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실존주의가 아니라 헤겔인가: 『칼의 노래』 읽기

이순신은 용기가 아니라 자유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왜의 침입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낸 명장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존경의 대상이다.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서있는 그의 동상은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찬사는 거북선, 용맹함 그리고 충의 등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김훈은 “칼의 노래”를 통해 전투와 거북선보다는 이순신 장군의 내면에 집중한다. 그는 흔들림 없어 보였던 이순신 장군이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그의 아들 면과 여진 그리고 어머니를 통해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었던 이순신 장군이 가졌을지 모르는 조정에 대한 감정 또한 묘사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그의 감정은 분노보다는 측은지심에 더 가깝다. 역사의 영웅이 초인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역사적 영웅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그리고 그들 또한 흔들렸음을 보여주는 것이 삶의 목적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의 세대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이순신을 보여주는 소중한 작품인 김훈의 『칼의 노래』를 ‘영웅 숭배’가 아니라 ‘인간이 보편을 매개하는 형식’으로 읽어보려 한다.



(2) 헤겔로 읽는 “칼의 노래”: 왜 실존주의가 아니라 관념론(보편–개별의 매개)인가?

칼의 노래는 선조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끝내고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1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명량해전에서 대승하고 본국으로 퇴각하는 일본 해군을 끝까지 쫓아 섬멸하고 전사한 노량해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보통 사람들은 겪지 못할 고초를 겪고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을 죽이려 한 조선을 왜로부터 구해낸 영웅이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실존적 결단으로 조선을 구했다는 생을 실존적 인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실존주의 사상은 이순신 장군(이하 이순신)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첫째, 실존주의는 세상의 보편적 가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의 결단과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등에서 잘 나타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당시 지배적인 관념인 “충의”를 내세우고 결정을 내린다. 이는 보편에 맞서는 개별보다는 보편을 세우려는 개별의 움직임으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둘째, 실존주의는 개인적 선택으로 개인의 삶을 조명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13척으로 133척의 적을 상대한 명량해전에서부터 시작된 해군들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순신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이순신의 보편성의 추구와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을 보여주는 그의 삶이야 말로 공포에 떨고 있던 해군들을 감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셋째, 이순신에 대한 실존주의적 평가는 이순신의 업적을 폄하한다. 그의 생각은 실존보다는 항상 민초로 향했다, 물론 이순신 또한 군율을 세우기 위해 민초를 배고 곤장질 했지만 그는 한 번도 본인의 실존성이 민초를 향한 보편성을 배신한 적 없다. 이에 이순신 장군의 신격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 글은 『칼의 노래』를 개인의 용기나 심리의 서사로 읽지 않고, 보편과 개별의 긴장 속에서 자유를 매개하는 관념론적 구조로 읽고자 한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용기보다도, 유한한 조건을 승인하고 그 조건 속에서 보편을 현실로 만들려는 자유에 있다.



(3) 이순신의 위대함: 용기가 아니라 “매개된 자유”

이순신은 용기의 대명사로 불린다. 13척의 배를 가지고 133척의 적군에 전투에 임하는 그의 모습, 그리고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아직 있습니다.”를 통해서 보여준 그의 자신감 그리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면 살 것이다.”라는 그의 결의에 찬 외침은 용맹한 장군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용기 만으로는 이순신 장군을 평가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으로부터 해군 통치권을 넘겨받은 뛰어난 지휘관은 아니지만, 용맹스러운 장수로 묘사된다. 개인의 무용을 평가할 때도, 무모한 선택을 내렸을 때도 우리는 용기 있는 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용기는 이순신의 핵심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이순신의 자유가 이순신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외부 조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보편(제도·질서)을 ‘나의 행위’로 승인하고 그 안에서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행위를 통해서 어떤 작품을 남긴다. 그것이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사상일 수도 있다. 세상에 개별적 존재인 사람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기면서 영원히 살기도 하고 인정받기도 하기 때문에 헤겔에 따르면, 개체는 자신의 작품이 현실세계에서 실현될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세상은 개체가 남긴 작품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세상의 실체(법, 제도, 건물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체가 자신이 만들었음을 알지 못하고 실체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헤겔은 인간이 실체의 주인임을 깨닫고 이를 제약이 아니라 본인의 실현해야 하는 목적의 수단으로 파악할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런 면에서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선조에게 받은 고초, 일본의 침입 그리고 13척밖에 남지 않은 배, 이것들은 이순신에게 제약을 제약으로만 두지 않았다. 이는 이순신이 속한 조선이라는 공동체의 작품이고 그가 자신의 의무를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발판이었다. 그는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을 파악하고 끝내 본인의 의무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유한성을 초월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한성의 압력 속에서 형성되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을 신격화하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아들 면의 죽음 앞에서 흔들리며, 여진을 떠올린다. 전장의 영웅 이전에 그는 가족을 둔 인간이다. 그에게 전쟁은 추상적 의무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사적인 감정과 충돌하는 현실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초연한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물적 목숨의 끝장을 두려워했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 고백은 영웅의 언어라기보다 한 인간의 언어에 가깝다.


고하도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지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흔들리고,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인간. 자유는 이러한 상태를 제거한 뒤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상태 속에서 형성된다. 유한성은 자유의 부정이 아니라, 자유가 매개되는 조건이다. 이순신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속한 보편을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아들, 개인적 상실과 분노는 그를 무너뜨리는 대신 오히려 민초의 고통을 이해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유한성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유한성을 끌어안은 채 의무를 선택했다. 이 지점에서 그의 자유는 단순한 용기와 구별된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보편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행위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하다. 병사들이 본 것은 초인이 아니라, 유한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보편을 실현하려는 한 인간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편을 매개하는 자유는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결단이 아니라, 그 결단을 받아 실행하는 타자들의 연쇄 속에서 보편은 현실이 된다.『칼의 노래』가 보여주는 보편은 ‘한 사람의 내면’만으로 현실이 되지 않는다. 『칼의 노래』가 보여주는 보편은 이순신 한 사람의 위대함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이순신은 김수철에 대한 신뢰를 자주 보여준다. 이순신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김수철 같은 부장들이 이순신의 명령을 따르고 실행하지 않으면 이순신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면에서, 김수철과 같은 이름 없는 부장들이 찬사 받아야 마땅하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목표에 대한 확신이 있을 경우에 행동에 옮기기 쉽다. 그리고 이순신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승리에 대한 보상인 부와 명예 또한 행동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반면에 김수철은 이순신만큼의 능력도 없고 승리에 대한 확신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전쟁에 승리해도 장군만큼의 부와 명예가 보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수철은 항상 이순신을 보좌한다. 특히 이순신이 선조에게 끌려갔을 때, 머리를 땅에 찍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순신의 사면을 간절히 바랐다. 김수철은 이순신을 존경했고 행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선택에 직면한 인간의 고뇌와 책임이라는 면에서 김수철과 같은 이름 없는 무장은 뛰어난 장군들보다 더 값지고 찬사 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 보편이 움직이는 방식은 전장에서 ‘대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로도 드러난다


이순신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매개된 자유에서 유래한다. 모든 사람은 “나는 나를 파악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었던 통찰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대상을 통해 나를 파악한다.” 지금 나를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전투의 승리의 요인이다.


원균과 조선조정 그리고 명량해전에 임하는 일본군 장수는 자기를 규정해 줄 상대를 파악하지 못했다. 원균은 “원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고 아무도 말리지 못할 무서운 적의를 지닌 사내였다. 그 사내는 모든 전투가 자기 자신을 위한 전투이기를 바랐다” 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상대방보다는 자기에게서 자기를 파악하려고 했다. 조선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이에 조선 최고의 장수인 이순신을 파면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명량해전에 참가하기 전 일본군은 이미 조선전체를 자신의 상대로 파악하고 이순신을 상대로 보지 못했다. 반면에 이순신은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대상을 통해서 나를 파악해야 되는 지를 알고 있다. 이는 이순신이 표상적 사고가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모든 전투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승리한다.



(4) 언어와 권력 그리고 보편성:

“칼의 노래”는 언어의 힘을 잘 보여준다. 헤겔에 있어서 언어는 보편성의 매개다. 개별자들은 언어 없이는 보편적 힘과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타자와 교환하기 위해서는 같은 형식을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언어는 “행해져야 하는 것”을 언표 한다. 이는 언어의 폭력으로도 불릴 수 있지만, “행해져야 함”이 공동체의 역사로 인해 만들어진 거라면 폭력보다는 보편성의 표현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선조의 행위는 개인 윤리로는 비난할 수 있지만, 『칼의 노래』는 그것이 어떻게 보편의 언어 속에서 정당화되고 반복되는지를 보여준다.. 임진왜란으로부터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이순신을 투옥한다. 길삼봉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잡기 위해 충신들을 죽인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 그리고 수군들은 왕의 안위를 걱정한다.


“나는 임금의 교서를 장졸들에게 읽어주었다. 장졸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울었다.”


수군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시시때때로 이순신을 모함하려는 왕의 교서를 듣고 꿇어앉아 울었다. 그리고


“오늘 나라가 이지경이 된 것은 모두 류성룡, 이산해의 죄입니다. 바라옵건대 베어서 백성을 위로하시고 사직에 고하소서”


류성룡과 이산해는 바로 옆에서 선조를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성스럽다. 인간의 행동을 합리성으로 파악하려는 현대사회의 접근은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보편성 없이는 살 수 없다. 조선백성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 관습 그리고 이를 유지하는 교육적 기반은 조선왕조라는 공동체의 보편성의 결과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를 내면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의 얼” 혹은 “정신”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정신없이는 작은 나라도 유지할 수 없다. 조선의 왕이 가토의 목을 원하고 조선왕릉을 약탈한 일본인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인륜성”에서 제사가 인간의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정신을 회수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왕조는 조선 왕이 정신 위에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왕릉과 가토에 대한 집착은 조선왕조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왕의 울음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조선의 울분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일분군대에 분노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이에 이순신은 왕은 “울음과 말”로 싸우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류성룡과 이산해의 언어는 “아첨의 언어”이지만, 개별적 이득을 위한 아첨이 아니라 보편적 공동체에 힘을 더하는 아첨의 언어다. 조선의 왕의 힘은 이런 “아첨의 언어”에서 비롯된다. 아첨의 언어를 통해서 조선 양반들이 조정에 힘을 더하고 백성들은 언어에 귀감 되어 조정을 더욱 섬긴다. 이는 조선왕의 힘은 언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언어로 힘을 가진 권력은 더 많은 아첨의 언어를 만들면서 더욱 강해진다. 양반과 백성이 준 힘을 가지고 조정이 백성과 양반을 억압한다는 이런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권력과 힘은 죽은 실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운동이다. 길삼봉을 찾으려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본 이순신은


“임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라고 말한다. 이는 권력은 살아있는 운동이고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아첨의 언어”를 만들 수밖에 없고 타자를 위협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따라서, 권력은 우리가 주었지만 스스로 지키고 살아나가는 것이다.


“칼의 노래”가 보여주는 것은, 개인 윤리만으로는 공동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편이 있어야 개별의 행위도 현실이 된다. 문제는 이 보편이 스스로를 갱신하지 못할 때—변화의 사변성이 막힐 때—폭력은 더 반복된다



(5) 헤겔의 동양사상 비판과 조선

헤겔이 동양사상에서 문제 삼은 것도 바로 이 ‘보편의 갱신 불능’, 즉 사변성과 변화의 정지다. 헤겔은 동양 철학을 철학이 아니라고 폄하했고, 동양은 시간이 멈췄다고 비판했다. 헤겔은 편협하고 동양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헤겔의 동양사상에 대한 비판은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헤겔의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헤겔에게 있어 철학의 사변성, 즉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론하는 능력은 변화에 필수적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이야기하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변성이 없고 충, 효동의 사상만을 이야기하는 동양사상은 헤겔에게 있어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은 변화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쫓는다. 이 또한 변화의 운동을 가로막고 “한 사람만 자유롭다”는 그의 비난이 날카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헤겔은 그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헤겔에게 있어 전제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존엄을 짓밟는 일이다. 그리고 그의 동양사상에 대한 비판은 이런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 이것이 어떻게 동양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인가?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동양의 전제왕권에 대한 비판이다.


조선 또한 유교에 희생된 나라다. 조선은 유교로 인해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추구했다. 변화하지 않는 본질의 추구가 신과 같은 피안을 향했다면, 사변성으로 인해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었겠지만 조선에게 본질을 중국이었다. 시시 탐탐 자국의 이익을 위해 기회만을 노리고 백성들을 약탈하는 명의 군대를 천군으로 부르는 것에서 조선 철학의 경직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전체가 변화의 중요성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순신은 전투를 살아있는 생명으로 그리고 변화로 묘사한다. “적에 따라 나의 목적이 변하고 뭉쳐짐과 펼쳐짐이 변화해야 한다”는 그의 전투에 대한 시선은 헤겔의 비판이 정당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표상적 사고에 사로잡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정말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백성들로부터 시선을 저버린 그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변증법적 사고만이 보편을 위한 의미 있는 희생을 이끌 수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반대되는 두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실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기꺼이 둘을 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표상적 사고는 그들이 섬기는 표상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른 것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조선만의 과거사가 아니라, 보편과 개별의 관계를 오해하는 우리의 평가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표상적 사고는 조선시대에만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도 세상을 변화가 아니라 고정된 진리로 파악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부분만 떼놓고 해석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이순신의 죽음을 둘러싼 해석도 그 연장에 있다.



(6) 역사적 영웅의 과오: 보편과 개체의 비도덕성

보편과 개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우리는 가끔 역사적 인물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순수하게 무결한 행위가 아니면 역사적 영웅의 업적을 폄하한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노예를 소유했다고 비난하고 윈스턴 처칠이 인도 벵골 대기근 당시 식량을 통제하여 수백만 명을 굶어 죽게 했다며 그의 업적을 폄하한다. 물론 공과 사는 평가되어야 마땅하지만, 개별은 보편 없이는 행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인들을 통합하고 영국과 싸우고 헌법을 쓸 수 있었다. 처칠도 영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와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들을 이끌고 나치로부터 유럽을 구했다. 그들은 보편의 힘을 움직이기 위해 보편의 구성원이 돼야 한다. 위와 같은 과는 개별이 보편의 구성원이 되는 소외의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공과 사의 엄격한 평가이지 공에 대한 무한한 찬사는 아니다. 이순신 또한 마찬가지다. 이순신은 군법을 세우기 위해 백성을 배고 곤장을 쳤다. 특히 탈영병과 함께 도망간 딸에게 본래 자신의 배를 내어준 노인을 형틀에 묶어 곤장을 친 것은 윤리적인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또한 이순신이라는 개별적 자아를 버리고 공동체의 질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외화(Entäußerung)'의 과정 아니었을까?



(7) 죽음은 의무의 완결인가: 이순신이 말하는 '자연사'의 의미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리고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마지막 순간은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해석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나는 이순신의 죽음을 단순히 “인간적인 사정”으로만 환원할 때, 『칼의 노래』가 만든 죽음의 의미가 오히려 퇴색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에 손댈 수 있는가/없는가의 문제로 다시 규정되기 때문이다.


먼저, 이순신은 죽음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자연사”를 조금 다르게 사용한다. 백의 종군 하는 여정에서 자신을 힘겹게 태우고 이동하던 말이 죽자 그는 말이 “자연사”했다고 한다. “자연사”는 보통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삶을 살다 스스로 늙어 죽었을 때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말하는 “자연사”는 어떤 의미일까? 이순신은 이 세계가 자신이 창조했음을 알고 그 안에서 의무를 다하는 자유로운 인물이라고 이미 이야기했다. 그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조선을 왜로부터 구해야 하는 여정에 참여한 말은 그의 의무를 다한 것이고 “자연사”라고 부를만하다. 즉 ‘자연사’는 의학적 분류가 아니라, 의무의 완결을 가리키는 윤리적 언어다.


“온 바다를 뒤덮는 시체들 속에서도 한 사람의 죽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고백한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육체적 죽음과 정신적 죽음의 차이를 인지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육체적 죽음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정신이 살아있으면 공동체의 삶에 녹아들어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순신은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無內容)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라는 말을 통해서 생물학적 죽음은 감당할 수 있지만 정신적 죽음은 감당할 수 없음을 토로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무의미한 죽음은 두렵다. 내가 정신으로 남아 조선이라는 보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신으로 남으려는 의지가 꼭 전사로써 표현돼야 하는 것인가?


모든 인간은 유한성에 발목 잡힌다. 하지만, 이순신 같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유한성을 극복하고 의무의 달성이라는 본질과 합치할 수 있다. 헤겔은 불행한 의식과 도야의 세계가 종교와 신앙을 탄생시켰다고 했다. 인간은 유한성에 묶어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해 본질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본질을 찾기 위해 종교를 통해 절대자를 만들고 이를 통해 본질에 다다르고자 한다. 유한자와 본질의 합치는 절대자로 표현된다. 당시 조선 수군에게 이순신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병사들이 ‘보편이 아직 살아 있다’는 형식을 이순신으로부터 목격하지 않았을까? 갖은 고초를 겪고 13척의 배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본질에 다다르려는 그의 모습에서 종교와 같은 공동체의 힘을 느꼈고 이에 수군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순신과 같이 싸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매개된 자유가 이순신의 힘이자 위대함의 원천이다.



(8) 부활과 성령: 공동체의 정신으로 부활하는 영웅

헤겔은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절대지'에 도달하기 직전의 가장 완성된 종교 단계로 보았다. 종교가 자신의 의미를 완성하는 3단계를 이순신의 생애에 대입해 보면 놀라운 일치가 나타난다.

성부(聖父)의 단계 : 무(武)와 충(忠)의 이념 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한 절대자의 단계이다. 이순신에게는 평생 갈고닦은 무예와 백성에 대한 일편단심의 신념이 이에 해당한다. 닿을 수 없는 완벽을 향한 수련의 과정이다.


성자(聖子)의 단계 : 고초와 부활 신이 인간의 몸으로 현현하여 고통받는 단계이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끌려가 죽음 직전의 고초를 겪었으나, 백의종군으로 다시 돌아왔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예수의 부활만큼이나 경이로운 '영웅의 귀환'이었다.


성령(聖靈)의 단계 : 공동체 안의 영원한 삶 예수가 죽은 뒤 공동체의 정신 속에 살아남듯, 이순신은 노량에서의 전사를 통해 비로소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다. 그는 이제 한 명의 장군이 아니라, 조선 수군과 민초들의 마음속에 흐르는 '공동체의 정신' 그 자체가 되었다.



이순신의 정신으로의 승화와 종교공동체적 성격은 수군의 용맹함의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13척의 배로 133척을 상대했던 명량해전에서 수군이 용기를 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후의 전투도 조선 수군은 마지막 전투를 빼고는 항상 열세였다. “칼의 노래”에서도 군량미 부족, 질병 창궐 그리고 무의미한 선조의 견제등을 묘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수철 같은 부장과 수군의 이순신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은 헤겔식 종교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이순신이 신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행적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용기를 주고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9) 결말: '칼의 노래'가 우리에게 묻는 것

이순신 같은 인물은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것이다. 이순신의 등장은 개별의 능력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다시는 생겨서는 안 되는 외부세력의 침략 그리고 무능력한 왕이라는 역사적 상황이 맞물렸기에 가능했다. 임진왜란은 다시는 생겨서는 안 되고 선조와 같은 지도자는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이순신의 등장은 기대해서는 안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순신의 이야기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보편이 없는 개별은 없고, 개별은 보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매개된 자유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란 것은 명백하다. “칼의 노래”는 특별한 소설이다. “칼의 노래”를 통해 이순신의 인간다움 뿐만 아니라 그의 고뇌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순신을 단순히 존경받는 장군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이순신에 대한 존경뿐만 아니라 그가 지키고자 했던 공동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핵은 우리를 지켰다. 이제는 우리를 위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