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1) 서론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을 꾸다 깨어났고 끔찍한 해충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변신”은 많은 논란을 낳은 작품이다. 충격적인 시작과 함께 시작되기에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 벌레로의 변신인가? 에 대한 많은 해석을 했다. 실존주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기 비하와 같은 심리학적 해석은 “변신”을 읽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변신”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고 이에 나는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을 이용해서 “변신”을 해석하고자 한다. 물론 벌레, 가족, 사과 등에 대한 상징적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징들을 자의적으로 고정하지 않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과 사물화의 구조를 드러낼 때에만 제한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2) 줄거리
어느 날 잠에서 깬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깨닫는다. 커다란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품 외판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지만 아버지에 의해 방에 감금당한다. 벌레로 변한 뒤에 자그마한 자유를 느낀다. 하지만, 방을 청소하러 온 어머니가 기절하고 이에 격분한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잠자의 경제활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가족은 부족한 수익을 메우기 위해 각자 일을 시작하고 하숙인까지 들인다. 하숙인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동생을 보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간 잠자는 하숙인들에게 발견되고 하숙인들은 잠자 가족을 협박한다. 이에 누이는 더 이상 벌레를 오빠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사건 이후 잠자는 죽게 된다. 잠자의 시체를 처리한 후 가족들은 밝은 미래를 꿈꾸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3) 실존주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라 루카치의 총체성의 부재로 “변신”을 해석하는 이유
3-1) 실존주의
카프카는 카뮈, 사르트르 등에 의해 실존주의 작가로 읽혀 왔다. 이에 많은 비평가들이 “변신”을 인간이라는 족쇄를 벗어던지 인간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실존주의 소설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카프카의 “변신”을 해석하는데 한계를 가진다.
첫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선택을 중요시 여긴다. 하지만, 잠자는 “변신”에서 실존적 선택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잠자를 방으로 밀어 넣었을 때, 잠자는 방에 잠자코 있는다. 또한, 아버지가 사과를 던지고 누이가 자신이 괴물이라고 불렀을 때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가 잠자의 방을 청소하고 재배치할 때도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다. 이는 “변신”의 초점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벌레로 변한 잠자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소외되는 사회적 구조에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아무 이유도 없이 벌레로 변해버린, 잠자의 상황과 비슷하다. 하지만, 카뮈의 부조리 철학의 핵심은 이방인의 뫼르소가 감옥에서 행복을 느끼고, 페스트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연대를 통해서 부조리와 싸워나가는 것처럼 부조리의 대항이 주된 요소다. 하지만, 잠자는 부조리를 받아들일 뿐 그 어떤 반항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잠자의 침묵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자아가 소거된 상태이다. 따라서 “변신”의 중심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아니라, 인간이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기능으로 환원되고 보호받지 못한 채 소외되는가에 있다.
3-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카프카가 과거에 아버지로부터 억압을 받고 고통받았다는 작가의 개인적 상황을 근거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변신”을 읽으려는 시도가 있다. 아버지가 그레고리의 등에 사과를 던지는 장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거세”의 이미지화라고 해석한다. 어떤 비평가는 잠자가 여동생의 목에 키스하는 상상을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자신을 여동생에게 복제해 아버지에게 복수하려는 상징으로 읽기도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석해 보자. 프로이트는 아기 때의 경험으로 인해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적대시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기지만 아버지의 권한과 거세의 위험 앞에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사회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변신”의 잠자는 벌레로 변신하기 전, 유일한 경제 활동자로서 아버지 이상의 권위를 가진다. 그리고 그레고리의 애정은 어머니가 아니라 누이에게로 향하고 이는 성적인 사랑이 전혀 아니다. 또한 잠자는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방에 갇히는 선택을 하면서 순응한다. 이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잠자가 아니라, 벌레로 변하고 가족의 불합리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순응하는 자유의 포기라는 측면을 보여준다. 오이디푸스에서 보여줘야 할, 본능과 사랑 그리고 억압에 따른 거세 위험이라는 플롯이 “변신”의 주된 내용이 아니기에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실존주의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변신”의 일부 장면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회적 관계의 파괴와 인간의 사물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변신”은 개인 심리의 드라마라기보다, 자본주의적 총체성의 붕괴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능과 유용성으로만 평가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3-3) 루카치의 총체성
“변신”이 자본주의로 인해서 도구화된 인간을 보여준다는 해석은 타당하다.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에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벌레로 변신하고 잔인하게 버려지는 잠자의 존재는 자본주의의 섬뜩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도구화된 인간이라는 접근은 벌레로 변신한 이유와 잠자의 직업이 상품 외판원으로 설정된 이유 등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설명한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부재 문제 그리고 인간관계와 사회 인식과 사회제도의 사물화라는 접근은 “변신”을 더욱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 루카치에 있어, 자본주의의 승리는 합리화와 계산가능성이 사회인식의 도구가 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는 소여 된 물자체로 보고 이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잠자에 대한 가족과 사회의 반응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된다. 이러한 루카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제 중요한 질문은 왜 잠자가 단순히 병들거나 실직한 것이 아니라 “벌레”로 변해야 했는가이다. 이 설정은 단순한 충격 효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드러내는 장치로 읽힐 수 있다.
4) 왜 하필 벌레인가?
카프카는 벌레를 독일어 "Ungeziefer" (운게치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벌레보다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해충의 의미로 잠자 가족의 경제생활에 해를 끼치는 벌레로 읽힐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잠자를 단순히 경제적 무능력으로 읽을 수 있지만, 설명이 충분치 않다. 나는 “벌레”를 “낯설게 하기”와 칸트의 “물자체”적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4-1) 낯설게 하기
일상생활에서 언어는 의미를 고정하고 우리와 대상의 관계를 익숙한 것으로 만든다. 반면 문학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그 관계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카프카는 인간이 벌레로 변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낯설게 하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을 꾸다 깨어났고 끔찍한 해충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하면서 독자의 시선을 끌어오고 자연화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낸다. 또한 잠자는 벌레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존재보다 외판원이라는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먼저 걱정한다. 이는 독자가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노동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변신”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구화된 인간이라는 비평이 꾸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카프카의 시도는 성공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만으로 벌레라는 “변신” 서사의 중심적 형상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카프카는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4-2) 합리주의와 자본주의
루카치는 칸트의 물자체가 자본주의의 의식형태가 드러난 철학이라고 평가한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세상은 우리가 인식한 것만 볼 수 있다고 그의 철학을 펼쳤다. 하지만, 칸트의 인식론은 합리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합리성이라는 문제를 남겼다. 그는 인간은 감성의 형식으로 외부 대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이고 오성의 12가지 범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표상이라고 했고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물자체라고 했다. 칸트는 물자체를 소여 된 것으로 우리의 인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설정했는데, 루카치에 따르면 이는 자본주의적 인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합리성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내린다고 하지만 수요와 공급, 이자율등 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 소여 되었다고 여긴다. 이런 자본주의적 자연법칙이 아무리 비합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질문하지 않고 이를 수용한다. 잠자와 가족이 벌레라는 비합리적 사건의 원인을 끝내 묻지 않고 그것을 주어진 현실로 처리하는 태도는, 자본주의 질서를 소여 된 자연법칙처럼 수용하는 사물화 된 의식을 드러낸다. 카프카가 비판하는 것은 단지 벌레라는 기괴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조차 원인과 구조를 묻지 않은 채 관리 가능한 현실로 바꾸어버리는 자본주의적 태도이다.
따라서, “변신”에서 벌레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독자에게 자본주의 체계의 자연화를 의심하게 하고 자본주의실 자연 질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에 대한 비판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5) 외판원과 지배인
5-1) 왜 하필 외판원인가?
알프레드 히치콕:은 "영화는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인생이다”라는 말로 영화가 드라마 보다 짧은 러닝타임으로 인해 밀도 높은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변신”은 매우 짧은 소설이다. 따라서, 변신에서 잠자의 직업이 외판원인 것은 우연하게 설정된 것이 아니라 카프카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잠자는 자신의 직업을 “하루가 멀다 하고 출장을 가야 하고, 잦은 기차환승을 해야 하며, 절대 알 수도 없고 친해지지도 않을 인간과 연락해야 한다”라고 한탄했다. 상품외판원을 통해서 카프카가 이야기하고자 한 자본주의의 문제는 노동의 사물화, 인간관계의 사물화 그리고 소외다.
a. 노동의 사물화
루카치는 노동의 사물화는 노동의 추상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상품의 교환을 위해서는 사물의 가치를 재는 공통의 기준이 필요하다. 시장은 상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 노동력에서 인간적 관계를 제외하고 모든 노동을 동일한 기준 즉 시간으로 재단하고 이를 공통의 기준으로 설정했다. 망치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된 인간의 땀과 노력이 아니라 몇 시간의 노동시간이 사용되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 것이다. 개별 노동자의 인간성과 관계보다는 시간으로 수량화된 노동시간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시간표를 통해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통제한다. 외판원은 기차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영업을 해야 한다.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기차시간에 늦겠다.”였다. 이처럼, 외판원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시간에 종속된 노동의 사물화를 대변한다.
b. 인간관계의 사물화
타자와 동등한 대우가 아니라 나의 개별적 상황에 맞는 대우는 유의미한 관계를 가지는데 필연적이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상품의 생산에서 사라지고 노동이 수량화되면서 자본주의는 인간관계를 화폐로 대체한다.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그 인간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로 내려진다. 잠자는 외판원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만, “절대 알 수도 없고 친해지지도 않을 인간과 연락해야 한다”라고 한탄한다. 그리고 이는 인간관계의 사물화를 보여준다.
c. 이중소외 그리고 자본주의적 유통질서의 매개자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을 외화하고 자신을 바라본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분업화했고 인간은 완제품은 만들지 못하고 상품의 부분만을 만든다. 이는 노동을 통한 외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내가 완제품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노동의 결과의 주인이 아니라 종속된 노동자에 불과하다. 내 노동의 결과는 자본가가 소유하고 나의 의도와 관계없이 시장에 판매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소외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외의 장소로 뛰어든다. 노동의 소외라는 의미에서 외판원은 이중으로 소외된다. 첫째, 외판원의 노동은 완제품의 부분조차 만들지 못하고 타자가 만든 결과물을 판매하는데 그친다. 이것이 첫 번째 소외다. 둘째, 외판원의 노동은 자기 욕구의 표현이 아니라 구매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지나지 않는다. 판매의 핵심은 구매자와이 공감이라는 점에서 외판원의 욕구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두 번째 소외다. 세 번째, 소외는 외판원이 상품을 판매할 때, 노동자의 개별성은 사상하고 제품 자체의 특징만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들을 소외시킨다. 이는 자본주의의 무의미한 반복으로 보이지만, 외판원이 소외의 한축을 담당하고 그리고 노동자를 소외하면서 자본주의적 사상의 토대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외판원이란 직업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서 보여줄 수 있기에 카프카가 주인공의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5-2) 지배인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고 기차를 타지 않자, 회사의 지배인이 잠자의 집으로 온다. 지배인은 잠자가 아픈 거 같다는 어머니의 걱정 어린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외판원은 건강보다는 일이 우선이라는 대답을 한다. 그는 인간적 안부나 잠자의 몸 상태나 고통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고 오로지 숫자와 실적만으로 잠 자를 판단하려고 한다. 이는 외판원에서 이야기한 사물화의 전형적인 예시다. 하지만, 지배인의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외판원이 소외당하는 대상이자 소외를 강화하는 유통질서의 매개자라고 이야기했는데, 지배인은 외판원 보다 더욱 적극적인 체제의 수호자다. 지배인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사이에 낀 계급이다.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부르주아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는 언제든지 자기도 부르주아의 사회로 갈 수 있다는 꿈을 꾼다. 루카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의식과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자유를 박탈당한 이중성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자본주의적 의식에 길들여진 프롤레타리아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동적으로 역사를 변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타자를 소외시키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억압하는 것처럼 억압과 우위의 자리에 서게 되면 부르주아와 다른 세계의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지배인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사이의 중간 관리층이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소외시키고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수호자가 된다. 이런 점에서 지배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동적으로 변혁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의식을 내면화할 경우 오히려 체제를 수호하는 위치에 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6) 가족
“변신”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벌레로 변신한 잠자를 대하는 가족의 변화이다. 어머니와 누이는 흉측하게 변한 잠자를 예전처럼 대해주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어머니는 잠자가 돌아다닐 수 있도록 가구를 정리하고자 했고, 누이는 매일 음식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잠자가 누이의 바이올린에 올려 하숙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하숙인들이 보상을 요구하자 누이의 태도는 돌변했다.
6-1) 가족은 왜 조건적인가?
“변신”의 가족은 무조건적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양·기여·유용성에 따라 관계가 조건화되는 노동력 재생산의 최소 단위로 드러난다. 카프카는 누이와 아버지의 역할 변화로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혈연관계에서는 가장이어야 할 아버지는 소설 초반에 경제생활을 하지 않아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잠자가 벌레로 변하고 직장을 가진 이후로 경제생활의 상징인 제복을 항상 착용하고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마루에서 자는 등, 스스로의 권위를 드러낸다. 누이도 직장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잠자의 뒤치다꺼리를 했다. 하지만, 직장을 가지고 어머니가 잠자의 방을 치운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잠자를 쫓아내자고 의견을 내는 모습에서 가족 내에서의 위상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서 가격표가 붙으면 사물의 본래 성격이 바뀐다고 이야기했다. 장기매매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 장기매매가 불법인 상황에서 필요한 장기를 이식받는 것은 타자의 자애로운 마음 때문이다. 장기를 받은 환자는 타자의 희생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후에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행위를 할 가능성이 다. 하지만, 장기를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면 장기는 4000만 원의 가치를 가진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환자는 적절한 가격을 지불했기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장기를 판매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시장 거래는 사회에서 자애로움을 상승시키는데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장기에 가격표가 붙는 순간 호혜성의 표현이 시장가치로 변한 것이다. 잠자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리고 가족들은 잠자의 경제적 활동에 고마움을 느꼈다.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생계를 책임지는 객체가 되는 순간 그들 간의 관계는 조건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모님과 누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잠자 또한 사랑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행위한 게 아니라 가족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 이제 대한 보답을 원하는 관계를 설정했다.
“그레고르와 가족 모두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감사하게 돈을 받았고 그도 기쁘게 돈을 제공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보답으로 따뜻한 애정이 오고 가지는 않았다. 그레고르는 누이랑만 계속 가깝게 지냈다.”라는 회상 장면에서 이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가족 관계의 조건성과 경제화는 쌍방향적 구조이다.
6-2) 루카치와 카프카의 계급의식에 대한 한계
잠자의 가족은 분명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하녀를 고용한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논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편의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사물화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으로 읽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노동자와 자유롭지 못한 경제조건으로 나뉘어 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유와 인간존엄이라는 가치를 얻었지만 수요와 공급, 이자율등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경제조건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다.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발생하는 착취는 그들의 존엄에 생채기를 낸다. 자본주의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제와 소비활동이라는 선물을 노동자에게 준다. 남자들은 가정에서 여성들의 권리를 억압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소비활동을 통해 주인이 된다는 착각을 한다.
루카치와 카프카 문학의 한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루카치는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두 계급으로만 나누고 여성과 이민자와 같은 다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분석을 등한시했다. 카프카의 “변신”에도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하녀라는 서로 다른 소수자 계급들이 등장하지만, 소설의 초점은 잠자에게만 맞추어져 있다. 자본주의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부장제 그리고 자국우선주의등을 통해 관계의 우위와 보상을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역사의 변혁의 원동력이어야 할 노동자들에게서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보는 눈을 빼앗고 착취의 싸이클로 초대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피억압자들끼리 서로를 억압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이의 변화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잠자에게 친절했던 누이는 노동 세계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이후, 착취와 비자유를 겪으면서도 가족 내부에서 자신의 위상과 권위를 확보하려 한다. 즉 누이의 변화는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질서에 편입된 주체가 가족 내부에서 사물화 된 시선을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여성과 이주노동자 그리고 하녀와 같은 소외되는 모든 계층에 대한 인간성 회복이 선행돼야 한다.
7) 결말: 재생산 질서의 회복과 잠자의 죽음
잠자가 죽고, 벌레를 치운 뒤 잠자를 제외한 그의 가족들은 소풍을 떠난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만, 그들은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는 인간성을 회복한 가족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자본주의 노동력 재생산의 최소단위로서의 가족이다.
먼저, 어머니와 아버지는 큰 아들을 잃었지만 3명이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감을 느낀다. 이는 가족이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단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큰아들이 아무 이유 없이 벌레가 되고 죽음에 그들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지만, 좋은 직업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둘째, 사회에서 빼앗긴 자유와 존엄성을 회복하는 장이 가족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누이는 즐거움에 뛰어가고 부모님은 누이를 보고 괜찮은 짝을 찾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는 딸은 개인의 선택보다는 가족이 정해준 미래를 살아가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을 다시 한번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변신”은 잠자의 죽음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잠자가 벌레로 변한 시점에서 벌레의 다리, 배, 진물등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을 생각하면 죽음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잠자의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능동적 해방이나 승리의 탈출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존재가 끝내 그 질서 바깥으로 밀려나는 비극적 이탈에 가깝다. 카프카는 여기서 자본주의가 개인을 옭아매고 자유를 박탈하는 질서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지만, 그 단절의 가능성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암시한다.
먼저, 잠자는 벌레로 변해 노동에 걸맞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면서 육체적 차원에서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난다. 영국정부가 구빈국을 세우고 일하기를 거부하는 노숙자들을 처벌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잉여노동력을 악이라는 것을 반영한다. 하지만 잠자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몸이 되면서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다음 잠자는 본능을 거부하면서, 자본주의 사슬을 깨부순다. 노동자들이 억압당하면서도 직장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살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은 생필품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잠자는 처음에 음식에 관심을 보이지만, 차차 음식으로부터 멀어진다. 이는 먹으려는 본능을 끊어내면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자는 아버지에게 사과로 공격당하면서 가족의 유대를 끊어낸다, 사회의 기본 공동체로 보이는 가족은 자본주의 재생산의 최소단위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논의했다. 그 유대를 끊어냄으로써 잠자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돈을 벌어야 했던 과거를 지워낸다. “변신”은 자본주의를 끊어내는 일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려운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단절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바로 그 단절의 순간에 인간이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 결국 잠자의 죽음은 자본주의적 인간의 죽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