대립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영웅의 존재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같은 상황에서 역사를 이끌어갈 영웅이 내렸던 선택을 타자가 내릴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그 영웅이 존재는 역사의 추동에 필수적인 요인이다.



3-3)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은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가 같은 상황에 처해있지만 다른 실존적 선택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3명의 선택 모두 단독자의 책임이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린다.


먼저, 첸은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그는 종교학교에 보내지고 종교적 가르침을 받지만 장제스에 대항하고 테러리스트로의 길을 간다. 첸에게 있어서 삶의 목표는 행복이나 자아실현이 아니다. 첸에게 살인은 목적이 아니라, 유한성과 공포를 넘어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극단적 방식이다. 그가 테러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결단은 그의 동지들 뿐만 아니라 공상주의 수뇌부들도 반대한다. 그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지만 그는 선택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의 행동은 분명 그를 아는 지인들과 그의 이야기를 들을 후손들에게 큰 감명을 줬을 것이다.


기요는 학자 아버지와 아내를 가족으로 두고 있다. 그 또한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와 아내의 존재는 그가 첸과 다른 선택을 하도록 한다. 물론 의도적으로 아내를 미뤄내고 자기는 감옥에 가고 죽음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사형당하기 직전, 경찰 수뇌부로부터 배신하기를 요구받지만 이를 거부하고 숨겨둔 청산가리를 사용해 죽음을 맞이한다.


카토프는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을 가진 인물이다. 카토프는 이미 사형대에 섰지만, 우연히 사형을 모면하고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의 향후 행보는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쓰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고 교전 중 부상당해 체포당한다. 기요와 다르게 그는 자신의 청산가리를 자신보다 불안해하는 동지들에게 나눠주고 살아있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리라 마음먹고 죽음을 당한다. 카토프의 마지막 행위는 삶에 대한 긍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관념적 공산주의가 동지애로 치환된 순간이다. 청산가리를 나눠주는 그 순간 카토프에게는 이념보다는 옆에서 떨고 있는 동지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 된다.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는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영웅의 삶을 산다. 다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영웅’은 행위의 옳고 그름을 면죄해 주는 칭호가 아니다. 말로가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정당하다는 명제가 아니라, 정당성의 언어가 무너진 세계에서 인간이 자기 선택의 대가를 스스로 감당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영웅이란, 이순신 장군처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영웅은 지배적 규범의 부당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보다는 타자의 인간의 조건을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3명 모두 자신의 목숨을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바친다. 여기서 우리는 개체와 보편의 상호침투를 볼 수 있다.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는 가족이 먼저라는 핑계로, 누구는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서 혹은 죽음이 두려워서 규범을 따르거나 혹은 무관심하게 산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이를 비난할 수 없다. 인간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가족의 안위를 누구보다 중요시 여기는 존재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고통과 비난을 받아들이고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개인이 있기에 역사는 발전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헤겔의 역사의 진보의 필연성은 개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고통에 직면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개인이 없다면 역사의 진보는 없을 것이다. 이들의 고통과 고뇌를 운명이나 비극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대체될 수 있다는 주장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역사의 영웅들에게 지고 있는 빚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로서의 결단이라는 접근도 충분치 못하다. 물론 영웅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진다. 하지만, 영웅이 결단만으로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영웅의 결단이 보편을 움직일 때만 역사는 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결단이 보편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을 사회 상황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행동에 대한 정당성은 그 행동의 파급력에 있다.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때, 개인의 희생은 그냥 작은 희생에 불과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동문제로 고통받고 그 파급력이 인정되었을 때만 개인의 고뇌와 결단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의미 있는 행동으로 집단은 움직이고 사회라는 캔버스에 유의미한 낙서를 할 수 있다. 그 낙서가 전체그림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낙서가 쌓이고 쌓이면 작품 못지않은 힘을 가지게 된다.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의 행동 또한 사회에서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감정이 그들에게 힘든 선택을 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들리는 신음과 고통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은 지금 사회의 산출물이다. 이 산출물 없이는 그들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행동에 감화되어 행동하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운동은 실존도 전체도 아니다. 실존과 전체의 적절한 조화만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아닐까? 말로의 “인간의 조건”은 개인의 결단이 조직/연대/규범으로 확장될 때만, 비로소 역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4) 체계와 인간의 비인간화

4-1) 자본주의

인간의 조건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다. 말로가 그리는 상하이에서의 자본주의는 가혹하다. 14시간이 넘는 시간을 노동에 할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삶을 보여주면서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의 행동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문제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를 스스로 봉합하면서 지금껏 살아남았다. 공산주의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던 러시아와 중국마저 자본주의를 채택했다는 것은(물론 국가주도의 자본주의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시장과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시장참여자의 행동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이 더 크다) 자본주의는 분명 우월한 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이런 문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해 보자. 말로는 이 문제를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하이’라는 공간에서 돈·권력·욕망이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지워버리는지(노동자, 경찰, 혁명가, 부르주아의 시선까지)로 보여준다.


첫째, 자본주의는 우리가 기댈만한 자체적 본질은 가지지 못하고 매개적인 유용성만 가진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부의 공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본질은 삶에 안정감과 의미를 주기에 의식은 본질을 추구한다. 부가 인간의 목적이 되기 전까지 종교나 국가가 본질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도야의 세계에서 부가 본질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고 의식은 부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부는 매개적 가치만을 제공한다. 부는 그 자체의 의미는 없다. 부는 다른 어떤 것을 소비하기 위한 매개로서 작용하거나 혹은 그 양적인 크기로 평가되어 타자와의 비교에만 사용된다. 그래서 페랄-발레리의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부로 욕망을 사는 관계다. 말로는 페랄을 통해서 인간관계까지 매개물로 바꾸는 순간을 보여준다.


본질적 가치는 무한하다. 본질을 보고 그 가치를 나누는 모든 사람들은 본질을 같이 소유할 수 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그 가치를 추구한다면 이는 더 의미 있는 가치가 된다. 하지만 부는 다르다. 부는 매개와 비교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유한하다. 매개적 부는 향락에 사용되는 물질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만족은 수확체감의 법칙에 따라 더 많은 물질을 요구한다. 하지만 물질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은 물질을 가지기 위해서는 타자의 물질을 빼앗거나 혹은 타자의 노동력을 착취로 기울어지기 쉽다. 비교를 위한 부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를 소유해도 행복하지 않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나보다 부를 덜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페라리가 가치가 있는 이유는 누구나 가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옆 차선에 캐스퍼를 운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계층은 부의 증진을 위해서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왜냐하면, 착취를 통해 더 많은 부를 산출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비본질적 가치라는 점에서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다.


둘째, 기요의 아버지는 “인간의 조건”에서 “자본주의는 조직을 만드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의식이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체제 또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의식과 자본주의는 서로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둘은 부에 본질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담스미스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이기심은 본성”과 “경쟁은 자연법칙이다”등의 자연적 법칙화로 본질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2가지 문제가 있다.


가) 이기심과 경쟁이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가져온 개념에 불과하다. 아담스미스는 이기심을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정당화한 듯이 보이지만,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타자를 위하는 마음이 필요성을 역설했다. 따라서, 아담스미스의 이기심은 나의 욕구를 채우려는 감정일 뿐, 타자를 파괴하고 착취하는 정도의 이기심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기심 없이 잘 살아가는 지역사회를 목격할 뿐만 아니라 원숭이 같은 동물들도 이타적이라는 연구/관찰이 보고된다.


나) 자본주의의 자연화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인간의 발전은 물질적 발전에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소여 된 조건들을 넘어서고, 이타적인 행위를 할 때 발전했다고 말한다. 노예제도 폐지, 일부다처제 폐지, 민주주의 헌법의 설립등을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자연화는 아직 자본주의가 소여 된 조건들에 만족하고 있다고 스스로가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승자는 자연적 법칙을 따름에 지나지 않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법칙에 수요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공급을 해낼 때 큰돈을 벌 수 있다. 물론 공급을 원활히 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혁신과 기술발전을 도모하지만 이는 자연법칙 안에서의 발전일 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 타자에 대한 착취로 이어진다면 이를 어떻게 진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4-2) 공산주의

하지만 공산주의조차 답이 될 수 없다. 20세기 최대 규모의 공산주의 국가 실험이었던 소련 체제는, 경제적 성과와 별개로 기아와 공포정치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남겼다. 구소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기아와 공포정치로 많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생명을 앗아갔다. 몇몇 사람은 이를 공산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독재의 실패라고 말한다. 실제로 소련과 중국은 독재체제였고 이들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인간의 조건”에서 묘사된 소련의 공산당과 중국의 당 지도자들은 인민의 권리보다는 본인들의 이득을 우선시한다. 자기들의 안위 때문에 첸이 테러를 막을 뿐만 아니라, 장제스와의 협력이 인민에게 어떤 의미인지 뻔히 알면서도 한자리 차지하려는 욕심에 이를 주선한다. 정말 과거 공산주의의 실패가 독재의 실패라면 공산주의 실험은 행해진 적이 없고, 반드시 한 번은 겪어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이런 견해에 강력한 반론을 한다. 말로가 그리는 상하이의 공산주의 역시 ‘해방의 언어’와 별개로, 조직의 생존과 권력 계산이 개인을 소모시키는 장면들을 통해 체계의 그늘을 드러낸다. 그는 공산주의는 체제의 문제로 인해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국유화를 통해 재화의 공동 소유를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재화의 차별적 분배를 통해 개인의 일할 욕구를 자극한다면, 공산주의는 재화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한다. 그들은 재화는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필요에 의한 분배는 개인이 혁신하고 일할 동기를 파괴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하이에크의 주장은 이보다 더 구조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필요”는 매우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이 더 “필요”한 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육체적 필요인지, 정신적 필요인지 혹은 단기적 만족인지 장기적 발전인지 처럼 다양한 기준이 제시될 수 있다. 이 기준은 시민들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정치인들이 제시해야 한다. 재화란,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없지만 소유자들에게는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이득을 준다. 따라서, “필요”의 기준을 제시하는 공산주의 하의 정치인들의 힘은 막강하다. 이는 정부와 개인뿐만 아니라 정부의 지방자치단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정치인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처음에 뽑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부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계 정부의 부재는 공산주의의 존재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필요”에 의한 분배가 개인의 일할 동기를 파괴하는 것은 명백하다. 물론 자아실현이나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지속적으로 생산성을 낼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국가의 경제력은 국방력으로 직결된다. 군대의 크기, 기술의 도입등은 돈이 없으면 근대화시킬 수 없다. 이는 국가의 존립에 큰 위협이 된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정당성 없는 침략은 허용되지 않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중국의 동중국해 위협등을 보면 맘 편히 놓을 수만은 없다. 세계정부가 없기 때문에, 국방력이 뒤쳐진 나라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권력은 없고 모든 국가들은 경쟁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공산주의를 통해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이타적 국가를 이룩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나라들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체의 문제를 가질 뿐만 아니라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존속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4-3) 대안은?

따라서, 대안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다. 진정한 대안은 정교한 시스템이 아니라, 시스템이 감히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주체성을 민주주의의 심장에 다시 이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살고 있고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시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들이 합리적 선택을 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에게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채찍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당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의 합리적 선택에서 실존이 빠질 수 없다. 위에서 나는 키에르케고르를 따라 실존이 단독자의 선택과 책임이라고 정의 내린 바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유한성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내릴 수 없는 이유임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나는 실존이란,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지배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이기적인 결정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나는 역사의 발전을 전체의 움직임 혹은 실존의 선택만의 것이 아니라고 이미 주장했다. 이 둘의 조화만이 우연한 개인들의 결단이 엮어내는 역동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의 조화는 실존적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발 벗고 참여할 때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시스템 또한 완벽하지 않다.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개인을 사물화 하는 상황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따라서, 필요한 건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벗어던지 실존의 행동이다. 물론 첸, 기요 그리고 카토프와 같은 희생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사물화에 반대하고 스스로의 가치에 따라 행동할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서 살아 숨 쉬는 타자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행동 또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매일매일의 노력들이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우리를 과감하게 행동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행동한 고귀한 실존의 희생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26년 알고리즘과 도파민의 폭발 그리고 성과 만능주의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인간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이다. ‘인간의 조건’은 거창하게 들리지만 거창하지 만은 않다. 타자가 인간임을 인식하고 "타자의 신음소리에 응답하는 그 찰나의 연대야말로,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기를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유일한 '인간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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