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카프카의 「시골의사」는 「변신」이나 「심판」보다도 더 불가해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띤다. 「변신」과 「심판」은 벌레로의 변신과 이해할 수 없는 사법체계라는 부조리에 중심을 두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서사의 표면은 비교적 현실적 질서를 유지한다. 반면 「시골의사」에서는 갑자기 등장하는 말, 순식간의 이동,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행동처럼 현실의 인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작품은 왕진을 가려는 의사가 최근 말이 죽어 이동 수단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하녀 로자는 말을 구하지 못하지만,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부와 말이 갑자기 등장하고, 의사는 로자가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환자에게 향한다. 그러나 도착 이후 상황은 더 기괴해진다. 의사는 처음엔 환자를 멀쩡하다고 여기지만 곧 그의 옆구리에서 거대한 상처를 발견하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 의해 옷을 벗김 당한 채 환자 곁에 눕혀진다. 끝내 그는 치료자가 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도착할 때와 달리 귀환은 지연되고, 그는 환자와 야간 비상벨에 배신당했다고 외치며 소설은 끝난다.
이처럼 「시골의사」는 「변신」이나 「심판」과는 다르게 자본주의나 관료주의 같은 체제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더 근본적인 층위를 가진다. 체제에 대한 비판은 소설 속의 사회적 관계가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현실적일 때 더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예를 들어, 「변신」은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통해서 독자의 시선을 끌지만(낯설게 하기) 그 안에 벌어지는 가족과 노동, 회사와 돈의 관계는 충분히 현실적으로 제시한다. 독자는 낯설어진 사건과 현실적인 사건의 틈 속에서 그들이 몸담고 있는 체제의 비합리성을 생생하게 느낀다. 반면 「시골의사」는 자본주의나 관료주의 같은 특정 체제의 비판으로만 읽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 작품의 비현실성은 사회적 관계의 현실적 재현 위에 얹힌 장치라기보다, 세계가 합리적으로 조직되고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 자체를 흔드는 형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골의사」는 체제 자체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철학적 관념, 곧 근대적 합리성의 자기 확신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의 독특함은 주제에만 있지 않고 형식 자체에도 있다. 「시골의사」는 인과적으로 이어져야 할 사건을 설명 없이 전환시킨다. 또한 우연성이 극의 진행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도중에 노래가 끼어드는 형식을 통해 현실주의적 서사의 안정성을 흔든다. 카프카가 비판하고자 하는 근대 합리주의 미학은 형식과 내용을 안정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얼핏 보면, 카프카 역시 독특한 형식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 미학과 닮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형식은 고정된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새로운 내용 생성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시골의사」는 특정 체제 비판을 넘어서,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 자체를 흔드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글은 「시골의사」를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내용적 측면에서 다른 한편에서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형식적 측면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2) 우연성과 합리주의
계몽주의를 시작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인본주의는 근대 합리주의의 사상적 뿌리를 이룬다. 계몽이 극복하고자 했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계몽과 합리주의가 개인의 책임과 자유를 강조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중세는 부자유와 억압의 세계라고 묘사할 수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신의 영향아래 있었고, 신의 대리자를 자처했던 교회와 군주들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계몽은 이러한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자유와 합리성을 주장했다. 계몽이 주장하고자 했던 합리성은 인식론으로 발전했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오성의 형식을 통해 구성된 현상 세계를 인식한다고 보았다. 이는 계산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루카치는 합리주의는 체제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합리주의자들에게 이성의 힘은 소여 된 것으로,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 인과율에 따라 작동한다. 근대 합리주의가 뉴턴 역학이나 기하학적 질서에 매력을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질서에서는 세계는 무질서가 아니라 일정한 법칙과 질서에 파악가능한 질서의 세계다. 이는 분명 인간의 힘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지만, 반면에 계산할 수 없는 우연성에 대한 취약점을 드러낸다. 루카치는 이를 자본주의와 노동의 추상성과 엮어 설명하지만, 이 글은 합리주의와 우연성에만 한정 짓도록 하겠다. 우연성은 원인과 결과라는 완벽한 시스템에 끼어드는 오염물과 같은 것이다. 만약, 우연성이 우리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면 중세의 억압을 벗어나고자 했던 합리성이라는 그들의 무기는 큰 힘을 잃게 된다. 우연성이 삶을 지배하는 순간 세계를 인간의 이성에 따라 통제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은 약해진다. 그리고 그 약해진 틈을 과거의 불가해한 힘이 파고들 수 있다. 따라서, 칸트에게 우연성이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간 인식의 필연적 구조로 극복하고 포섭되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는 「시골의사」를 통해서 우연성이 삶의 필수조건임을 보여준다.
1. 먼저 왕진을 가야 하는 의사는 며칠 전 말의 죽음이라는 우연적 사건을 통해 발이 묶인다.
2. 하녀가 말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돼지우리 안에서 낯선 이 가 나타나 말을 제공한다.
3. 말을 타고 멀리 가야 하지만, 바로 환자의 집에 도착한다.
4 환자가 괜찮아 보였지만, 우연하게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상처를 발견한다.
그리고 카프카는 바로 우연성이 제거된 합리적 세상을 보여주면서 사건이 진행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1.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차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같이 말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 익숙지 않은 말들이 의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합리적 추측이다.
2. 그리고 우연성이 결여된 소설은 끝이 난다.
이처럼, 카프카에게 우연은 예상치 못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그리고 우연성 없이는 삶이 진행되지 않는다. 카프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인과율에 따라 결과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카프카에게 삶은 인간의 행동과 우연적 사건의 만남을 통한 변증법적인 변화다. 헤겔의 관점에서 진리는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서로를 매개하며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기독교가 제공하는 틀 안에서 인간들은 행동하게 된다. 인간은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그들을 둘러싼 틀은 벗어던질 수 없다. 루카치는 합리주의적 자유는 중세의 자유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합리주의는 인과율은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놔둔 채, 인과율 안에서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를 자유롭게 느낄 수 있지만, 실상은 인과율에 지배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변증법은 세계를 둘러싼 인과율의 변화까지 요구한다. 인간이 인과율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는 인간의 관념과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영향은 인과율과 같은 변하지 않는 법칙에 질문하게 하고 법칙을 벗어난 새로운 진실을 생성한다.
카프카는 우연성을 배제한 합리주의의 문제점을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낸다. 합리주의는 우연과 예외를 제거하기 위해 인간을 추상화한다. 개인이 가진 성격은 통제하고 사회적 지위를 부과해서 고정된 행위를 요구한다. 의사는 의사로서의 행동이 있고, 가족은 가족으로서의 행동이 있다. 만약 의사가 의사로서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추상화는 세상을 움직이는 우연성에 취약하다.「시골의사」에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의사는 로자가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의사로서의 의무를 우선하며 환자에게 향한다. 이때 희생되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해 온 구체적 관계 자체다. 카프카는 이를 통해 추상적 직업윤리가 살아 있는 인간관계를 압도하는 순간을 드러낸다. 물론 의사로서 환자를 구하는 것은 중요한 소명이지만, 자기와 오랜 시간 함께한 로자를 희생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행위를 우선시한 행위로 생각할 수 있다. 소설 안에서 시골의사가 계속해서 느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불만은 합리주의적 규범과 개인의 가치관의 충돌에서 오는 모순으로 읽힐 수 있다.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가족은 그들의 구성원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작품 속 가족들은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안도보다 오히려 그를 둘러싸고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더 분주하게 움직이는 듯 보인다. 만약 환자가 아프지 않다면 가족으로서의 역할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프카는 합리주의가 개인을 추상적 역할로 환원하고, 정해진 규범을 강요하는 사회 현실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서, 합리주의의 대표자인 의사가 사람들에 의해 벗겨지는 것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전도를 보여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합리주의는 인간의 주체성을 표방하지만, 물자체라는 건드릴 수 없는 자연법칙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을 생산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주체이지만, 사람들에 객체로 전락하는 것은 합리주의 속,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다.
(3)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한 생성
형식과 내용은 합리주의와 헤겔에게 중요한 요소다. 칸트에게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지만, 동시에 동일한 것도 아니다. 칸트는 감성과 오성이 선험적 틀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틀에 따라서 세상을 인식한다. 감성과 오성에 주어지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오성의 형식에 의해 산출된 것은 인간의 인식 범위 안에 있다. 이는 인간이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측면에서 철학적 진보를 의미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궁극적 진리를 남겨놓는다는 면에서 중세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는 신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고정된 진리가, 칸트에게는 물자체로 변했을 뿐이다. 반면에, 헤겔은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적 운동을 강조한다. 헤겔에게 진리는 고정된 형식이나 결과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형식과 내용이 서로를 매개하며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헤겔에게 형식은 단순히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내용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매개체다. 카프카의 기괴한 형식 역시 고정된 문학적 틀이 아니라, 기존의 합리적 서사 구조를 부정함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변증법적 운동의 현장이다. 종교 공동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교 공동체는 종교적 교리라는 형식에 따라 행동한다. 공동체의 행동은 내용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현실과 접촉하게 되고 현실에 따라 내용이 변형된다. 그리고 변화된 내용은 교리라는 형식에 영향을 미쳐 교리의 변화도 이끌어 낸다. 이처럼 변증법은 고정된 진리를 거부하고 매개를 통한 변화를 추구한다.
카프카의 소설의 독특한 형식은 변하지 않는 틀이라기보다는 변화하는 변증법의 요소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첫째, 카프카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는 다른 형식을 가진다. 갑자기 말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의사에게 치료를 요구하기 위해 옷을 벗기는 등 보통의 소설에서 사용하는 기승전결이나 현실성이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부재한다. 또한, 마을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사를 소설의 진행을 위해 삽입한 것은 카프카가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낸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둘째, 카프카의 「시골의사」는 시골의사가 처한 상황이 디스토피아적 이기에 형식과 내용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를 매개로 놓는다면 형식과 내용이 독자를 통해서 새로운 내용을 생성한다는 변증법적 전개를 따르고 있다. 처음 「시골의사」를 읽는 독자는 비현실적인 내용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설이 노래가사와 우연성이라는 형식을 사용하면서 독자가 생각했던 합리성이라는 체계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을 통해 소설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형성된다. 합리주의를 따르는 소설은 인과율을 통한 예상가능성이 전면에 부각된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세상을 만든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비합리성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만들어진 균열은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이는 형식과 내용의 매개를 통한 생성이라는 변증법의 소설적 전개이다.
셋째, 보통 소설은 기승전결과 함께 위기 폭발 그리고 해결이 구조를 따른다. 하지만 「시골의사」는 사건의 원인에 우연성이 자리 잡는다. 환자의 상처를 발견하면서 위기가 촉발하지만, 의사는 회피하고 마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기의 해결이나 비극적 결말 없이 스스로의 상황에 절규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이는 위기는 아무 이유 없이 발생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위기는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매개인 독자에게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하도록 요구하지만, 인과율의 부재로 인해 갖가지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매개에 의한 생성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카프카의 「시골의사」는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부정하고 색다른 형식을 통해 새로운 내용을 생성하는 작품이다. 이는 색다른 내용과 형식이 기존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역할을 하지만, 반대로 독자를 글에서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이고 우울한 극의 내용은 억압받는 독자들이 직접 행동할 유인을 지워낸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는 루카치가 가지는 카프카에 대한 비난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 나는 루카치의 총체성과 억압받는 계급의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서 현실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
(4) 루카치의 카프카 비판과 한계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총체성, 프롤레타리아트의 독특한 계급적 위치 그리고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루카치는 세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파편적으로 바라보는 부르주아적 인식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파편적 시각은 “돈이 돈을 낳는다”는 물신적 인식을 낳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안에서 객체일 뿐만 아니라 상품생산 과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사회의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 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특수성을 인지하고 행동할 때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루카치는 카프카의 소설들이 파편화된 세계를 제시하기만 할 뿐, 그것을 역사적 총체성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프카의 절망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 역시 독자를 실천적 인식과 행동으로 이끄는 데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총체성의 인식이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루카치의 철학에서,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의식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카프카의 소설은 루카치의 비판에 갇히기에는 이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물화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관계를 물건 간의 관계로 치환하는 '사물화'는 개인의 구체적 경험을 거세한다. 하지만 카프카는 바로 그 사물화 된 세계의 밑바닥에 숨겨진 공포를 드러냄으로써 사물화의 마법을 깬다. 개인들의 경험은 동일한 방식으로 환원되거나 해석될 수 없다. 경험이란, 개인이 가지는 상황에 따라 해석될 뿐이다.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고 하더라도 높은 봉급을 받고 보람 있는 직업을 가진 노동자에게는 긍정적 시간이 될 수 있다. 반면에 하루에 6시간만 일해도 낮은 봉급과 의미 없는 분업화의 희생자들에게 6시간은 지옥일 수 있다. 루카치가 말한 것처럼 체제 내에서의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자 개개인에게 신분상승의 희망을 주면서 체제를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이는 유의미한 변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에 어떤 다른 매개가 주어져야 함을 말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각성한다고 하더라도 지배계급인 부르주아가 완강히 저항한다면, 사회 변혁은 단순한 의식의 변화만으로 실현되기 어렵고 급진적 충돌의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루카치가 원하는 세상이 도달하기 위해서는 경험의 주관적 해석을 덮고 부르주아와 소위 프롤레타리아트를 탈피한 계급을 포섭할 수 있는 공통의 감각적 인식이 요구된다. 나는 카프카의 작품들이 공통의 감각적 인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가 정상이라고 믿는 것들이 무너져 내릴 때 가능하다. 루카치가 원하는 총체성에 대한 묘사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교설적 작품은 부르주아와 중간 관리층을 밀어내고 경험에 대한 공통의 감각적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 오히려 카프카처럼 정상적인 것에 대한 균열과 그 틈을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비합리적 상처가 공통의 감각적 인식이 될 것이다. 과거의 사회변혁은 공통의 목표에서 발생했고 공통의 목표는 비합리성에 의심에서 발생한다.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옭아 맨다는 비합리성을 목도했을 때, 비합리성을 제거하자는 공통의 목표로 우리를 포섭할 수 있다.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은 이를 가능케 한다.
(5) 결론
카프카는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통해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합리주의라는 기반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카프카의 소설이 불친절하기에,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루카치의 비판에서도 볼 수 있다. 불편함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불편함은 정상적인 것에서의 거리에서 온다. 루카치와 카프카의 문제의식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현재 체제의 모순의 해체라면 불편함은 긍정적인 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 입문에서 문학의 정의가 애매모호하기에 정전편입과 대학 교육 그리고 문학대상등을 통해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그런 점에서 카프카의 작품이 고전으로 정착해 널리 읽힌다는 사실은, 문학 제도와 비판적 형식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루카치의 비판은 카프카의 작품보다는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독자들에게 향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골의사」의 끝에서 의사는 환자의 집을 빠져나왔음에도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자신이 배신당했다고 외친다. 이 결말은 단순한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한 번 흔들린 정상성으로부터 더 이상 안전하게 복귀할 수 없는 주체의 상태를 보여준다. 카프카는 독자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요구한다. 작품이 만든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견딜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정상이라 믿어 온 질서를 다시 의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카프카가 총체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가 작품이 만든 불편함과 균열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익숙한 의미와 질서로 돌아가려 한다는 데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루카치의 비판은 작품 자체보다도 그런 독서 태도를 향해 재독 해 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