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불평등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불평등의 시대.” 우리는 과연 정말 그 시대에 살고 있는가?

1980년 이후 미국 상위 1%의 세전(pre-tax) 소득 점유율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유럽에서도 상위 소득층의 몫은 뚜렷하게 확대되었다. 이런 통계는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결론을 낳는다. 부자 증세, 더 강한 재분배, 그리고 ‘Robin Hood state’의 귀환이다.

뉴욕의 새 시장 Zohran Mamdani는 연소득 100만 달러 초과자에게 추가 2% 소득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억만장자 자산에 대한 “일회성 5% 부유세”를 투표에 부칠 가능성이 거론된다. 프랑스에서는 부유세 부활 논쟁이 이어지고 있고, 영국에서도 고소득자 과세 강화가 정치적 의제로 부상했다. 한국에서도 부동산·법인 과세를 둘러싼 논쟁이 되풀이되며, 정부 차원에서 세제 강화를 시사하는 발언과 정책 신호가 등장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고소득층이 지나치게 많은 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불평등의 시대”라는 진단은 정의롭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정말 ‘재분배가 부족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상당히 재분배된 세계에서, 더 강한 Robin Hood를 요구하고 있는가? 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그 비용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된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주요 도시의 주택가격은 상상을 초월하고, 자산시장 상승은 체감 격차를 더 크게 만든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1980년대 미국 상위 1%의 세전 소득 점유율은 약 9%였지만, 2022년에는 약 16%로 상승했다. 유럽도 8%에서 12%로 증가했고, G7 평균 세전 지니계수도 상승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반쪽짜리일 수 있다. 불평등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얼마나 벌었는가(세전)”만이 아니라, **세금과 이전지출 이후의 분배(세후)**가 어떻게 달라졌는 가다. 세후 소득 불평등을 보면 G7의 다수 국가는 지니계수가 안정되거나 하락하는 흐름을 보인다. 영국은 세후 불평등이 약 3% 포인트, 프랑스는 약 4% 포인트 낮아졌다는 추정도 있다. 미국 역시 세전 불평등은 크게 확대됐지만, 세후 지표로 보면 장기적으로는 상당 부분 상쇄되어 “불평등이 계속 직선적으로 악화됐다”고만 말하기 어렵다.

한국도 비슷한 긴장을 안고 있다. 시장소득 기준(세전) 지표는 악화 압력을 받아왔지만, 조세와 이전지출을 반영한 분포는 일정 부분 완화되는 흐름이 관측된다. 동시에 한국의 세수 구조는 상위 소득층에 크게 의존한다. 상위 1%가 소득세의 약 40%를 부담한다는 공식 보고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상위 1%가 소득세의 약 40%를 부담하며, 영국에서는 상위 1%가 소득세 세수의 약 27%를 차지한다는 분석이 제시된다.) 이처럼 이미 상당한 수준의 재분배가 작동하고 있는데도, 왜 ‘더 강한 Robin Hood’ 요구는 계속 커지는가.


그렇다면 체감 불평등은 왜 더 커지는가. 한 가지 단서는 소비(consumption)다. 많은 선진국에서 대량생산과 기술 발전은 필수 소비재의 가격을 낮추고 보급을 확대해, 소득 격차가 곧바로 ‘생활필수 소비의 격차’로 이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예컨대 1970년대 한국에서 컬러 TV는 이웃이 모여 보던 고가재였지만, 오늘날 TV는 대부분 가정에서 ‘기본재’에 가까워졌다. 이런 변화는 생활수준의 최저선을 끌어올리면서, 소득 불평등의 일부를 체감상 완충한다.


그러나 자산(wealth)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자산 가격은 유례없이 오르고, 특히 “모두가 원하는 자산”—예컨대 서울 한강변 아파트나 뉴욕 맨해튼 부동산 같은 상징적 자산—은 월급소득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대로 올라서며 격차를 고착시킨다. 자산 격차가 핵심 문제라면, 질문은 다시 바뀐다. 그 격차는 과연 ‘부자 증세’만으로 해결 가능한가? 세수 규모의 한계, 회피·이동성, 성장·혁신에 대한 부작용까지 고려하면, 단순히 “더 걷자”는 구호만으로는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세금 논쟁의 기준을 다시 물어야 한다. 세금의 기준은 “사회가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만으로 결정될 수 없다. 세금은 재원을 마련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경제의 유인을 설계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 기준은 “더 걷고 싶다”가 아니라, 얼마까지 걷어도 경제의 동학(노동·투자·혁신)을 과도하게 훼손하지 않는 가다.

이 지점에서 첫 번째 기사(리더/커버 패키지)가 던진 경고는 구체적이다. 소득세율이 1% p 높아지면, 향후 3년 동안 특허를 출원할 가능성이 약 0.6% p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게다가 혁신가가 창출한 가치의 대부분은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혁신가 본인이 가져가는 몫은 매우 작다는 추정(예컨대 약 2%)도 제시된다. 요약하면, 세율 인상이 혁신을 줄이는 순간 사회 전체 손실은 개인 부담보다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 세대의 체감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미래 세대의 성장 동력을 잠식하는 선택이 되는지, 적어도 이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다.

물론 반론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 반론들이야말로 ‘Robin Hood state’ 논쟁이 감정이 아니라 숫자와 구조로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반론 1) “부자들은 어차피 세금을 피해 간다”

이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다. 특히 극상 위(0.01%)가 소득의 상당 부분을 자본이득으로 얻고, ‘buy, borrow, die’ 같은 전략을 쓴다는 서사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 논쟁이 생각보다 단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buy, borrow, die’는 미국에서도 *소수의 행태”라는 연구가 소개된다.


매우 넓은 범위(임금·이윤·자본이득·상속까지)로 실효세율을 추정한 분석에서는, 상위로 갈수록 전체 소득 대비 세 부담 비중이 더 높아진다는 결론도 제시된다.


그 분석에서는 상위 0.01%가 전체적으로 약 50% 수준의 세 부담을 진다고 추정한다.


“상위 400명은 세율이 매우 낮다”는 유명한 주장에 대해서도, 가족·분산 구조를 반영하면 실효세율이 40%에 가깝다는 재추정이 소개된다.


즉, “부자는 안 낸다”가 전부 참이라면 더 걷는 것이 항상 정답이어야 하지만, 실제 데이터는 더 복잡하다. 핵심은 ‘회피를 막자’는 규범이 아니라, ‘추가 과세가 만들어낼 순효과가 무엇인가’다.


반론 2) “부자 증세는 기회 평등을 만든다”

이 논지는 원칙적으로 강하다. 교육·보건·기초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장기 성장에도 도움을 줄 수 있고, 그 재원을 누진적으로 마련하자는 주장 자체는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현실의 정치경제다. 지금의 부자 증세가 미래의 생산성(인적자본, 혁신 생태계)을 키우는 재정으로 연결되는가, 아니면 현재의 인기 지출로 소진되는가에 따라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서 논쟁은 “복지냐 반(反) 복지냐”가 아니다. 어떤 재정이 ‘미래를 늘리는 지출’이고 어떤 재정이 ‘현재를 소비하는 지출’인가다. 공교육·직업훈련·보육·기초의료 같은 기반 지출은 기회 평등을 넓히면서 성장에도 기여할 수 있다. 반면 지출이 단기 만족을 주는 방향으로 기울수록, “더 걷자”는 구호는 쉽게 ‘정의’의 언어를 빌린 ‘현재 소비’가 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더 걷을 것인가”가 아니라, *걷어서 무엇에 쓸 것인가”다.


여기까지 오면 결론은 단순해진다. 우리는 불평등을 분명히 보되, 불평등을 말하는 지표를 분리해야 한다. 세전 소득 불평등, 세후 소득 불평등, 소비 격차, 자산 격차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그중 자산 격차가 핵심이라면, 해법 역시 “부자에게 조금 더”라는 직선적 처방이 아니라, 규모·회피·유인·지출의 질을 포함한 훨씬 복합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Robin Hood state’는 정의롭게 들린다. 그러나 정의로운 언어가 언제나 좋은 정책 설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참고기사:

https://www.economist.com/leaders/2026/02/19/dont-go-after-the-rich-to-fix-broken-budgets


작가의 이전글왜 실존주의가 아니라 헤겔인가: 『칼의 노래』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