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자본론』으로 읽는 현대 자본주의의 도덕성
(1) 서론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오랜 금기의 언어였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역시 공산주의를 정당화하는 위험한 책처럼 취급되어 왔다. 2025년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서울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우기를 희망했지만 그들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이는 한국전쟁 후 75년이 지난 오늘에도 “자본론”이 대한민국에서 설 자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상처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본론”이 우리 사회에서 배척되는 게 단순히 한국전쟁 때문이라는 것은 정당할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자본론』에 대한 거부감은 단지 냉전의 기억 때문만이 아니라, 이 책이 자본주의를 너무 근본적으로 질문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한민국이 우리의 시스템을 부정하는 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자본론”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지 묵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찾는 것이 발전의 시작이고, 만약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론”이 주는 통찰력은 숨겨두지 말고 드러내서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우리 사회에 돌아다니는 공산주의 유령의 실체를 밝히는 방법일 것이다.
(2) 자본주의의 탄생
a. 상품의 이중성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진다.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진다. 사용가치란 상품의 쓸모, 즉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는 유용성이다. 예를 들어 망치는 못을 박는 데 쓰이고, 빵은 먹는 데 쓰인다. 그러나 상품은 단지 쓸모 있는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 상품사회에서 그것은 다른 상품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며, 이때 드러나는 것이 교환가치다. 예를 들어 망치 하나가 못 열 개와 교환될 수 있다면, 우리는 망치와 못이 전혀 다른 사용가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통된 기준 아래에서 비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공통성을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서 찾는다. 즉 교환가치는 개별 상품의 주관적 중요성이나 단순한 희소성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상품들 안에 들어 있는 노동이 하나의 사회적 기준 아래 비교되는 방식이다. 이처럼, 교환가치가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어떤 상품이 중요한지는 그들이 사는 커뮤니티의 문화나 생활양식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상품과 상품이 교환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못과 망치를 교환할 수 있는 이유는 못과 망치를 만드는데 드는 노동시간을 환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망치를 만드는데 드는 시간이 못 10개를 만드는데 드는 시간과 같다면 우리는 망치와 못을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b. 노동의 이중성
하지만, 노동이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같은 효율을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상품의 교환이 가능하려면, 서로 다른 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 역시 어떤 공통 기준 아래 비교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의 이중성을 말한다. 먼저 구체적 노동은 망치를 만드는 노동, 옷을 짓는 노동, 빵을 굽는 노동처럼 서로 다른 종류의 유용한 노동을 뜻한다. 이러한 노동은 각기 다른 사용가치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상품사회에서는 이처럼 질적으로 다른 노동들이 교환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기준 아래 비교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추상적 노동이다. 추상적 노동이란 서로 다른 구체적 노동들의 차이가 지워진 채, 인간노동 일반으로 파악되는 노동을 뜻한다. 따라서 상품이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상품들 안에 들어 있는 서로 다른 노동이 사회적으로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되어 비교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c. 화폐의 등장
생산력의 증가로 인해 사회구성원이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이 생산되게 되었다. 우리는 이를 잉여생산품이라고 부른다. 더 많이 생산된 옷은 가치가 없기에 사람들은 잉여생산품을 시장에서 다른 물품과 교환한다. 망치 1개 = 못 10개, 못 100개 = 코트 1개처럼 처음에는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2가지 문제에 맞닥뜨렸다.
첫째, 편리성의 문제다. 교환당시에 내가 원하는 상품을 찾기 못하거나 내가 원하는 상품을 가진 상대와 교환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욕구 충족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상품을 이동시키는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상품을 이동할 때 상품이 파괴되거나 도둑맞을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교환가치를 가진 더 가벼운 형태가 필요했다.
둘째, 물물교환에서는 각 상품의 사용가치가 사회적 문화와 생활양식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기 때문에 교환관계가 안정적으로 고정되기 어렵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코트가 더 중요하고, 다른 공동체에서는 곡물이나 도구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상품교환이 일반화되려면 이런 개별적·문화적 차이를 넘어 서로 다른 상품의 가치들을 하나의 공통된 사회적 척도로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각 상품이 제각기 다른 상품을 통해 가치를 표현하는 분산된 상태를 넘어서, 하나의 특정 상품이 일반적 등가물로 고정될 필요가 생긴다.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이 화폐다. 하나의 특정 상품이 일반적 등가물로 고정되며 화폐가 등장했다.
d. 물신화
망치를 만드는데, 든 시간 인간의 노력등 상품을 교환하거나 사용할 때 인간은 상품에서 인간의 사회적 노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상품교환이 일반화되면서 그 가치가 화폐라는 일반적 등가물로 통일적으로 표현되면서 물사회적 관계가 사물의 관계처럼 나타난다. 마르크스에게 물신화란, 본래 상품의 가치와 교환이 인간들의 사회적 노동관계에서 생겨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품사회에서는 그 관계가 직접 보이지 않고 상품과 화폐의 관계로 나타나는 전도된 현상이다. 화폐는 인간이 만든 일반적 등가물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를 가장 강하게 대표하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이 화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물신화는 자본주의를 자연스럽고 정당한 질서처럼 보이게 만드는 핵심 인식 형식이면서 인간의 착취를 가리고 정당화한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반응한다. 너무 적은 임금, 비인간적 삶은 인간이 자본주의적 구조에 저항하게 할 유인을 제공하지만 물신화된 세계에서는 착취의 구조보다는 공정한 교환과 자연스러운 질서가 부각된다. 적은 임금은 수요와 공급에 인해 결정된 것이고 이윤은 자본에 대한 자연스러운 보상이다. 자본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더 큰 자본으로 돌아오지만 자본이 자본을 낳는다는 인식은 물신화의 전형적 예시다. 이처럼, 물신화는 자본주의에 참여자들에게 도덕적 완충제로 작용하여 자본가를 단지 자본의 의지를 수행하는 인격화된 집행자에 불과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안에서의 구조는 가격 경쟁 효율 등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3) 왜 자본은 자기 증식을 요구하는가?
상품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자기가 가진 상품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구는 교환을 통해 충족된다. 인간은 욕구 충족을 위해 행동하고 이는 교환이 활발한 상품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이 상품 자체의 가치를 높여주지 않더라도 욕구충족을 위해 일어난다. 하지만, 자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이 자본가와 노동자의 행동을 규정하는 사회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물신화를 통해서 자본이 인간의 형태를 가진다는 통찰을 보여줬다. 인간은 욕구 충족을 위해 행동하지만, 자본은 다르게 운동한다. 자본은 인간처럼 욕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더 큰 가치로 돌아오지 않으면 자본으로 기능할 수 없는 운동형식이다. 따라서 자본의 투입은 단순한 교환이나 보존이 아니라, 자기 증식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여기에 자본을 가진 자본가가 직면한 경쟁이나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이 자본의 증식에 요구에 강하게 반응한다.
그렇다면 자본의 투입으로 어떻게 자본이 증식할 수 있을까?
먼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이 본래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로 판매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2가지 경우에 가능하다. 첫째, 신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사회 평균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생산되어 일시적인 초과이윤을 얻을 때이다. 이때는 단기간 자본의 자기 증식은 일어날 수 있지만, 다른 회사들이 같은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면 판매자가 상품의 내재 가치보다 높은 이득을 얻을 수 없다. 둘째, 속임수를 통해서 판매자가 작품의 내재 가치보다 높은 이득을 통해 자본의 증식을 이뤄낼 수 있지만, 국가가 속임수를 처벌하기도 하고 속임수가 만연하면 시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길게 유지될 수 없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노동력 착취를 통해서 자본이 자기증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력이 중요한 이유는 이 상품이 두 측면을 가지기 때문이다. 첫째,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먹고 자고 쉬며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유지·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에 의해 결정된다. 둘째,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실제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신발을 만들었다면 노동자는 그 신발에 새로운 가치를 부가한다.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기존 가치를 보존·이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부가한다. 투입된 자본이 상품의 내재가치를 속이지 않고 자기 증식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자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드는 지불하는 비용이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보다 적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을 판매하고 그 이익금으로 자본이 증식된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자본가의 탐욕인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계속해서 자기증식하려고 하고 한 자본은 경쟁을 통해서 다른 자본을 집어삼킨다. 이처럼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이 노동력 착취를 구조적으로 요구하고, 경쟁은 이를 개별 자본가에게 강제한다.
(4) 자본주의는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현대사회를 과거 마르크스가 경험했던 사회와 동일시할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가 일부 문제를 완화했더라도, 격차의 정당성 문제는 남는다 자본가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해 부자가 되고 노동자의 삶을 분명 더 나아졌지만, 격차는 더욱 커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격차는 정당한가?
먼저, 자본가가 부를 더욱 축적하는 게 정당하는 쪽은 자본가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자본가는 자본을 통해 기계를 구입하고 혁신적 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한다. 그리고 투자의 실패는 고스란히 그들이 책임이 된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정해진 일을 하고 퇴근하기에 자본가 보다 적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업이 망하면 실업자가 되겠지만, 기업가가 지는 만큼의 위험을 지지는 않는다고 자본가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실업은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자본가만큼 큰 위험을 지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이 누리는 엄청난 이익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빈부 격차의 도덕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의의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보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자본가는 자본을 투입하고 노동자는 노동을 하고 잉여가치가 발생한다. 그럼 잉여가치의 보상을 받을 자격은 어디서 생기는가?
산출된 가치는 투입에 따라 좌지우지되기에 투입의 규모를 따져봐야 한다. 자본가는 자본의 투입이 산출된 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은 노동 없이는 스스로 새 가치를 창출할 수 없고, 새 가치를 만들어내는 결정적 계기는 살아 있는 노동이다. 노동도 자본이 필요하지만, 자본은 노동 없이는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노동은 자본이 구입한 기계를 고치고 사용하면서 기계의 효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가져온 연료와 재료가 상하거나 없어지지 않도록 보전하면서 가치를 창출한다. 이런 일련의 계기들에서 자본만큼 노동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노동자가 모든 잉여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데 큰 기여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만큼 노동자도 큰 기여를 한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빈부격차는 도덕적이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5) 결론
마르크스의 예언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본론』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보다 지금의 현실이 중요하듯,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할지에 대한 논의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닐지라도 빈부격차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자본가의 잉여가치 독식을 정당화하는 논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자본론이 현실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의 결과보다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왜 우리는 빈부격차를 받아들이는 것인가? 왜 우리는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물신화를 통해 인간을 시장에서 지워낸 자본주의의 힘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