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을 읽고 by 미르치아 엘리아데
(1) 서문
종교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종교적 행위를 추구하는가?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한 철학적 탐색이다. 48도가 넘는 무더위에 메카 순례를 떠나는 무슬림인 들을 보면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치부하기에는 종교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너무나 방대하고 깊다. 이러한 질문을 두고 살던 와중에, 엘리아데의 “성과 속”이라는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인 엘리아데는 “성과 속”을 통해 우리 인간은 종교적 인간이고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태초부터 종교적이었기에 세속화된 비종교인은 종교인에서 탄생한 존재일 뿐이고 이는 비종교인과 종교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끝으로 그는, 종교적 인간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관점이 비종교인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견해로 책을 마친다. 세속화된 나에게 “성과 속”은 나에게 색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책은 쉽지 않고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번 리뷰는 “성과 속”을 이해하기 위해 현상학을 소개하고 책에 대해 분석한 다음, 종교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겠다.
(2) 현상학이란??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현상학적 관점에서 종교적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분석한다. 현상학이란, 수학적 과학적 체계로만 세상을 분석하려고 한 수학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분석 방법이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선언하고 귀납론적 과학접근법을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옳은 방법이라고 주장한 이래, 수학 과학적 분석법이 다른 분석 방법을 압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후설은 인간의 의식을 무언가로 지향한다는 지향성의 개념을 차용하여 인간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접근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의식은 무언가를 지향하기 때문에 사물에 관한 판단은 오염될 수밖에 없다. 나의 인종, 학문적 배경 혹은 무의식에 겹겹이 쌓인 그 무언가가 나에게 오염된 판단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영향력을 중단하고 선험적인 체험으로만 판단해야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종교적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3) 엘리아데는 왜 현상학을 방법론으로 채택했는가?
엘리아데의 주장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종교적 본질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세속적 사회는 역사적 사회적 변화에 의해 종교적인 행동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매년 1월 1일을 축복하고 의미를 기리는 것은 종교에서 신이 우주를 창조한 태초로 돌아가는 관행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년에 대한 축제를 종교적 의미를 걷어내고 세속적 의미 즉, 축제 그 자체로 즐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사회의 관념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는 엘리아데가 현상학적 관점을 택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 체험 또한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면 형이상학적인 기질로 인해 미신 혹은 거짓으로 치부될 수 있기에 현상학이 필수적 접근법이 되는 것이다.
(4) 종교성이 인간의 본질인 이유는?
엘리아데가 바라보는 종교는 매우 색다르다. 엘리아데는 인간이 성과 속을 구분하려는 그 본능 자체가 인간이 종교적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의 개념에서 종교란, 특별한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것이 종교라고 말한다. 세계는 세계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세계 안에서 특정 사물에 대해 인간은 성스러움을 발견하고 그 성스러움과 대비되는 속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물은 할 수 없는 인간만의 특별한 경험이자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세상은 신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 그 자체에 성스러운 것이 녹아나 있고 이러한 성스러운 것은 속된 것과 대비를 이루기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종교는 특정한 방식이나 기관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종교이며, 인간은 성스러움의 주관적 체험을 통해 종교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그는 “성현: 성스러움이 드러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성과 속을 구분하는 그 본능이 인간에 내재한 본질적 성향이며 이는 인간 생활 곳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4-1) 공간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장소와 속된 장소를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신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면 거주할수록 큰 힘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들은 성스러운 공간에 집을 짓고 거주하거나 혹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기반으로 삶의 방향성을 찾아 나아갔다. 예를 들어, 석기시대의 동굴은 그들에게 성스러운 공간이고 이 동굴을 중심으로 삶을 전개해 나갔다. 중세 또한 마찬가지다. 중세에는 성을 중심으로 삶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속된 장소 즉 성스러움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곳에 성스러움을 전파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이나 고대의 정복 전쟁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시대의 사람들은 거주하는 공간은 성현의 의미는 잃었지만, 여전히 특정한 장소를 성스러운 장소로 생각해서 속된 것과 구분하는 경향은 유지하고 있다. 교회, 무덤 혹은 역사적 배경을 지닌 장소 등은 성스러운 장소로 여러 가지 taboo를 가지고 있고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성과 속 구분의 증거이다.
(4-2) 시간
유대교 이후의 종교는 불가역적인 성격을 띠기는 하지만, 종교적 인간의 시간은 가역적이다. 종교적 인간은 세상은 영원히 회귀하고 우리는 신이 우주를 창조한 태초로 돌아갈 때 종교적 축복을 얻고 신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축제는 신들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한 방편이었고, 신년은 세계가 새로 창조되는 시기다. 따라서,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쳇바퀴가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반복되고 창조되는 새로운 세상이다. 매년, 신이 창조한 태초의 시간으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매년 새롭게 얻게 된다. 이는 종교적 의식이나 종교적 행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세속적 인간들은 불가역적 시간 속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새해 축복 행사와 특정 시간을 추억하는 행위 그리고 독서를 통해 특정 시간대로 돌아가는 경험 등에서 종교적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유대교 이후의 종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은 불가역적 성격을 띠는데 이는 종교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종교는 고대의 종교와 다르게 신의 인간세계의 개입과 종말 혹은 최후에 날로 정의된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나왔고 그때부터 종말 혹은 최후에 날로 이어지는 역사론적 관점이 이런 종교에 핵심이 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종교적 차이는 역사적 사회적 변화에 의한 결과이지만 특정 시점의 가역적 시간 즉, 예수 부활의 시기로 돌아가는 종교적 기념일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4-3) 신화
종교적 인간은 신화에 기반하여 생활한다. 그들에게 신화란,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신화에 따른 행동은 신의 행동을 모방하고 그들과 더욱 가깝게 다가서는 행동으로 보인다. 신화에 대한 관심과 그에 대한 동경은 세속화된 현재 세계에도 만연하다. 신화에 대한 도서가 도서 가판대에서 끊이지 않는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필독서로 선정되고 신화에 기반을 둔 영화(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등)는 박스오피스의 상단을 차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를 특정한 나라의 국민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신화에 기반한다. 내가 대한민국 사람인 이유는 환웅의 자손이기 때문이고 일본 사람은 천황 신화에 근거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미국과 같이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도 세속적인 건국 신화를 자기의 줄기로 보고 신화에 따라 행동하는 것, 즉 민주주의(민주주의는 미국의 건국 신화에 큰 줄기를 차지한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헤겔의 철학 그리고 심리학 치료 또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헤겔의 철학은 유대교의 종말론과 역사주의적 관점을 차용했다. 심리학 치료는 내면으로 들어가서 나 자신을 대면하는 종교적 의례를 모방한 것이다. 이러한 예시들에서 인간은 종교적 인간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5)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
만약, 인간의 본질이 종교라면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성과 속의 변증법적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엘리아데의 주장이다. 성과 속은 세상에 같이 존재하고 이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성장한다. 성이 강해지면 속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속이 강해지면 성의 영향력은 약해진다. 이러한 변증법적 발전은, 성과 속을 경험하고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인간의 역사와 사회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가톨릭은 성과 속이 구분된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신정 분리를 정치의 기본 철칙으로 삼아왔는데 이는 예수가 로마군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처럼 종교가 억압당하기도 했고, 중세 시대처럼 종교가 억압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사회는 종교 즉 성의 득세를 문제로 생각했고 철저히 성과 속의 분리 속에 가톨릭을 발달시켰다.
반면에 이슬람은 성과 속이 밀접하게 존재한다. 무슬림에게 세상의 모든 장소는 성스러운 장소이기에 예배를 드리는 그곳은 성스러운 곳이 된다. 그들의 삶 곳곳에 종교의 성이 침투해 있는데, 이 또한 역사에 영향을 받아왔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는 종교적 지도자이자 정치 지도자였다. 무하마드는 종교 지도자가 되기 전에 억압을 받았지만, 종교 지도자로 무리를 이끌고 나서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이러한 종교와 정치지도자의 합치와 그에 따른 성공은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영향을 미치는 종교로 발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적 체험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 지도자 혹은 종교인들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종교에 대한 주관적 체험은 신의 의미와 성현을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고, 이는 다른 종교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종교 개혁을 통해 가톨릭은 신교와 구교로 나뉘었고 이슬람도 수니, 시아파뿐만 아니라 와하비즘 등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종교의 다양성은 사회적 역사적 변화에 의한 결과일 뿐, 인간이 종교적 인간이라는 틀을 벗어나는 사례는 아니다.
(6) 종교적 인간과 세속적 인간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의 삶이 세속적 인간의 삶보다 더 풍요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적 인간의 종교적 체험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가 세속적 인간보다 수월하다고 이야기한다. 종교적 인간은 신화를 통해서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체험을 하기에, 농사짓는 행위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종교적 체험을 통해 종교인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는 행위가 된다. 반면에, 세속적 인간에게 농사는 노동에 불과하고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반복되는 삶 또한 마찬가지다. 종교적 인간에게 매해는 새로운 해이고 새로운 창조적 시대인 반면에, 세속적 인간은 죽기 전까지 반복되는 무의미한 삶의 시간일 뿐이다. 물론 세속적 인간의 과학적 세계관에서 세계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 인간에게 자유가 없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진보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은 엘리아데의 주장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진보란 단순히 물질적 성취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이 더욱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분업이라는 효율성에 기댄 체계에 의해 매번 반복하고 무의미한 일상에 노출된 우리의 삶이 진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빈부격차는 커지고 부에 의한 차이로 인간의 의미를 결정하는 사회가 진보된 사회인가? 이런 관점은 엘리아데의 주장을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또한 자유에 대한 관점은 어떠한가?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우리에게 대안적 삶은 가능한가? 마르크스가 주장한 바처럼, 하부구조에 의해 조종되는 상부구조의 관념에 우리는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종교에 얽매인 삶과 자본주의에 얽매인 삶 중, 어떠한 삶이 더 자유로운가? 이에 대해 나는 후자가 더욱 자유롭다고 선뜻 말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7) 이성과 본질 그리고 종교
사르트르는 "실제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엘리아데는 “본질이 실제에 앞선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엘리아데의 사상은 인간은 종교적 본질이라는 구조에 갇혀 있고 이런 구조는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우리 선조들이 행했던 종교적 본질이라는 DNA는 융의 개념처럼 집단 무의식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이는 우리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과 속” 본문에 “완벽하게 이성적인 인간이란 없다”는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성과 지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인간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종교적 인간이 더욱 우리가 상상하는 인간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인간의 본질을 종교적으로 파악하는 종교적 인간은 매우 긴 길을 가야 한다. 종교적 경험은 경험 자체를 가지기 어렵다. 매우 긴 시간, 고행, taboo에 대한 복종, 교육 그리고 본능과 욕구의 억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의 끝에 종교적 경험 자체 즉 성현을 보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가능성에 대한 믿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끈기와 노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성적 인간에 더욱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인간은 매우 빠르고 간단하다. 자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의 욕구 충족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이들은 물질적 욕구 충족에 만족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남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을 자기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러한 감정은 모든 인간을 아우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빠르고 간편하다.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 매우 빠르고 간편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고행도 수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과 이성이 기반이 된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동물과 다르지 않은 본질을 소유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종교적 인간이 세속적 인간보다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종교적 인간의 본질 추구에 걸림돌이 된다. 자본주의는 항상 쾌락, 단기적 즐거움, 육체적 행복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이런 유혹에 빠져든 인간은 종교적 믿음의 추구를 등한시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우리가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는데,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종교 또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종교적 체험이 주관적이라는데 있다. 종교적 체험이 주관적이기에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를 반박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주관성은 이들이 대다수를 조종하기 쉽다. 또한 이러한 주관성은 종교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차이는 종교끼리의 싸움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 문제라기보다는 종교가 행사되는 형태의 문제일 뿐이기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않을까? 또한 종교적 차이로 인한 종교 간의 다툼은 오히려 자유로워 보인다. 종교적 차이로 인한 싸움은 싸움이 가능한 힘의 차이가 있기에 존재한다. 30년 전쟁, 십자군 전쟁 등은 처참했지만, 자유로운 힘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로 인한 차이는 싸움의 가능성조차 없애버린다. 약소국은 불만과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절대적 힘의 차이로 인해 싸움을 걸 수조차 없고 억압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인다. 무엇이 더욱 인간에 가깝고 자유로운가? 대한민국이 일본에 의해 점령당한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투사의 삶이 의미 있고 자유로운 삶인가? 억압에 순응한 민초와 그를 이용한 친일파의 삶이 더 자유로운가?
종교적 인간은 비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을 향한 노력, 고행, 절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되찾는다. 자본주의가 그 본질을 흐리게 만든 지금, 우리는 종교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