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by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시간의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책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속도로 흐른다고 생각하고, 과거는 이미 일어난 일, 현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상 즉 인과관계에 따라 발생할 세상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이런 모든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아니 이런 생각은 과학적이지 않고 그냥 우리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언한다.
“시간은 흐리지 않는다”는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장은, 5가지 물리학적 사실을 토대로 우리의 시간에 대한 통념을 공격한다.
1) 시간은 중력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장소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왜?? 광속 불변의 법칙에 따르면, 진공 상태에서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찌그러지거나 물체의 운동에 의해 관찰자 관점에서 빛의 이동하는 거리가 변화하는 경우에 시간은 상대적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보자. 물체가 중력에 영향을 받는 거처럼, 시공간도 영향을 받는다. 중력에 영향을 받은 시공간은 찌그러진다. 거리 = 속도 * 시간이라는 공식에서 속도는 그대로인데, 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이 짧아진다. 따라서, 산 아래 사는 즉 중력에 영향을 받는 지역은 공간의 찌그러짐 = 거리가 짧아지기 때문에 시간이 덜 흐른다.
2) 시간은 운동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움직임을 가지는 대상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물체의 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체가 빠른 속도로 이동할 경우, 운동하는 물체 내의 빛의 이동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물체 밖에서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빛은 물체의 운동 방향으로 더 이동하게 된다. 위의 공식과 마찬가지로, 거리 = 속도 * 시간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거리는 늘어났고 이는 더 많은 시간이 흐르는 결과가 된다.
3) 현재라는 개념은 지역적일 뿐, 우주적 관점에서 볼 경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물체를 인식하기 위해 빛을 사용한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물체에 반사된 빛을 통해서 물체를 인식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은 빛이 우리 사이를 여행하는 시간 이후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간의 차이는 찰나의 차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지 같은 모습을 한 것은 아니다. 우주 전체적으로 보면 차이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 지구보다 5만 광년 떨어진 곳의 물체의 현재와 나의 현재는 같을 수 없다. 또한, 빛이 여행하는 도중 속도와 중력의 영향으로 계속해서 시간의 길어지고 짧아지기 때문에 나와 현재를 공유하는 존재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4) 물리학에서 엔트로피의 증가와 감소로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매우 주관적이다. 엔트로피는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엔트로피가 높아졌다는 것은 따라서, 시간이 흘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엔트로피의 높고 낮음은 물체를 관찰하는 주관적 입장에서 결정이 된다. 빨간 공 4개가 우측에 파란 공 4개가 좌측에 있다면, 색을 구분할 수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이고 공들이 섞이면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가 된다. 하지만, 색맹의 입장에서는 엔트로피의 움직임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색맹이지만 공의 미세한 크기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오히려 엔트로피의 흐름은 반대가 될 수 있다. 지구 인류는 지구가 속해 있는 닫힌계에서 주관적 엔트로피의 차이를 공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이 모든 우주적 존재에게 같다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5) 양자역학에 따르면 시간이 흐름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뉴턴의 이야기처럼 절대시간 즉, 모든 사람이 같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니츠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물체들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관찰하기 전까지는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관찰하는 관계에서야 비로소 물체의 운동과 움직임을 확률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에 기대어 우리의 관계를 조정하고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을 확정해 나가야 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을 처음 읽으면서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개념과 카를로 로벨리가 말하는 시간의 개념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은 읽히지 않았고 저자는 매우 불친절하다는 말이 계속해서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의 두뇌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거부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를로 로벨리 또한, 독자들의 이러한 불만을 예상했다는 듯이 2번째 장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몇 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한 칸트의 놀라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5분 뚝딱 철학 참조),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시각적 정보를 받아서 우리의 인식구조가 대상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체계는 어디서부터 형성이 될까?? 우리의 인식 체계는 관습, 교육, 언어, 관계로부터 형성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관습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관습체계가 정한 시간의 정의로 우리는 시간을 인식한다. 또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뉴턴식 고전 물리학이 정답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고 이에 따라, 우리의 언어도 만들어진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처럼, 시간은 흐르고 과거는 현재에 선행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언어적 문법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사회가 정해놓은 관습을 가지고 동일한 교육과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타인이 가지는 인식 체계, 즉 시간에 대한 관념 또한 동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간은 흐른다는 개념이 우리에게 통념이 되고 우리는 과학적 증거가 눈앞에 있지만 통념이 늪에 자발적으로 빠져들기 위해서 과학적 증거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흐리지 않는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나는 2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이 책은 “인류를 무지의 늪에서부터 구출하자”는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인식 체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인간의 통념은 항상 과학의 발전을 저해한다. 코페르니쿠스 사건이 그랬고 양자역학이 그러했다. 왜냐하면,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발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수적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는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간에 대한 접근법을 알아야 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간에 대한 접근법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오히려 우리 인류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법이 발전의 초석이라고 이야기한다. 개인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어제의 나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나의 경험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은 우리 문명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나의 행동이 나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 나의 삶은 유한하지 않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이야말로 인간들이 미래를 위해 현재에 더욱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다양한 경험 안에서 우리가 변화하고 그러한 변화의 인식 속에서 관계를 쌓아 올리면서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시간에 대한 접근법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시간이 흐리지 않는다”가 두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가 가져야 하는 인간에 대한 인식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간은 주관적이다. 세상은 사건에 의해서 분석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나의 행동에 따라 나의 시간은 달라지고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다르다고 개인이 가진 시간의 총량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개인이 자기 스스로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또한, 기차의 출현이 개인의 가지는 시간의 주관성과 충돌하여 시간의 주관성을 파괴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기차의 출현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를 지나 우리의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시간의 주관성을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예전과 다르게 개인은 시장에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 생명을 유지했고, 노동력을 구매한 구매자는 노동력에서 나온 생산품을 통해서 자기의 배를 불려 나갔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인간성이나 내재적 가치가 아니라 개인 노동력의 생산성이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해진 시간표에 맞추어 노동하는
것이 중요해졌고, 더욱 정확한 노동생산성 평가를 위해 객관적 시간을 도입하게 되었다. 우리의 요구가 아니라 사회와 경제의 요구를 위해 우리에게서 주관적인 시간을 빼앗아 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도 유지된다.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부를 축적해 나가는 개인은 사회적인 명성을 얻지만 자기만이 속도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빠르게 움직이라는 채찍질을 받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이러한 사회적 성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철학적 배경을 제공한다. 시간은 전적으로 개인적 이것이고 우리의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다른 시간에 대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주적인 법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목적 없이 던져졌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의식적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책은 물리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가 당연시해온 개념이 어떻게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단지 시간에 대한 책이 아니라, 우리 존재 방식에 대한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