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황무지』를 시장으로: 손때 묻은 독해를 위해

황무지를 읽고 by T. S. 엘리엇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시는 제한된 분량 속에서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압축과 생략과 제약을 활용하고, 그 제약이 그 작품의 형식적 규칙을 만든다. 이것이 시의 본래 성격이기는 하지만,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황무지>는 다른 시에 비해 훨씬 난해하게 느껴진다. <황무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갑자기 새로운 화자가 등장하거나 고전이 등장하는데 그 분량의 한계로 인해 더욱 짧게 느껴진다. 이에 <황무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는데, 엘리엇은 텍스트 안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에세이는 엘리엇의 생각에 맞추어, 다양한 방식으로 <황무지>를 해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황무지>를 역사적 맥락과 작품 내용을 기반으로

둘째, 테리이글턴이 주장했던 이데올로기와 문학작품의 결합이라는 측면으로

셋째, 마지막으로 모더니즘시가 표방하고자 하는 바와 정신분석학의 측면으로 분석해 보겠다.



(2) 역사적 관점과 내용

황무지는 1922년에 발표된 시로, 1차 세계대전의 정서와 폐허감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로 인해 삭막해진 영국도시를 노래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따르면, 황무지는 “1차 대전 이후의 환멸과 혐오(disillusionment and disgust)”를 강하게 표현한다고 요약하고 있다. 황무지의 역사적 배경은 시의 난해한 형식을 설명한다.


먼저, 엘리엇에게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대륙은 정신과 전통의 불모지다.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던 자화자찬의 시대는 지나가고 유럽인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가치를 잃어버렸다. 또한 유용성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가치는 우리를 진보로 끌고 가는 듯싶었지만,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을 도구화하고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2-1) 1장: 죽은 자의 매장

첫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역설은 봄의 따뜻한 찬가를 뒤집으며, 오염된 토양에서 억지로 피어나는 생명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엘리엇에게 있어 고전적 가치와 신성함이 부재한 지금의 유럽은 영양분 없는 황무지와 같다. 오염된 토양에서 자란 식물이 오염되듯, 황무지에서의 탄생은 축복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겨울이 따뜻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망각의 눈(Snow)이 덮인 겨울이, 1차 세계대전과 자본주의가 만든 참혹한 현실을 보지 않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자갈더미에서 무엇이 자라겠느냐?”, “파괴된 우상” 등의 구절은 유럽을 지탱하던 거대한 전통이 파편화되었음을, 그리고 우리가 다시 그 고전의 시대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둘째, 절대적 가치의 상실로 인해 현대인들이 타로 카드와 같은 미신에 의존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이성이 아닌 우연성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긴다. 카드를 전부 갖지 못한 채 부분적인 힌트에만 의지하여 점괘를 끼워 맞추는 모습은, 거대한 고전의 체계가 무너진 자리를 차지한 미신이 얼마나 조악하고 부질없는지를 보여준다.


셋째, ‘비현실적인 도시(Unreal City)’는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런던의 풍경을 묘사한다. 엘리엇은 가치(영혼)를 잃은 인간이 육체적 생명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따라서 런던의 수많은 군중은 그에게 비현실적인 유령과도 같다. “죽음이 저토록 많은 사람을 망쳤으리라”라는 단테의 인용에서 ‘죽음’은 곧 ‘고전과 전통의 죽음’으로 겹쳐 읽힐 수 있다. 이 죽음이 도시 전체를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지옥의 이미지를 런던에 덧씌운 것은, 지금의 문명이 지옥과 다를 바 없으며 오직 과거의 위대한 전통을 되살리는 것만이 구원처럼 제시되는 것이다.



(2-2) 2장: 체스놀이

2장 <체스놀이>는 계급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 전체에 만연한 친밀성의 붕괴와 성의 기능화를 보여준다. 상류층과 하류층 모두 양상은 다르지만, 성은 생명을 잉태하거나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기보다 권태를 덮거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전락한다.


첫째, 상류층 장면은 화려함 속에 감춰진 공허와 폭력(그리고 침묵)을 드러낸다. “그녀가 앉은 의자는 눈부신 옥좌처럼…”이라는 묘사는 셰익스피어의 클레오파트라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장엄한 사랑/권력의 이미지를 현대의 실내로 축소해 불안한 과잉을 만든다. 그러나 그 방을 장식하는 필로멜라 신화(폭력과 ‘말의 박탈’)는 이 화려함의 밑바닥에 폭력과 발화 불능이 깔려 있음을 암시하고, 실제 대화가 소통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장면과 맞물린다. 여인의 “오늘 밤 제 신경이 이상해요”, “저게 무슨 소리죠?” 같은 불안은 물질적 풍요가 의미를 보장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마저 “Shakespeherian Rag” 같은 대중가요의 흥얼거림으로 소비되는 순간, 전통은 삶을 지탱하는 전체가 아니라 상품화된 파편으로 전락한다.


둘째, 하류층 장면에서는 삶이 노골적으로 ‘몸’과 ‘생존’으로 환원된다. 술집에서 들려오는 릴의 이야기는, 남편이 돌아오면 ‘스마트하게 꾸미라’는 압박과 돈(치아 치료비)의 문제, 그리고 ‘pills’를 먹고 몸이 망가졌다는 고백을 통해, 부부 관계가 사랑이라기보다 의무·거래·공포로 굳어버린 현실을 드러낸다. 특히 반복되는 “HURRY UP PLEASE ITS TIME”은 단순한 마감 멘트(라스트오더)를 넘어, 이들의 삶이 ‘마감’과 ‘소진’의 리듬에 의해 잘려나가는 느낌을 만든다.


결국 2장은 계급 차이를 넘어, 황무지의 핵심 증상—소통 불능, 성의 도구화, 전통의 파편화—이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확증한다.



(2-3) 3장: 불의 설교

1장과 2장에서 물은 더 이상 정화와 재생의 상징이 아니라 익사와 파괴의 매개로 제시된다. 이러한 황폐 위에서 3장에서는 불의 힘이 전면에 등장한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파괴의 힘이면서도, 동시에 욕망과 의욕처럼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추진력이다. 그러나 엘리엇이 보기에 현대 유럽은 이미 가치를 상실했기에, 그 추진력은 의미를 낳기보다 소진과 파괴로만 귀결된다. 다시 말해 이 장에서 불은 ‘움직이게 하는 힘’의 부재가 아니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무의미한 행동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가리킨다. 이후 템스강의 황폐, 고전의 아이러니한 잔향, 기계적 성(性愛)의 장면이 차례로 이어지며, ‘불타는 추진력’이 어떻게 황무지의 일상으로 구현되는지 드러난다.


첫째, 3장은 템스강이 더 이상 축복과 재생의 공간이 아님을 선언한다. “강의 천막은 찢어졌고 님프들은 떠나갔다”는 구절은 강을 둘러싸던 신화적 보호막(축제·사랑·생명력)이 걷혀 버렸음을 암시하고, 이어지는 오염의 이미지는 물이 정화의 상징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현실을 확정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음산한 운하에서 낚시질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쥐가 남아 있는 풍경은 ‘회복의 가능성’이 아니라 ‘붕괴 이후에도 계속되는 일상’ 자체를 보여주며, 이는 유럽이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또는 너무 익숙해져) 관성처럼 그 자리에 머무는 상태—황무지의 습관화—를 드러낸다.


둘째, 일부 현대인들은 고전을 통해 전통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고전이 삶을 조직하는 전체가 아니라 파편 인용으로만 소비되는 세태를 다시 비판한다. 이는 스펜서의 결혼 축가 후에 mr.porter라는 세속적인 노래가 나오는 부분에서 절정에 달한다. 2장에서 셰익스피어와 필로멜라 작품이 소비되는 것과 짝을 이룬다. Unreal city와 스미르나 상인의 제안은 인간적인 유대감조차 비즈니스 거래나 일회성 쾌락으로 전락해 버린 세태를 보여준다. 이는 모든 가치를 상품화하는 물질주의가 관계의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하며 불임성과 황폐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셋째, <황무지>에서 가볍게 소비되는 성은 비판의 주된 대상이다. 엘리엇은 성이 단순한 자극이나 거래가 아니라 관계의 의미를 생산하는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3장은 타이피스트와 젊은 남자의 정사가 가볍고 의미 없음을 보여준다. 특히 정사가 끝난 후에 남는 것은 친밀함이 아니라 무감각한 정리와 공허라는 점 그리고 타이피스트가 젊은 남자를 묘사하는 부분은 외모와 그의 배경에 한정되어 있는데 이는 정사가 내재적 의미가 없음을 묘사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티레시아스의 존재는 현대인의 비극을 극대화한다. 육체의 눈은 멀었으나 영적인 진실을 꿰뚫어 보는 예언자 티레시아스와, 육체의 눈은 뜨고 있으나 정작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공허한지 보지 못하는 현대인의 '영적 맹목'이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즉, 엘리엇은 티레시아스의 시선을 빌려 육체적 결합조차 구원이 되지 못하는 현대 유럽의 참담한 내면을 고발하고 있다.


넷째, 아름다웠던 과거의 템스의 딸들에서의 강과 세속적이고 파괴되어 버린 지금의 강을 대비하면서 과거에 대한 향수와 가치를 그리워한다. 이런 대비가 반복되는 이유는 엘리엇이 여전히 완전한 절망만은 아니라는 잔향을 보여준다. 고전이 파편적으로 등장해 그 의미를 잃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고전을 등장시킴으로써 심층적으로 우리가 여전히 위대한 전통의 뿌리 위에 서있음을 상기시킨다. 즉, 엘리엇은 고전이라는 '질서'를 통해 무너져가는 현대 문명을 지탱하고, 잊힌 가치를 현재로 다시 불러와 정신적 재생을 꾀하려는 질서 부여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에 성 아우구스티노스의 참회록과 부처의 불의 설교를 병치한 것은 동서의 권위를 병치해 인간을 타락시키는 불의 문제가 특정 문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 문제임을 역설한다. 특히 서구 전통만으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다른 전통의 언어를 호출해 진단을 강화한다. 둘 다 금욕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물질로부터 해방되고 고전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윤리적 힌트를 던지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2-4). 4장: 수사

1장에서 소소스트리스 부인이 예언했던 ‘익사한 페니키아 사람이 실제 등장하면서, 4장은 물의 이미지가 정화가 아닌 완전한 파멸로 귀결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전 장들과는 달리 4장은 사건을 매우 짧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가치를 상실한 황무지 위에 세워진 유럽이 결말이 ‘죽음’ 임을 냉정하게 확정하는 것이다. 1장에서 미신으로 등장했던 타로카드의 예언이 현실로 등장하는 이유는 정신적 가치를 잃은 문명의 몰락이 그만큼 필연적임을 선언하는 장치이다.


2주 동안 죽어있었던 플레바스의 시체는 파편화된 인간관계의 비극을 보여준다. 물살에 뼈가 깎이며 그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도, 바다의 깊은 너울도 잊어버렸다. 이는 그가 생전에 가졌던 모든 욕망과 이익이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한 허무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노년/청년, 이교도/유태인의 병치는 정체성의 차이를 지우며 누구나 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엘리엇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시선을 돌려 ‘키를 잡고 바람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는 그대’ 즉 독자를 호출한다. 키를 잡고 바람 부는 내다보는 자는(현대인을 뜻함) 운명에 어긋나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의 비극에서 보이는 운명이 자신의 파멸임을 알고도 스스로 선택하는 것임을 상기할 때, 유럽인들은 이미 자신의 파멸을 알지만 그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하지만, 3장에서 고전의 반복이 엘리엇의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유럽 문명이 키를 스스로 잡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운명을 거슬러 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엘리엇이 “그대 역시 그처럼 한때는 잘생기고 키가 컸다는 것을 생각하라(Consider Phlebas)”고 경고하는 것은, 우리가 플레바스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음을 역설한다. 4장이 황무지의 진단의 결과를 보여줬다면 5장은 그 이후, 더 이상 ‘익사’가 아니라 ‘물의 부재(갈증)’ 속에서 문명 붕괴의 풍경을 통과하며, 최소한의 윤리적 처방(천둥의 DA)만을 남긴다.



(2-5). 5장: 천둥이 한 말

5장은 4장까지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처방처럼 보이는 최소 지침이다. 천둥은 새로운 비바람을 몰고 오는 매개다. 천둥이 치고 새로운 비가 즉 물이 내리면서 이제까지 정화의 의미를 잃었던 물이 회복의 가능성으로 예고된다. 특히, 천둥은 파괴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만, 우파니샤드와 성경에서 천둥은 생명의 탄생 혹은 질서의 회복을 말하는데, 5장의 천둥이 한 말은 새로운 질서 즉 현대인이 지켜야 할 윤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첫째, after after after가 연속해서 나오는 것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가치를 잃고 황무지에 서있음을 말한다. 특히, 감옥과 궁궐을 병치한 것은 2장 체스놀이에서 상류층과 하류층이 타락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감옥과 궁궐은 우리가 만든 기준일 뿐, 지금의 세상은 모두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제까지 물은 파괴의 이미지였다면, 천둥으로 인해 새로 내린 비는 재생의 의미를 가진다. 5장에서의 물이 갈증의 대상이 된 이유는, 과거의 물이 아니라 재생의 물이 등장을 의미한다. 천둥으로 새로운 물이 도래했지만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물은 내려왔지만 이 물을 충분케 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5장의 성격이 새로운 질서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질서의 회복은 우리의 손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셋째, ‘당신 옆에 걷고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라는 부분은 전통 혹은 로고스라고 읽힐 수 있다. 엘리엇은 남극탐험대의 이야기에서 자극을 얻어 썼다고 하는데, 남극탐험대에게 제삼자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엘리엇이 전통을 계속해서 소환하는 이유는 가치를 잃은 지금의 현대인의 뿌리는 고전에 있고 이것이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여기서 제삼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뿌리에 깊이 박혀있는 고전일 수 있다. 또는 헤겔이 “세상은 로고스로 이루어졌다”라고 한 것처럼 세상을 구성하는 로고스 혹은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엘리엇의 <황무지>가 희망적인 이유는 다시 과거의 가치와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세상에는 고정된 뿌리와 체계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삼자는 환각이 아니라 이런 믿음의 표현이다.


넷째, 어린애얼굴을 한 박쥐의 등장과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등 서구 문명의 몰락을 이어서 보여주는 것은 소설 드라큘라의 내용을 거꾸로 해석한 것이다. 드라큘라는 알지 못하는 동부유럽의 이민자들이 런던을 침입하고 문명을 붕괴한다는 메타포를 담고 있는데, 엘리엇에게 오히려 현대인들이 드라큘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과학과 문명이 지켜야 하는 가치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물질적 가치의 추구와 종교와 전통에 대한 무지가 문명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이후에 텅 빈 교회는 이를 다시 선언한다.


다섯째,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자제하라)는 3가지 선언은 현대인들이 따라야 할 새로운 규율의 선언이다. 이는 우파니샤드에서 가져온 말이지만 ‘주라, 공감하라, 절제하라’는 성경의 내용과 강하게 공명한다. 성경은 타자를 돕고, 공감하고, 절제와 순종을 말한다. 엘리엇은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은 비슷한 병을 앓고 있지만(갠지스강의 물이 말랐다고 선언함), 둘 다 같은 교리를 공유하고 있기에 회복할 수 있음과 회복의 가치는 보편적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3) 테리이글턴: 이데올로기와 문학

1부의 역사적 독해가 ‘황무지’의 정서를 전후 유럽의 붕괴로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 붕괴가 어떤 방식으로 제도·가치판단·정전·독서 규범을 통해 재생산되는지(이글턴의 문제의식)를 묻고자 한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입문에서, “T.S 엘리엇의 공격대상은 중산계급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전체, 즉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이다.” 이글턴은 이런 엘리엇의 사상은 권위주의적(극우적) 질서로 기울었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은 모두 비인격적 질서를 위해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인격이나 개성, 의견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 영역에 있어서 이 비인격적 질서는 전통이다.” 에서 이글턴의 견해가 잘 드러난다.


이글턴의 관점에서 보면, <황무지>는 엘리엇이 비판한 중산계급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병리를 반복적으로 노출한다. 엘리엇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공동의 가치나 욕망에 연결되지 못하고 소진과 공허로 남는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붕괴를 수습할 원리를 ‘전통’ 같은 비인격적 질서를 상정하는데 이글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엘리엇의 처방이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기보다 개성과 의견을 질서에 복속시키는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기울 수 있다고 비판한다. (즉, ‘유기체적 사회’의 회복이 사회 변혁이 아니라 전통의 권위를 되세우는 방식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인류는 전통 혹은 권위라고 이름 지어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문명을 세워왔다. 왕권은 민주주의로 교회는 합리주의적 시장으로 교체되면서 개개인은 자유롭게 행동하고 이는 문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차 세계 대전과 천민자본주의를 개인주의의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엘리엇의 전통으로의 회귀는 또 다른 억압으로 회귀에 불과하다. 테리 이글턴에게 해결책은 개개인 도덕성의 회복이 아니라, 정치·사회 구조의 변형/분석이다. 하지만 <황무지>는 지속적으로 도덕성만을 문제 삼을 듯, 체제의 문제가 직접 제시되기보다 도덕·문화 언어로 우회된다.


또한 엘리엇의 언어관과 고전을 사용한 극의 전개는 다소 엘리트주의적이다. 엘리엇은 경험에 밀착된 언어는 시인의 합리적인 추상을 무시하게 한다. 따라서, 엘리엇은 직접적이지 않은 단어들을 사용해 읽는 이들이 시인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추론하게 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단테, 불교경전등의 고전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황무지>를 읽을 수 없게 만든다. 이는 그의 시를 읽는 이들이 어느 정도 시에 대한 교양을 가졌을 때만 접근할 수 있음을 말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만든다.


이글턴의 주장처럼 “좋은 문학”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선정된다. <황무지>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문학’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질서’와 ‘권위’를 옹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은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형태를 내재화하고 그에 따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고 표방하면서 접근이 어려운 문학은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스스로를 은폐하기에 탁월한 수단이 된다.


결론적으로, <황무지>는 표면적으로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거부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독자들을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라는 새로운 억압적 이데올로기 속으로 투항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고 이글턴은 비판한다.



(4) 모더니즘과 정신분석학

테리 이글턴은 <황무지>의 난해함이 엘리트주의적으로 작동하며 이데올로기를 은폐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황무지> 이후 에즈라 파운드의 <캔토스>, 이상의 <오감도>, (시는 아니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에서 난해한 형식은 반복적으로 선택된다. 이 반복은 난해함이 단순히 ‘배제/은폐’만이 아니라, 독자의 자동 독법을 멈추게 하고 해석을 강제하는 낯설게 하기로도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의 난해함은 어떤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를 숨기기도, 동시에 흔들기도 하는가? 난해함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테리이글턴은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시대의 ‘좋은 문학’을 선정한다고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장르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좋은 글’이라는 기준 자체가 제도·교육·비평을 통해 굳어져 왔다는 뜻이다.) 문학이 “좋은 글”로 인정되어 온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작가들은 시대의 엘리트들이자 해방자들이었다. 이런 전통과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문학에 질문하지 않고 받아들여 왔었다.


모더니즘 작가들이 해체하려고 했던 것들이 이런 이데올로기 아니었을까? 문학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독자의 수동성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더 난해하고 거칠게 느껴지는 형식을 선택한 경우가 많다. 이제까지의 문학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읽었을 때 느끼는 불쾌함은 기쁨과 인정보다는 의심과 불인정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비로소 “문학은 좋은 것”이라는 전제에 도전하고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또한 촘촘히 달려 있는 주석은 독자로 하여금 이 작품이 ‘자기 완결적 천재성’이 아니라 과거 텍스트들의 유산 위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더 직접적으로 자각하게 만든다. 다만 이 주석은 독자를 돕는 동시에, 또 다른 ‘권위의 문턱’을 세우는 장치일 수도 있다. 그래서 『황무지』의 난해함과 주석은 독자를 엘리엇이라는 권위로부터 곧장 해방시키기보다, 최소한 한 번은 독자의 자동 독법을 멈추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모더니즘의 등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을 수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보면, 모든 사람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기보다는 욕망을 억누르고 쾌락원리에서 벗어나 현실원리를 따르도록 훈련된 존재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욕망의 억압과 내면화가 어떻게 가족을 통해서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해럴드 블룸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입각해서 문학사를 오이디푸스적 경쟁 구도로 재해석했다. 자식이 부모에 의해 억압을 받듯이 이전 시대의 강력한 시인의 그늘에 묻혀 불안하게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물론 모든 시들이 과거의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의 표현이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형식인 모더니즘에서 블룸의 이론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난해함과 새로운 형식을 표방하는 <황무지> 또한 과거의 시로부터의 해방을 원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황무지>가 오이디푸스적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전통을 엘리엇이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랑의 대상(어머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핵심은 아들과 아버지가 공통으로 사랑하는 대상인 어머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무찌르고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황무지>는 과거의 시로부터 해방하려고 하지만, 과거의 시와 문학들이 전통을 고수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황무지>는 전통의 파괴가 아니라 전통을 ‘새 형식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5) 결론

문학비평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직접적 접근부터 시대 상황에 대한 해석 그리고 텍스트 자체를 해석해야 한다는 접근까지 다양한 접근법을 가진다. 테리이글턴은 문학비평은 문학을 읽는 도구로서 하나의 도구에 집중하지 않고 텍스트에 따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할 때,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문학은 단순한 글이 아니다. 문학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일으키고 사회를 새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줄 수 있다. 반면에, 문학이 권력에 의해 남용될 때 그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것이 문학 비평과 해석이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황무지>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문학을 해석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는 단순히 즐거움의 표현인가? 아니면 엘리엇이 원하는 바를 세상에 알리는 것일까? 아니면 문학이라는 장르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포착하고 문학의 가치를 포획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정확히 내릴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문학작품은 그대로 있지 않고 다양한 해석에 열려있을 때문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황무지> 또한 마찬가지다. <황무지>가 유리에 둘러싸여 박물관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시장좌판에서 다양한 손때와 펜에 의해 더럽혀 질 때 더욱 빛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따라서 이 글이 시도한 세 가지 독해(역사/이데올로기/정신분석)는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황무지』를 계속 읽히게 만드는 ‘읽기의 장치들’ 자체를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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