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에서 정의로: 프로이트·보부아르와 출산비용의 사회화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문제제기

“남녀평등”은 언뜻 보기에는 명확하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조건에 따라 경쟁하고 성과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보는 “남녀평등”과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남녀평등”의 의미는 다른 것 같다. 물론 페미니스트 안에도 “동일직종 동일임금”등의 절대적 평등을 추구하는 부류들도 있지만, 유망 직종에서의 “적극적 우대조치”, 슈퍼히어로 영화에 “여성 캐릭터 출연”등 실질적 평등(임신·출산·돌봄으로 인한 경쟁 조건 비대칭을 보정하는 우대정책)을 주장하는 부류도 있다. 이들에 반대하는 의견은 실질적 평등 자체를 차별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여성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수혜자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남성은 자살률이 높고 더 힘든 직업에 종사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에 허덕이는 존재이다. 따라서, 실질적 평등은 용납할 수 없다.


“실질적 평등”의 반박에 대응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이는 효과적이지 않다.

첫째,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차별받아온 희생자들이다. 따라서, 희생자들에게 같은 출발선을 주는 것은 정의롭다.

둘째, 획일적 세상은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위해서 여성들에게 더 많은 자리를 내주는 것은 사회를 더욱 풍요롭고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주장이 진위여부를 떠나서 사람들은 쉽게 거부감을 느낀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의 책임과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희생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희생되고 있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먼 옛날에 그것도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다양성으로 인해 획득한 안정성과 번영은 개인의 행복과 권리를 침해할 뿐인 과거의 전체주의적 생각일 뿐이다.


따라서, 실질적 “남녀평등”을 지금과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에세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통해서 실질적 “남녀평등”을 정당화해 보고 자 한다. 이 에세이의 논점은 이런 접근이 정당하다는 것이지, 기필코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는 도덕과 정의라는 입장에서만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도덕과 정의는 감정, 물질적 만족등과 함께 정책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한 가지 도구적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도덕과 정의가 주는 울림이 사람들의 의견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에세이가 우리 사회가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이바지했으면 하는 작가로서의 소망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정의는 쉽게 도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상황은 더욱 도드라 진다. 민주주의는 헌법이라는 양도 하거나 파괴될 수 없는 일련의 권리들을 만들고, 이에 반하지 않는 가치는 투표를 통해서 결정하게 한다. 민주주의는 국가나 권력자가 가치를 독점할 수 없게 만들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정의 또한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결과물을 얻는 것”을 소개한다. 이는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본능 그리고 자본주의에도 어울리는 개념의 정의다. 그리고 이는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들에게 평등이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에게 결과물”이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극히 자본주의적인 관점으로 한정된 재화를 나누는 방법과 유사하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체계 안에서 남과 여는 동등하게 경쟁을 해야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은 정의로운가? 그러나 성과에 따른 분배가 정의로 기능하려면 경쟁 조건이 대칭이어야 한다. 조건이 비대칭인 순간, 정의는 ‘성과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 배분’의 문제로 이동한다. 즉 누가 더 많이 비용을 치르고, 그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되어 왔는지를 묻지 않으면 ‘같은 규칙’은 중립이 아니라 방치가 될 수 있다. 앞에 이야기했던 역사적 피해를 다 떠나서, 우리가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파고든다면 여성이 불균형하게 부담해 온 비용을 보정하는 것은 정의롭다.. 왜냐하면 체제 유지를 위한 희생이라는 숭고한 개념은 경쟁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들은 다른 사회구성원과 동등하게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숭고하게 받아들이고 희생이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임을 인정한다. 만약, 여성들이 우리가 사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면 그리고 이로 인해 올바른 경쟁을 할 수 없다면, 실질적 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부아르의 핵심은 ‘여성의 몸’이 아니라, 그 몸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로 배치되는가(그녀가 처한 상황)에 있다. 임신·출산·돌봄이 사회 유지에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비용이 관습·제도·규범을 통해 여성에게 고정되면서 여성이 ‘주체’가 아니라 ‘타자’로 위치 지워지고, 사회적 가능성(초월)이 제한되는 방식이다. 우리 사회는 출산과 양육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사회의 발전은 역사성을 지닌다. 또한 지금의 희생이 미래에는 대가로 바뀌기 때문에 에너지를 응축할 수 있다. 문제는 출산의 당위가 아니라, 임신·출산·돌봄에 수반되는 비용이 특정 성에게 고정되면서 경쟁 조건이 비대칭이 되는 구조다. 또한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일찍 태어나기 때문에, 양육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모든 구성원은 양육에 의해 길러지고 사회에 돌아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을 육체적인 이유로 인해 출산과 양육을 도맡아 왔다. 출산에 적합한 여성의 몸은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한다. 재생산을 위한 신체적 변화는 개인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고, 이는 노동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물리적으로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는 과거에 사냥과 전투등으로 쉴 새 없이 육체적 일을 했어야 하는 여성들이 사회생활에서 차단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하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또한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여성의 혼인은 경력단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여성들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이를 위해 부여된 신체적 특징은 이들을 희생하게 하고 동등한 경쟁의 기회를 앗아 간다. 몇몇 사람들은 여성들의 출산과 양육이 강요된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출산과 양육을 위해 주어진 육체가 있고 또한 여성들에게 출산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주입하고 그리고 양육은 여성의 몫이라고 문화적으로 주장한다면 과연 이것이 자유로운 선택인지는 의심해봐야 한다.


프로이트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프로이트는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여성의 희생과 사회체제의 유지에 대해 설명한다.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머니의 양육에 의지한다. 어머니의 양육은 아기들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쾌감을 느끼고 어머니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타나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평생의 짝임 알게 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이들이 자기들을 만든 본능을 억압할 때만,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아들에 대한 설명이고 딸에 대한 설명은 매우 피상적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쾌락요인은 사회요인에 의해 억압될 때만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쾌락요인은 사회요인에 의해 무의식으로 쫓겨나기에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만 여겨지지만, 쾌락요인 없이는 사회요인이 생겨날 수 없다. 인간의 문명은 자기의 욕망과 쾌락을 억제하고 이를 문명이라는 방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문명의 탄생이라는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이는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쾌락요인은 어머니가 자식들을 양육하면서 그들에게 쾌락을 주는 순간에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주장에도 여성들의 출산과 양육을 위한 신체적 특징과 그들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실질적 평등은 도덕적인가?

“실질적 평등은 도덕적인가?”라는 처음의 문제제기로 돌아가보자. 보부아르와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실질적 평등”은 도덕적이고 정의롭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실질적 평등은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정의는 물론 능력에 합당한 결과물의 분배라는 측면도 있지만, 사회전체적인 발달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평등을 추구한다는 것도 있다. 우리가 백만장자의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고통을 없앨 수 있지만 적정한 세율을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실질적 평등은 단순히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재생산 노동'을 수행하느라 '시장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에게 보내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합리적인 보상 체계이자 정의이다. 현대사회는 저출산으로 고통받고 있다. 미래에 고연령층의 증가로 성장동력은 사라지고 높은 세율에 젊은 세대는 허덕일 가능성이 높다. 이민자와 ai가 해결책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얼마나 효율적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어, 많은 나라에서 선심성 현금정책을 추구하지만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저출산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높이고 출산으로 인한 불이익을 줄이는 것이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만으로 그녀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녀들은 학창 시절을 통해 사회적 지위에 대한 꿈을 꾸었고 이를 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실질적 평등을 통해 여성들이 느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출산이 장애물이 아니라 새로운 행복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행동임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실질적 평등은 도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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