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의 시대,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고 by 막스베버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앞서 1부에서는 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종교적 기원을 살펴보았다. 특히 칼뱅주의의 예정설, 소명으로서의 직업윤리, 금욕적 자본 축적의 태도가 어떻게 근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는지를 조명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도, 칼뱅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적 윤리가 사라진 지금, 자본주의는 무엇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그리고 공리주의라는 새로운 가치 판단 기준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지금부터는 막스 베버의 통찰을 바탕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철학적 한계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뿌리에 대해 성찰해보고자 한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적 윤리가 거대 자본주의의 씨앗이 되었다는 막스 베버의 논리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현재 사회는 세속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라는 분야가 반자본주의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자본주의의 태동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첫째, 위에 말한 것처럼 “상상력의 부재”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다. “호모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리리는 “허구를 믿는 힘”이 인간 발전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허구를 믿는 힘”은 지금의 고통과 인내가 미래에 더욱 큰 열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예상 가능 한 한도 내에서 가능하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라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이 우주로의 출발을 가능케 했고, 보어가 관찰해 온 여러 가지 다양한 원자의 모형이 보어가 그 만의 원자 모형을 가능케 했다. 자본의 무한대 축적이 가능하다는 것은 경제 성장의 유한성을 믿어온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상상 불가한 영역이었을 것이고 이러한 “상상력의 부재”를 해결해 준 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이다. 이는 현재는 왜 종교적 믿음이 없이도 자본주의가 존재하는가? 에 대한 대답이 된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제까지 축적해 온 발자취를 통해 높은 상상력을 인간에게 부여했고 이러한 상상력 자체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의 비종교성을 기반으로 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중요성에 대한 반박은 틀린 것이다.


둘째, 기술의 발전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진적으로 발전하고 누진의 정도가 쌓이면 되돌릴 수 없는 발전 속도를 가지게 된다. 분명 현재의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주는 강제성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현재를 즐길지 아니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할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누진적으로 발전한 기술은 사람들이 종교적 강제성 없이 자본의 축적을 통한 기술의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사회의 에너지를 재배치한다.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는 기술에 대한 존경과 경외를 가져왔고 이는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는 집단의 발언과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정부 각 계층에 기술의 발전을 중요시하는 관료들에게 자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을 활용해 돈을 번 사람들이 기업의 주요 자리도 꿰차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론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 같은 기술 발명을 통해 큰 부를 움켜쥐고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게 되었고 이들은 종교적 강제성 없이도 기술 발전을 도모했다. 따라서, 초기에 누진적으로 발전한 기술이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고 기술 발전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사회의 요직에 참여하게 되면서 기술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셋째, 현재 자본가들은 사업적 성공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업의 성공이 주는 자기만족과 자아 성찰이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의 원인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외적 욕망뿐만 아니라 내적 욕망이고 이러한 내적 욕망의 힘은 외적 욕망보다 크고 지속적이기에 여전히 자본의 재투자와 축적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업의 성공에서 자기만족과 자아 성찰이라는 내적 욕망의 형성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내적 욕망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자크 라캉의 말처럼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하지만, 사업의 성공과 부의 축적이 사회의 공통된 욕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욕망을 바람직한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형성이 필수적이다. 이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긴 세월에 걸쳐 사회적 분위기가 여러 관계된 신화 그리고 미디어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소명으로서의 직업”과 “자본 축적”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파하고 이를 따르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기 전, 사업의 성공과 부를 축적하는 것은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악마의 축제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사업의 성공은 사회 공통의 욕망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배적인 종교적인 교리가 되고 이를 따른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업의 성공과 그에 따른 자본 축적은 사회 공통의 욕망으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지금 자본가들을 움직이는 내적 욕망의 근원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찾을 수 있고,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의 태동뿐만 아니라 현재를 유지하는 엔진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것이다.


막스베버는 그의 저서에서 “어떤 현상의 종교적인 뿌리가 말라죽어 감에 따라 슬그머니 공리주의적 사고가 대신 들어와서 그 현상의 의미를 바꾸어놓는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현대 자본주의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공리주의라는 잣대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경제 정책이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경제 정책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제 성장이라는 답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우리는 사회 취약층을 도와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에도 경제가 성장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슬그머니 한 부분을 차지한다. 과연 바람직한가? 공리주의는 사회에 필요한 복잡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슬그머니 옆으로 치우고 공리주의라는 얄팍한 사상으로 사회를 이끌어 간다. 사회의 자본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은 고귀한 이성의 개입과 치열한 의견교환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 전반이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태도는 “그런 건 모르겠고, 숫자를 기반으로 판단하자”라는 매우 손쉬운 길을 사회에 제공한다. 이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사회 가치 설정에서 배제되기에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하고 패배감과 수치심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삶의 보장조차 힘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숫자로는 여러 가지 인간적 현상과 가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가 보는 세상에서 그들은 패배자일 뿐이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또한, 공리주의적 사회는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끌어낼 뿐이다. 사회는 지속적 경제발전을 통해서 대부분 선진국의 가난에는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재앙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양산하고 그에 따른 차별화된 분배가 사회발전을 가져오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부자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장 좋은 재화를 소비할 수 없다. 또한, 자본주의의 행복은 자기 파괴적이다. 페라리를 타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현대를 타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캐비어를 먹으면서 행복한 이유는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성향은 사람들이 자본이나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로의 자아실현의 통로를 열어줄 때만 지속 가능하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사회는 다른 모든 통로를 막고 오직 이 길만이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고 말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했던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통한 파괴와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공리주의적 사고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상적 뿌리의 재발견이 시급하다.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뿌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종교적 뿌리가 대안이 될 수 없다. 종교적 뿌리가 아니라 공동체 혹은 인문학적 교육을 통한 여러 가지 다양한 가치의 축적과 그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존중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뿌리를 찾지 못하면 자본주의는 라는 나무는 말라 삐뚤어지던가 아니면, 모든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몇몇에만 행복을 제공하는 비인간적이고 자가당착적 시스템으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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