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문학은 ‘창작’이 아니라 ‘분류’가 된다

테리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문학은 ‘정의’가 아니라 ‘분류’다: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출발점

이글턴에게 문학은 어떤 본질을 ‘정의’하는 대상이 아니라, 제도와 권력이 끊임없이 재편하는 ‘분류’다. 그래서 문학이론은 중립적 해설이 아니라, 그 분류를 정당화하거나 뒤흔드는 정치적 장치가 된다. 따라서,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 입문]은 “비평은 자신을 규정해 줄 대상을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하고 나서야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


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한다. 영문학 입문이 영문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규칙이나 언어 그리고 분위기를 알려주는 것처럼, 특정 학문의 입문서란, 그 학문을 이해하는 길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입문]을 통해 문학이라는 장르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는 문학은 “정의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어떨 때는 시가 문학으로 불리고 어떨 때는 뛰어난 글이 문학으로 불리었다고 말한다. 이글턴에게 문학이란 독자가 텍스트와 관련 맺는 방식이자 가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독자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모더니즘 문학을 문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테리이글턴이 보기에 문학은 만들어지고 규정되는 것이다. 사회는 뛰어난 문학작품을 선정하고 이런 기준을 충족하는 작품에게 부와 명예를 부여한다. 그리고 선정과 상을 내릴 힘은 분명 권력계층에 있다. 따라서, 뛰어난 글이라는 기준에 따라 선정되는 문학작품은 분명 권력계층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작가는 분명 자신의 생각을 문학작품이라는 장르를 통해 외화 하지만, 이들 또한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이들은 독자와의 솔직한 대화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부와 명예에도 원하기 때문에 권력계층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반대 사례도 있지만, 제도는 평균적으로 이런 유인을 만든다.


테리이글턴은 이데올로기를 “사회권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어떤 관계를 지니는 느끼고 평가하고 인식하고 믿는 방식들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는 뜻이다.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은 경쟁과 사유재산에 긍정적이고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은 평등과 분배에 긍정적인 것 따위이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 항상 권력계층과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면, 문학은 현행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고 역사적으로 문학 비평 또한 이 길을 따라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이글턴이 비평은 자신을 규정해 줄 대상 즉 문학을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할 때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의 진정한 뜻이다.


그렇다면 문학과 비평의 문제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론이 옳으냐가 아니라, 각 문학이론이 ‘문학을 무엇으로 분류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분류가 어떤 사회적 감각과 판단을 정상으로 만들었는 지다. 이제부터 나는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뉴 크리티시즘, 현상학·해석학,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수용이론까지—각 시대의 이론들이 내세운 “중립”의 언어가 실제로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했는지 추적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학이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하수인이 아니라, 때로는 균열을 만드는 장소가 될 수 있는 조건도 함께 확인해보려 한다.



2. 이데올로기와 공모하는 비평의 계보

테리이글턴은 18세기 영국에서는 “문학으로 간주되는 것의 기준은 솔직히 말해서 이데올로기적이었다.”라고 말한다. 18세기 영국에서는 특정 사회계급 즉 가치들과 ‘취향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글만이 문학의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영국은 사회계급들이 서로 다투던 피비린내 나는 시대로 문학은 특정 가치들을 널리 확산시키 는데 꼭 필요한 도구였다. 테리이글턴은 “당시 문학은 정기간행물 커피하우스 사회와 미에 관한 논문들 설교등 이데올로기 제도들 전체를 포함했고 이는 계급적 반발을 초래했다.”라고 말했다.



2-1) 낭만주의

하지만, 낭만주의의 등장은 이데올로기를 은폐하면서 계급갈등을 줄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 문학은 상상적인 것과 거의 동의어가 되어간다.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영혼을 감동시키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영국정부는 낭만주의 시대의 일정 기간 동안 경찰국가나 다름없이 잔혹한 정치적 억압을 실행했고 낭만주의자들은 영국사회에서 사라진 창조적 가치들이 찬양 긍정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으로 문학을 선택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이런 행동이 현실에서 도피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들도 제도에 대한 반항을 품었지만, 그들의 문학은 갈등이 상징 속에서 내면의 정화, 상처의 치유로 바뀌었다. 낭만주의는 현실의 고통을 상상과 상징의 언어로 바꾸어, 정치적 칼날을 무뎌지게 만들고 정치적 해결보다는 개인의 도야에 초점을 맞춘다.


워즈워스의 틴턴수도원은 사회의 불안과 소란을 개인이 자연을 다시 느끼는 능력을 회복하면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불평등과 착취는 제도를 바꾸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이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가 된다. 또한 근대적 분열은 개인이 도야의 과정을 통해 사회화되면서 해결되는 성장의 과제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낭만주의는 착취의 분열이 하나의 전체 속에서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적 모순을 개인의 감정·도덕·자연 감각 회복 문제로 번역하여 그 의미에서 고통받는 개인은 치유되는 것이다.



2-2) 매슈 아널드: 문학은 종교가 사라진 영국의 치료제

테리이글턴은 “종교는 다른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통합하고 위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이라는 측면에서 극히 효과적인 이데올로기 통제형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종교가 영국에서 힘을 잃어가면서 권력계층은 위기를 느꼈다. 이에 매슈 아널드는 영문학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임무를 수행할 과목으로 구축했다. 그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속물적인 중산계급을 ‘그리스 화하는 것’ 즉 교양 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아직 중산계급의 기풍이 완벽하지 않음을 구축함과 동시에 노동계급을 조종 통제하고 병합하는 효과를 가질 것이라고 보았다. "편협한 종교적 근본주의와 배타적 이익 추구에 함몰된 중산층에게, 그리스적인 '조화와 균형’을 주입함으로써 그들을 진정한 '지배 계급'으로 업그레이드시키려 했다"

중산계급의 ‘그리스화’라는 건 영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영국 농민의 땅을 빼앗은 인클로저 운동 같은 구체적인 계급 압착의 역사를 '보편적 인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 아래 은폐시켰다. 뿐만 아니라 문학은 하층계급에게 고용주들의 관점을 설명하고 그들이 정당하다는 것, 그리고 부르주아 문명의 부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들을 전달했다.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영문학의 존재는 영국 노동계급이 대영제국의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 제국을 위한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했다.


이는 학과목으로서의 영문학이 처음으로 제도화된 곳이 종합대학이 아니라 공업학교들 근로자들을 위한 단과대학 그리고 순회 공개강좌이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컨대 런던 메카닉스 인스티튜트(후 버크벡)에서 초기에 영문학 강의가 편성되고, 1830년 밀턴 강의가 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문학은 ‘위대한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어떤 시민으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제도화된다.



2-3) 영문학의 제도화

이 과정에서 정전은 단지 위대한 작품 목록이 아니라, 어떤 인간상이 ‘정상’인지를 반복해서 주입하는 기준점이 된다. 셰익스피어, 밀턴 같은 “위대한 작품”은 개인의 고통을 보편적 비극으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영국이라는 공동체의 상징 자본으로 기능한다. 하층 계급은 현실에서의 무력감을 정전 속 ‘위대함’과 동일시하며 보상받을 수 있고, 그 동일시는 계급 갈등을 직접 폭발시키기보다 “영국인의 교양/자부심”으로 우회시키는 통로가 된다. 즉 문학은 갈등을 없애지 않지만, 갈등을 통합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그 번역이 특히 강하게 작동하는 조건이 전시 민족주의 같은 국면이다. 전쟁은 사회를 하나로 묶는 명분을 필요로 하고, 영문학은 ‘우리의 전통/우리의 정신’이라는 표지 아래 그 통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영문학은 학과목이 되는 순간, 단순히 텍스트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감정·도덕·취향을 설계하는 제도가 된다. 그리고 이 설계가 반복될수록, “이렇게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독서 규범은 상식이 되고, 상식이 된 순간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노골적인 구호가 아니라 교양의 형태로 작동한다.



2-4) 리비스와 스크루티니: 저항의 언어가 엘리트 규범이 될 때

1930년대 초반, 영문학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과목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교화력을 지닌 과목이자 사회적 형성의 정신적 본질이었다. 1932년 리비스그룹은 [스크루티니] 지를 출범했다. 테리이글턴에 따르면, [스크루티니] 지는 단순히 ‘문학적’이기만 한 가치들을 거부하면서 문학작품의 평가방법은 역사 및 사회 전반의 성격에 관한 보다 통찰력 있는 판단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정 형식만 따르면 좋은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는 형식주의에 반기를 든 [스크루티니] 지는 내용과 의미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스크루티니]지가 이런 입장을 ‘선언’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를 실제 비평의 기술로 구현하려 했고, 그때 등장하는 것이 실천적 비평과 꼼꼼히 읽기이다. 실천적 비평은 작품을 단지 형식의 완성도나 교훈으로 판단하지 않고, 텍스트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감각과 가치판단이 무엇인지 직접 읽기 행위 속에서 가려내려는 태도였다. 그리고 꼼꼼히 읽기는 그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어휘 선택, 리듬, 비유, 아이러니 같은 세부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작품이 어떤 삶의 감각을 훈련시키는지 점검하는 방식이었다. 리비스가 ‘삶’과 ‘구체성’을 강조할수록 문제는 기준의 부재가 아니라 기준의 은폐다. ‘좋은 삶/좋은 언어’가 무엇인지 논증하기보다 직관과 권위에 기대어 자명한 것으로 만들 때, 그 공백은 결국 특정 계급의 감각이 보편 기준처럼 작동하는 방식으로 메워진다.


하지만 ‘삶’을 강조하는 [스크루티니]지의 접근법은 포스트구조주의자의 문제와 비슷하다. 둘의 공통점은 ‘기준의 근거’를 명시하지 않을 때 그 공백을 결국 권위(누가 판단하나)가 메우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 ‘삶’이란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삶, 고용주의 삶 그리고 군인의 삶등 여러 가지의 삶이 있는데 나름대로의 삶은 그 자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삶이 의미 있고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을 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스크루티니]지의 삶에 대한 강조는 기준을 명시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후기 구조주의 특히 데리다가 차연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모든 것은 해체해야 한다고 했을 때,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같은 의문이 [스크루티니]지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테리이글턴은 리비스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 황폐한 문화를 낳은 기계화된 사회를 변형시키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그것에 저항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크루티니] 지는 시작부터 기권했다고 비판했다. [스크루티니] 지는 교육을 통해서 도덕성을 기르고, 이는 영국사회에 만연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사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체제변화 없는 교육은 순응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글턴의 [스크루티니]지에 대한 비판은 조금 과하다. 칼 포퍼가 말한 것처럼, 때로는 점진적 공학이 급진적 공학보다 바람직하고 사회구성원을 보호해 줄 수 있다.


[스크루티니] 지는 문학연구의 영역에 끼어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철저한 테스트를 거치게 했다고 한다. 체제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대상이 노동자와 힘없는 대중이라는 면에서 이런 엘리트주의적 접근법은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특히 본질적 영어다움으로 표방되는 언어관은 일반 대중의 영문학에 대한 접근을 더욱 힘들게 했다. 리비스는 상업사회의 언어는 너무 추상적이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문학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단어들은 사물의 상태에 접근하여 더 이상 단어가 아닐 때 가장 건강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단어와 그 의미가 바로 대응하거나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상업사회의 언어이고 그런 대응을 볼 수 없고 읽는 이들이 추론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은 언어라는 것이다. 이런 언어관은 T.S. 엘리엇으로 시작된 모더니즘 문학의 언어관과 맞닿아 있다. 정리하면, ‘저항’의 언어는 곧 ‘본질적 언어’라는 새 규범이 되어 다시 엘리트의 심사 기준으로 굳을 수 있다.



2-5) 현상학과 해석학

2-5-1) 현상학

에드문트 후설은 유럽 학문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과학적 실증주의가 유일한 답이라는 분위기가 학문이 다루어야 할 “인간의 의미”를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가장 확실한 출발점으로 돌아가, 세계를 ‘사실’로 단정하기 전에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고 의미를 갖는지를 다시 묻고자 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에포케는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는 자명하다”는 믿음을 잠시 괄호 치는 절차다. 이 환원을 통해 남는 것은 세계에 선행하는 **초월론적 의식(순수자아)**이며, 후설은 여기서부터 세계 이해의 토대를 세울 수 있다고 본다.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지향성)이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자연태도의 전제와 습관(‘오염’이라 부를 만한 것들)에 의해 쉽게 굳어진다. 따라서 그 전제를 중지하고 의식의 작동을 파악할 수 있다면, 세계를 이해하는 더 근본적인 기초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접근이다.


후설의 현상학을 이어받은 문학비평을 ‘현상학적 문학비평’이라고 부른다. 이 접근은 작품을 역사, 사회, 작가의 의도 같은 외부 설명으로 곧장 설명하기보다는 그런 전제들은 잠시 괄호치고 텍스트가 드러내는 의식 경험의 기본구조 (지향성, 시간의식, 지평 등)를 추적하려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등대로]는 이런 독해에 잘 맞는다. 댈러웨이 부인』은 “꽃은 내가 사기로 했다”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꽃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클라리사에게 세계가 열리는 첫 표지다. 파티와 상류층 규범이라는 ‘주어진 삶’은 바뀌지 않지만, 그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는 사소한 선택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내가’ 꽃을 산다는 말은 세계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소한의 의미와 자리를 스스로 구성한다는 체감—즉 주체성—의 표현이다. 『등대로』의 등대 역시 고정된 상징이기보다, 각 인물의 욕망·기억·관계 속에서 다른 의미로 나타나는 지향점이며, 그 차이를 따라가면 작품이 구성하는 의식의 세계가 선명해진다.


테리이글턴은 ‘현상학’이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숨길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

첫째, 현상학은 사물자체에 대한 직관을 강조함으로써, 논증 토론 반박의 장을 약화시킨다. 직관이 진리의 근거가 되면 그 직관을 가진 ‘주체’가 사실상 해석의 권위를 소유하고, 그 권위는 쉽게 제도와 엘리트의 손에 들어간다.

둘째, 현상학이 언어로 자신을 진술하는 순간, 그 의식은 이미 언어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통해 매개된다. 언어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원이라면, ‘순수한 의식’의 기술은 처음부터 그 역사적 흔적을 벗어나기 어렵다.
셋째, 설령 후설의 기획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는 어디까지가 습관과 관습이고 어디까지가 의식의 보편 구조인지 명확히 가르기 어렵다. 비평가는 어딘가에서 선을 그어야 하는데, 그 경계 설정의 기준 자체가 이미 역사와 관습—나아가 권력—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댈러웨이부인]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현상이 [댈러웨이부인]이 꽃을 사게 했는지 그리고 파티에서 남자를 기다리게 했는지에 대한 해석이 들어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특히 전쟁에 참여했던 퇴역군인에게 정신병 치료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함이나 우리가 정신병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회적 관습에 대한 설명의 부재는 현상학적 비평의 한계를 드러낸다. 현상학적 독해에 사회·역사 렌즈를 접합해야 이데올로기 분석이 가능하다.


이 문제의식은 곧 해석학으로 이어진다. 해석학은 의미가 ‘순수한 주어짐’으로 확보되기보다, 언제나 선이해·전통·언어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질문은 “의식을 얼마나 순수하게 볼 수 있는가”에서 “우리가 이미 가진 해석의 조건을 어떻게 자각하고 갱신할 것인가”로 이동한다



2-5-2) 해석학

a. 하이데거

테리이글턴은 “후설에서 하이데거로 발길을 옮기는 것은 순수지성의 영역으로부터, 살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느껴지는가에 대해 명상하는 철학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이는 후설이 살아있는 인간의 부재의 문제의식이 하이데거에 의해 해소됨을 말한다.


후설이 ‘세계의 자명함’을 괄호치고 의식의 순수한 구조를 찾으려 했다면, 하이데거는 인간이 이미 세계-내-존재로 던져져 있고 이해는 언제나 선이해(예지·예시·예파)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전면화한다. 우리는 망치를 먼저 ‘물체’로 인식한 뒤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못을 치는 도구로 이해한다. 하이데게에 있어서 세상은 인간이 세계-내-존재로서 지식의 지평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다. 텍스트 역시 처음부터 어떤 의미망 속에서 있다. 따라서 독해는 전제 없는 관찰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지평을 드러내고 수정하는 과정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집중한다. 우리는 존재자들의 그물망인 세계에 살고 있고 모든 존재자는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 살면서 다양한 존재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이글턴이 보기에 하이데거의 철학은 역사를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자연화함으로써 그 속에 감춰진 물질적 이해관계를 소거해 버린다. 선이해와 전통을 긍정하는 해석학이 ‘전통은 곧 진리의 통로’처럼 굳어질 때, 그 전통은 국가·민족 같은 집합적 이름으로 쉽게 권위화될 수 있다.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하이데거의 신비주의는, 그것이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호명될 때 비판적 사유를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맹점이 된다. 결국 하이데거식 해석학에서 역사는 투쟁의 장이 아니라 숙명적인 수용의 대상이 되며, 이는 체제에 대한 저항 대신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보수적 순응주의로 귀결될 위험을 안고 있다.



b. 가다머

테리이글턴은 “가다머에 있어서 한 문학작품의 의미는 그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철저히 규명되는 건 아니다. 그 작품이 하나의 문학적 혹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다른 문화적 사회적 맥락으로 넘어감에 따라 그 작품의 작가나 동시대 작품들이 아마도 결코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의미들이 그 작품에서 채집될 수 있다.”를 통해 가다머의 해석학을 소개한다.


가다머는 “작품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다. 이는 현재의 질문에 따라 과거의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는 생산적이고 텍스트는 이해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하지만 가다머의 해석이 무한정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의 지식의 지평과 과거의 지식의 지평은 전통을 통해서 만난다. 전통이라는 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텍스트를 만나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후설과는 다르게 전통의 결과인 선이해는 이해에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로 우리를 이끄는 가이드라인 같은 것이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해석학과 유사하다. 가다머 또한 전통이 누구의 전통인지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전통의 형성과정은 역사이고 이데올로기는 항상 바뀐다는 것을 망각한다. 역사는 하나로 이어지는 지평이 아니라 끊어지고 파괴되고 또한 이어지는 굴곡인 것이다. 또한, 가다머의 해석학은 문학작품이 하나의 유기적 통일을 이룬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이를 하나로 묶으려는 그의 시도는 오히려 문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할 수 있다.



2-6) 수용이론

가다머가 전통이라는 거대한 집을 강조했다면, 수용이론은 집안에서 문학을 접하는 독자를 강조한다. 이저에게 텍스트는 완성된 의미가 아니라, 독자가 읽는 과정에서 공백(간극)을 채우며 구체화되는 과정이다. 볼프강 이저는, 문학작품은 간극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간극을 채우는 과정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특성에 따라 정보의 촘촘함의 차이는 있겠지만 문학작품은 해석에 필요한 정보를 완전히 닫아 제공하지 않으며, 독자는 자신의 선이해와 추론으로 그 공백을 메워 간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이해와 추론등을 통해서 간극을 매워가며 이해한다. 독서는 선형적으로 진행되지만, 뒤에서 얻은 정보가 앞의 공백을 다시 해석하게 만들면서 의미가 왕복적으로 수정된다. 그리고 수용이론은 독자들이 글을 읽으면서 재미와 감동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서 ‘약호’란 장르 관습, 문체, 서술 방식처럼 독자가 의미를 구성할 때 사용하는 암묵적 규칙이다. 우리가 길거리의 표지판을 읽을 때와 문학작품을 읽을 때 감정의 차이를 느끼는 이유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약호들과 문학작품 내의 약호들이 불일치하고 그 불일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테리이글턴은 이러한 이저의 이론을 두 가지 측면에서 날카롭게 비판한다.

첫째, 이저의 수용이론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독서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진리는 아니고 바뀔 수 있다는 열린 마음과 유연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주어진 이데올로기를 포기할 수 있는 준비가 된 독자만이 해석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독자관은 무력하고 모순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교육과정과 관습적 생활양식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강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암묵적으로 ‘유연하고 열린 독자’를 이상형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강한 이데올로기적 습관을 가진 독자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약점이 생긴다. 실제로 많은 독자는 교육과 관습을 통해 이미 굳어진 신념을 갖고 있으며, 그 신념은 독서 경험만으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문학적 약호와 내가 가지고 있는 약호의 불일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의 문학이론에 대한 학습을 전제하게 된다. 문학이론이나 좋은 글은 국가나 대학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이는 다분히 엘리트주의적 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이데올로기에 취약성을 드러낸다. 또한 이는 문학을 닫힌 계로 취급한다. 볼프강 이저의 독서 모델은 기능주의적인 것으로 부분은 전체라는 유기적 통일을 향해 해석된다. 해석이 무한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특정 형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해석은 형식 안에서 순환하는 순환론적 해석학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는 독자를 특정한 해석에 가두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기능을 수행한다. 해석이 ‘텍스트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옳다고 판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 범위 자체가 독자를 규범화하는 장치가 된다.


테리이글턴은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인 판단은 없다는 것을 서론에서 밝혔다. 우리는 국가와 관습이라는 체제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판단을 내린다. 18세기 영문학으로부터 시작된 문학의 이데올로기 화는 우리가 문학을 조심스럽게 수용해야 함을 말해준다. 테리이글턴이 이제까지 소개한 문학이론에 가하는 비판은 이데올로기를 가졌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을 망각하고 스스로 중립적이라고 선포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은폐는 독자들이 이데올로기에 스며들고 있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느끼도록 착각하게 한다. 이런 문제점을 공유한 문학비평가들은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만든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새로운 접근을 만들었지만, 테리이글턴에게 이들의 시도조차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는 이데올로기에 거부하는 비평의 계보에 대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자.



3)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비평의 계보

3-1) 구조주의

이데올로기와 공모하는 기호학에서 설명된 이론들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이해에서 문학을 분석한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작가나 독자라는 개인을 배제하고 언어라는 체계에서 문학작품을 분석하려고 한다. 질문이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는가?” 에서 “우리가 의미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규칙과 차이의 체계 속에서 만들어지는가?” 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 전환은 언어를 분석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배제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인간이 문학에서 빠지면서 오히려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구조가 초역사적 보편처럼 제시되는 순간, 실제로는 특정 시대·계급이 만든 가치와 분류가 자연적 질서로 보이게 되고, 그 자연화가 이데올로기의 가장 강력한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쉬르는 그의 언어학강의에서 3가지 중요한 점을 말한다.

첫째, 소쉬르는 랑그와 빠롤을 분류하고 랑그(언어체계, 문법)에 대한 연구가 빠롤(발화행위) 보다 중요하다 생각했다. Langue가 Parole보다 중요한 이유는 Langue가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객관화되어 있어 언어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Parole은 변동성이 크고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언어 자체에 대한 설명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소쉬르는 언어 연구에서 통시적 연구보다 공시적 연구를 우선한다. 통시적 연구는 언어 변화의 역사를 추적하지만, 공시적 연구는 특정 시점에 작동하는 언어 체계의 관계망을 분석한다. 소쉬르에게 언어는 관계들의 체계이므로, 변화의 원인을 묻기 전에 그 시점의 체계가 어떻게 의미를 배치하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통시적 변화 역시 결국 어떤 순간의 새로운 공시적 배치로 ‘정착’한다는 점에서, 통시는 공시의 분석을 전제한다.


셋째,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다. 특정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나 소리를 말한다. "사과"라는 음성과 문자는 기표에 해당한다. 반면에, 기의는 기표가 나타내는 내용을 의미한다. "사과"라는 기표가 뜻하는 사물로서의 "사과"가 기의이다. 이제까지 언어는 특정사물을 나타내는 진리에 가까웠지만, 소쉬르에 의하면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다른 기표 혹은 기의들과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이 빨간 과일이 사과인 이유는 이게 배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관을 문학 비평에 적용한 것이 구조주의 문학비평이다. 구조주의 문학비평은 작가와 의도나 사회적 맥락 그리고 독자가 이해하는 방식등은 괄호 쳐 놓고 문학 작품 안에서의 기호의 체계에 집중한다. 기의와 기표의 의미는 체계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소쉬르의 언어관을 계승한 구조주의로서는 당연한 결과다. 왜냐하면 작가의 의도는 작가가 사용한 언어라는 기호의 체계의 차이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은 어떤 이항대립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정상으로 설정되며, 이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하는 매개는 어떤 것인가?” 등의 질문을 한다. 이는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분석하여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항대립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대립을 극복하는 매개의 변주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a. 장점

구조주의의 장점은 문학의 탈 신비화다. 이제까지 문학은 독자들이 보지 못하는 바를 찾아낸 천재(낭만주의)라는 입장 혹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수용이론) 등으로 무언가 특별한 결과물로서 취급되어 왔다. 우리는 이미, 문학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선택되고 유지될 뿐만 아니라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데올로기화 되었음을 논의했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문학 자체가 언어의 체계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음을 또한 정해진 몇 가지 체계의 표현임을 말한다. 이는 문학의 신비성을 부정하고 탈 물신화 하게 만든다.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시작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함을 깨닫고 그 의미를 부정하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문학의 탈 신비화는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레비스트로스가 사르트르와의 논쟁에서 야만과 문명의 대비가 부질없음을 보여준 것처럼 구조주의는 권력층이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 권력층이 된 것은 아니기에 문화사대주의에서 벗어나고 언제든지 권력층에 의문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b. 단점

하지만 구조주의의 한계점은 명백하다.

첫째, 문학은 엄연하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도구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구조주의의 출현으로 힘을 잃었지만, 구조를 극복하고 인간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문학은 항상 그 근저에 놓여있었다. 구조주의는 인간과 사회를 문학비평에서 제외함으로써 역사의 원동력으로서의 인간을 사상한 것이다.


둘째, 언어의 의미는 체계에 의해서 변할 수 있지만 동일한 체계 안에서 매개된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대통령, 정치인이 할 때와 노동자, 노숙자가 할 때 그 의미가 변한다. 이런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무시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를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하일 바흐친은 언어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의 결과라고 말했다. “군주”라는 단어는 초창기와 지금의 의미가 다르다. 이는 체계가 일으킨 변화가 아니라 “군주”에게 빼앗겼던 자유를 쟁취했던 인간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셋째, 구조주의는 상식에 대한 모욕이다. 문학을 읽으면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의미가 있다. 이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고 독자의 독특한 해석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는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거기에 반론한다. 상식적으로 떠오른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식에 반대되는 접근은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또한 엘리트주의적이다. 구조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엘리트주의가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결탁하는지에 대해 수차례 논의한 바 있고 구조주의적 문학 비평은 이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에 대한 이런 부정적 견해는 포스트구조주의로 우리를 이끌었다. 구조주의는 체계 속에서 의미가 결정되고 고정된다고 믿었지만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 이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구조주의가 고정된 체계(감옥)를 만들었다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폭로하며 감옥을 부수고 나온다



3-2) 후기구조주의

a. 데리다

소쉬르는 기표–기의의 결합이 자연적 필연이 아니라 자의적이라고 보지만, 동시에 그 결합이 사회적 관습(랑그) 속에서 일정하게 안정화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강아지’라는 기표가 ‘어린 개’라는 기의와 연결되는 것은 자연적 필연이 아니라 관습적 약속이다. 다만 그 의미는 ‘고양이’, ‘개’, ‘새끼’ 같은 다른 기표들과의 차이 속에서 규정되며, 한 언어공동체 안에서는 그 결합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강아지라는 기표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기표에 결합된 기의는 다른 기의들 과의 차이로 인해 생긴 의미인데, 이런 차이는 계속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강아지는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가 되었지만, 강아지는 독수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는 언어체계 안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데리다의 해석을 따를 경우, 기표의 의미는 다른 의미들과의 차이에 의해 생긴다. 그리고 언어의 연결망은 무한하기 때문에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지연된다. 해석은 가능하지만, 의미가 계속 미뤄지기 때문에 완전한 최종 확정은 어렵다. 기표가 다른 기표와의 차이로 인해 의미가 생긴다면, 담론이 바뀌면 예전의 의미는 흔들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기표의 의미가 변화했기 때문에 과거에 그 기표와의 차이로 인해 결정된 의미도 변화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생성된다. 개인은 자아를 이해할 때 언어(기표/기의)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어적 도구의 가변성은 자아 이해 역시 완전히 고정·확정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테리이글턴에 따르면, 데리다는 “의미의 전 위계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결점 없는 기초, 제1 원리나 반박 불가능한 토대에 의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형이상학적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라고 말했는데, 그래서 그의 해체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자연화된 위계를 폭로하고 그 토대를 흔든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세상을 남과 여의 대립으로 보고 남성중심적인 사회는 남자를 여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취급한다. 제1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의미는 차이로 생긴다는 것에 착안한 데리다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건, 이데올로기적 접근일 뿐이고 오히려 남자는 여자와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생긴다고 본다. 따라서 해체주의에 따르면, “여성은 부정적이 어떤 것이 아니라 남성이 아닌 것의 이미지로 남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성이 없으면 남성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해체주의의 또 다른 예시는 “말”과 “글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로 이어지는 육성 중심의 서양 사상은 로고스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글은 매개를 거치기 때문에 의미가 왜곡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글의 성질을 그대로 지닌다. 말에 사용되는 음운도 기호이고, 말을 이해하는 타자는 말을 매개해서 듣고, 맥락에 따라 말의 의미도 바뀐다. 이는 말이 글을 비판하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뜻하고, 말과 글의 위계질서는 이데올로기적 위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체주의의 요점은 ‘동등’이 아니라, 위계를 자연처럼 보이게 만든 장치 자체를 흔드는 데 있다.



b. 롤랑바르트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롤랑바르트는 저자는 스크립터 일뿐 창조주는 아니라고 선언했다. 테리이글턴은 롤랑바르트에 있어 건강한 기호는 “자신의 자의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즉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려 하지 않고 의미를 전달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위치 같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롤랑바르트는 데리다와 같이 기의와 기표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이 결합은 계속해서 바꿀 수 있다는데 동의했다. 롤랑바르트의 특이점은, 단어와 의미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저자의 관계에 집중한다.


롤랑바르트에게 사실주의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주의 문학은 언어가 특정한 사건 혹은 물질을 사실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미가 차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면 이런 결합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언어란 주변에 산재해 있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그의 생각은 저자에게로 옮겨간다.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의미를 직접전달 할 수 없다. 저자는 단순한 스크립터이다. 존재하는 기호를 텍스트라는 장에 재배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살아 있는 시대에 그가 생각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가장 적합한 기호를 배치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후기구조주의자에게 배치라는 행위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저자는 기호를 배치하는 와중에도 자기가 만들어낸 의미를 변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들어진 작품의 의미는 탄생과 함께 소멸한다. 텍스트를 받아 든 독자는 작품을 다시 쓰지 않지만, 읽는 과정에서 기호를 재배치하고 의미의 차이를 다시 만들어낸다. 과거와 지금은 영겁의 차이를 가진다. 따라서, “저자는 죽었고” 독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즉 ‘저자의 죽음’은 독자의 자유 선언이 아니라, 의미의 소유권을 보증하던 권위 장치를 무너뜨리는 사건이다.



c. 단점

첫째, 후기구조주의는 철옹성이 되어 비린 자본주의 앞에서 무력해진 지식인들이 글로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테리이글턴은 자본주의는 이미 사회전반을 장악했고, 지식인들은 무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글 안에서 자유를 찾았다. 글을 해체하고 다시 배열하는 과정에서 실제사회에서는 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과 문학이 정치적 행동에서 멀어진다면 억압받는 대중들 또한 정치적 행동에서 멀어진다.


둘째, 테리이글턴은 “후기구조주의적 교리의 장점은, 자신이 스스로 믿음을 선택하지 않고도 다른 모든 믿음들을 맘껏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후기구조주의는 복잡한 세상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수고로부터 도피하고 단순히 타자를 비난하고 검토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는 말이다. 문득 보기에 이는 타당해 보인다. 인류의 역사가 억압과 이로부터 자유의 쟁취를 뜻한다면, 체계에 대한 믿음은 억압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체계에 맞서는 행동은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이유는 더 좋은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관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 세상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에서만 얻을 수 있다. 후기 구조주의적 접근은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는 믿음을 빼앗았을 뿐, 이데올로기에는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모든 믿음이 문제가 있다면 현행 이데올로기는 문제 있는 믿음의 하나 일 뿐 최악의 믿음은 아니다. 또한 이데올로기에 억압받는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기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3-3) 정신분석학

a.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억압된 에너지가 분출되어 문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모든 인간은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쾌락을 누르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현실원리를 따를 때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 테리이글턴은 이를 “인간은 자기를 만든 것을 억누르면서 형성된다.”라고 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이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억누르고 세워진 건축물이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생존을 위해 이를 누르고 현실원리를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억눌린 쾌락은 파괴되지 않고 무의식에 쌓이고 이는 억압정도에 따라 승화룰 통해 예술과 문명이 되거나 혹은 신경증이라는 파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쾌락원리가 현실원리로 바뀌는 과정을 가족 내에서 보여준다. 인간에게 있어 부모의 양육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스스로 우유도 마실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다. 여성의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사회적 특성으로 인해 아이의 양육을 어머니가 대부분 책임진다. (현재 많이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참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이들은 어머니와의 생활에서 쾌락을 느낀다. 배고플 때,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배고픔에서 해방되는 쾌락을 느끼고, 속이 답답할 때 대변을 보면서 쾌락을 느낀다. 쾌락의 대상인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성적대상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등장으로 모든 게 바뀐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로서 아들의 성적 대상이 될 수 없다. 쾌락을 추구할 경우 아버지에 의해 거세당할 수 있다는 위협에 직면한다.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자 하는 쾌락원리를 버리고 가족 구성원이 되는 현실원리를 선택한다. 딸은 남자의 성기가 없는 어머니를 경멸하고 아버지를 유혹하려 하지만, 이 쾌락원리는 가족구성원이라는 현실원리에 의해 억압당하고 어머니와 자기를 동일시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두 가지 면에서 이데올로기의 신화에 도전한다.

첫째,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무의식에 묻어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 무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은폐되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이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합리성이 쌓아 올린 것으로 간주되는 이데올로기조차 무의식의 결과라면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항상 옳다는 자연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 이데올로기가 옳다고 하더라도 분별없는 개인의 욕망의 억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개인은 단체의 목적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관념에서 적절한 욕망의 분출이 승화의 전제조건임을 역설한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수 있게 해 준다.


프로이트에게 노이로제의 치료는 환자가 억누른 욕망을 정신과 의사에게 전이함에 따라 치료할 수 있다. 그리고 환자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우리는 상담 혹은 꿈을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꿈이란 언어와 같이 이미지와 의미가 결합되지 않고 여러 가지 상징과 우회를 통해 나타난다. 이는 다양한 문학작품이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어떤 고정된 의미도 가질 수 없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전이와 치료를 할 수 있다면 억압된 욕망을 적절히 보여주는 문학작품은 바람직하다. 또한, 문학은 꿈과 같다. 문학작품 내의 상징은 꿈에서의 상징처럼 다양하기 때문에 해석 또한 다양하게 될 수 있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쓴 글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쓴 글에 더 큰 상징이 묻어있다. 비평가는 내용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무의식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찾아내야 하고 이는 문학을 고정하려는 이데올로기를 흔든다.



b. 라캉

라캉이 [에크리]에서 추구하고자 한 바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담론이론의 견지에서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욕망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아기들은 자신의 육체를 파편화된 상태로 인식한다. 아기는 자기 손이 자기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손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긁기 때문에 손싸개를 한다.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는 파편화된 신체의 체감이 거울 이미지를 통해 전체인 나로 묶이는 질서이며 이때 자아는 이미지와 동일시로 구성된다. 거울에 비친 나의 완벽한 모습에 아이는 환희를 느끼고 나르시스트적 성향을 가진다. 여기서 아이가 동일시하는 것은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외부 이미지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일치할 수 없는 아이는 자기를 좋아함과 동시에 열등감을 느낀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가 거울의 이미지를 ‘나’로 확정받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호명당해야 한다. 언어로 “너는 저 아이야.”라는 확정적 선언을 들었을 때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라캉에게 언어는 나를 ‘표현’하는 도구라기보다, 나를 어떤 자리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어긋나게 만드는 질서다. “착한 아들”, “예쁜 딸”등의 언어로 아이가 규정되는 순간 아이는 언어에 의해 배치된다. 라캉에게 핵심은 ‘의미 지연을 학습한다’가 아니라, 기표(이름·호명)가 주체를 한 자리로 규정하는 동시에, 그 규정과 자아 이미지 사이에 간극(분열)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세상에서 나를 배치하는 언어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은,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 지어졌음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욕망의 에너지가 응축된 것이라고 한 반면, 라캉에게 무의식은 외부에서 언어에 의해 재배치된 나와 진짜 나를 찾으려는 자아 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a와 b 모두 분홍색 곰을 좋아한다고 치자. 두 명 모두 중요한 자리에 분홍색 곰을 모자로 쓰고 싶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규정된 자리에 의해 a와 b의 욕망은 나누어진다. a가 정치인이라면 공식적인 자리에 분홍색 곰 모자를 쓰고 가지 못하고 그 곰은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반면에 b가 어린이집 교사라면, 어린이집 행사에 분홍색 곰 모자를 쓰고 가는 것은 억눌려야 하는 욕망이 아니다. 따라서, b에게 욕망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처럼, 라캉의 욕망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c. 비판

테리이글턴은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는 정신분석학적 문학비평을 비판한다. 물론 라캉은 정신의 문제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개인적이다. 문학 작품에서 주인공이 불행한 이유는 “주인공과 아버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혹은 권위주의적 가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항상 노이로제에 시달린다.” 같은 접근이다. 억압적 가정에서의 문제가 지금의 나로 이어졌다는 표현은 올바른 접근일 수 있다. 하지만, 폭군적인 아버지 권위주의적 가정이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개인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기저에서 관계 형성에 주도권을 쥔 사회라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또한 정신분석학적 문학비평 또한 엘리트적이다. 텍스트 안에 산재해 있는 많은 상징에 대한 해석의 주도권은 정신분석학을 배운 엘리트 들만이 가질 수 있다. 정신분석학을 배우지 않은 독자의 해석은 엘리트들에 의해 쉽게 반박된다. 대학 교육을 받고 몇 년 동안 연구실에서 연구를 한 후에야 학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자들은 제도권에 포섭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이글턴의 담론 이론과 한계

테리이글턴에게 “문학은 무엇일까?” 이제까지 소개한 문학이론에 대한 테리이글턴의 입장은 명백하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문학은 없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 문학은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된다.”이다. 이글턴에게 이데올로기란 어디든지 있지만, 은폐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존재다.


테리이글턴에게 문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매개라고 읽힌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은 자신을 외화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타자와 교류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했다. 많은 작품들이 시대가 가면서 빛을 잃지만 “사상 자체”는 길이길이 남아 정신을 형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테리이글턴에게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를 타자와 교류하고 아픔을 느끼고 정의롭지 않은 이데올로기와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작품이자 “사상 자체”인 것이다. 이글턴의 문제의식은 이데올리기가 문학작품을 잠식하는 것이다. 미리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와 문학작품은 땔레야 뗄 수 없다. 오히려 문학작품이라는 그 단어가 이데올로기화 되어있다. 하지만, 문학비평이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부정할 때 이데올로기는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이글턴은 담론 이론을 주장한다. 담론 이론이란 텍스트 자체가 힘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작가나 독자가 힘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문학으로 인해 형성된 텍스트는 담론화 되고 그 자체의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담론은 복합적인 결과다. 담론 형성에 기여하는 제1 원인은 없다. 따라서, 이글턴은 자신이 소개한 모든 문학비평이론이 복합적으로 쓰이기를 원한다. 물론 모든 이론을 한곳에 집중해서 쓸 수는 없지만, 한 가지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비평을 종합적으로 쓸 때 이데올로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의 관점에도 문제점은 존재한다.

첫째, 이글턴은 이데올로기 환원론적이다. 모든 문학비평이론에 대해 부정적일 수 있는 이유는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행동적이지 않은 이론은 그 앞에서는 비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이란 그 자체의 즐거움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이데오롤기에 대한 대항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큰 희생도 있어야 하고 또한 어떤 의미를 발견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희생과 용기를 동반한 행동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때만 가능하다. 나는 여기서 사회경제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즐거움을 느끼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고 또한 타자와의 교류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문학의 즐겁고 가볍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이글턴은 사회체제 속의 변화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것이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주된 비판이다. 하지만, 칼 포퍼가 점진적 공학의 중요성을 말했듯이 급지적 접근만이 꼭 정답은 아니다. 체제가 문제가 있어도 체제 내에서 도덕적인 인물들의 등장은 우리의 삶을 더욱 값어치 있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비도덕적 혁명의 결과를 목격했다. 소련의 공산당은 급진적 공학을 위해 도덕성을 내던지고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비도덕성은 참사로 나타났다. 낭만주의가 도덕성을 함양하고 자본주의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셋째, 엘리트주의는 이글턴에게서도 보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래서 엘리트 적이다. 행동하지 않고 문학을 즐기는 보통사람의 비평과 문학을 폄하하고 비평하는 태도는 엘리트와 비엘리트를 나누고 사회를 변화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문학은 문학의 힘이 있다. 그리고 문학은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더 좋은 방향에 대한 기준은 혁명도 아니요 싸움도 아니라 독자들이 더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정리하면, 문학의 ‘더 좋은 방향’은 혁명/순응의 이분법이 아니라, 독자가 더 인간다운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감각과 판단의 재훈련이다.



5) AI 시대의 문학과 이데올로기: 분류와 독서의 자동화

최근 “딸깍 출판”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에는 출판물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일정 부수 납본(의무 제출) 되도록 하는 제도가 있고, 이 제도는 ‘의무 구매’가 아니라 ‘의무 제출’과 보상 절차로 작동한다. 이러한 법을 악용한 한 출판사가 생성형 AI를 통해서 대량의 책을 발간하고 보조금을 받아간 것이다. AI 시대에 문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새로운 문학 비평이 나올 것인가?? 인간은 작가로서의 자리는 AI에게 내주어야 할 것인가??


여러 가지 답변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하겠다.

생성형 AI는 아직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만들지 못한다. 이 도구는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스스로 학습하여 평균치를 생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AI는 이데올로기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준다. 이글턴이 주장은 “이데올로기가 은폐되었을 때 문제가 생긴다”라고 우리는 누누이 이야기해 왔다. AI는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를 밝혀낼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 기술은 사기업이 가지고 있고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될 것이다. 사기업들이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정부 이데올로기에 봉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AI가 계속해서 평균적인 입장을 보여준다면,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AI 문학을 읽고 판단하고 비평하는 것으로 현재 지배 이데올로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는 AI의 핵심 기술이기 때문에 변화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하지만, 문제도 있다. 지금의 세대는 생성형 AI를 이용해서 학습하고 읽고 분석하는데 길들여져 있다. 이런 편리함은 젊은 세대로부터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을 것이다. 이들은 AI문학이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음에 보지 못하고 그것에 길들여져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읽기와 분석 능력은 다음 세대가 갖추어야 할 필수역량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AI에 포획되지 않고 사용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AI 시대의 문학은 ‘창작’보다 ‘분류’의 싸움이 되고, 독해 능력은 그 싸움에서 인간이 빠져나올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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