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에서 그람시로: 실패한 혁명과 헤게모니의 조건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읽고 by 안토니오 그람시

(1) 서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사상적 차이와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 시대의 다른 위치에선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의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였을 수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의 사상적 차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생겼고 남한은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의 “공” 자도 꺼낼 수 없을 만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감을 키워갔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존재할 수 없었고 마르크스를 알기 위해 “자본론”이라는 그의 책을 보는 것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다. 지금은 미디어나 유튜브에서 “자본론”에 대한 소개와 분석 영상을 손쉽게 만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국가적 분위기 속에,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인물과 그가 쓴 책 “옥중 수고”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로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부에 의해 감옥에 투옥되어 쓸쓸하게 죽은 인물이다. 검사는 '그람시의 두뇌 활동을 20년간 정지시켜야 한다'며 그를 유죄 판결하였다. 그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 수고라는 책을 펴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메모를 썼다. 그의 메모는 그의 친구이자 동지들에 의해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이 메모를 모아서 나온 책이 “그람시의 옥중 수고”이다. 그람시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서 소련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이탈리아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혁명이 이탈리아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밝히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고, 이에 대한 해답을 그의 책 “옥중 수고”에서 찾을 수 있다.


(2)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그람시의 “옥중 수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론이 기본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적 유물론으로 설명되는 하부구조와 상부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자본론”을 통해서 마르크스가 밝히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의 내부적 모순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정한 자본주의와 시장은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가장 이상에 가까운 곳이다. 자유 경쟁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노동의 이동은 자유롭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봤을 때, 이러한 시장의 한계는 명확하다. 지속적 경쟁과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해 이윤은 축소될 수밖에 없고, 작은 규모의 기업은 파산할 수밖에 없다. 파산한 기업들은 큰 기업에 지속적으로 합병되고 자본을 잃은 자본가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수적으로 커진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고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세계로 대체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관을 채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과학적 법칙과 같기에 역사적으로 필연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사적 유물론도 강조했다. 사적 유물론이란, 생산 구조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이 결정되고 이에 발맞추어 상부구조 즉 법체계, 교육, 문화 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 사람들의 관념이 법, 교육,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관념론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회를 분석한 것이다. 경제적 결정론은 단순히 경제적 구조에 의해서 상부구조가 결정된다고 단순한 분석을 했지만, 마르크스는 하부구조인 경제적 구조에 의해 상부구조가 형성되고 변화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끌어내는 하부구조는 내부의 모순 즉 역사적 변증법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적 유물론 또한 경제구조에 따라 상부구조가 결정된다는 상부구조의 수동적 변화를 주장한다.


(3) 그람시의 생각은?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수정했다.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상부구조를 활용한 헤게모니의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고, 정당정치를 헤게모니 구축의 선봉장으로 인식했다.


그람시는 인간은 능동적이지 않고 경제적 구조와 물질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과학적 인간관을 거부하고, 능동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그의 인간관은 경제적 필요성보다는 경제적 필요성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나 문화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급을 받지 못하는 군인을 예시로 들었다. 만약, 국가의 물리적 문제로 인해 보급이 끊겼다고 하더라도 애국심이 있는 군인들은 긴 시간 불만 없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군대 내부의 비리 혹은 정부의 비리로 인해 보급이 끊기면 애국심이 있는 군인조차도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이는 경제적 이유보다 이데올리기가 인간의 행동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숙명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능동적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경제적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의 전제조건으로서의 헤게모니는 다른 누구보다 정당을 통해서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헤게모니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국가의 통제하에 있는 상부구조 그리고 헤게모니에 역사성과 정당성 그리고 체계와 지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단체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정당은 정당을 대표하는 강력히 있고, 정치활동을 통해 국가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와 정당 내부의 관료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당이 헤게모니 형성에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게모니는 정당이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해 주고, 이는 정당의 강령을 이해하고 추종하는 시민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해 준다. 정당의 헤게모니를 가진 강력한 시민사회의 존재는 기존 이데올로기가 위기에 처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


(4) 진지전과 기동전

그람시는 전쟁 개념인 진지전과 기동전을 통해 정당의 역할과 헤게모니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그람시가 봤을 때,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공산주의 활동은 기동전이었다. 기동전이란, 상대방의 취약한 부분을 타격해서 전투적 승리 혹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추구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기동전은 탄탄한 진지가 지키는 전투에서는 별 효과를 얻기 힘들다. 기동 전투는 항상 탄탄한 진지에 가로막힌다. 여기서 말하는 탄탄한 진지는 탄탄한 헤게모니를 가진 시민사회를 말한다. 공산주의 운동이 여러 가지 노동적 군사적 승리를 이탈리아에서 얻었지만, 시민들의 헤게모니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았고, 애국심과 국가주의라는 헤게모니를 가진 시민사회는 공산주의 혁명에 큰 걸림돌이 되었기에 이탈리아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헤게모니를 이용한 파시즘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공산당은 와해하였고 그람시 그 자신도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람시는 그의 저서 “옥중 수고”에서 진지전으로 전략 변화를 주장한다. 지금 당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정부의 설립이 아니라, 지속적인 공산주의 정당 활동을 통한 공산주의 헤게모니를 생산하고 이를 공유하는 시민사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가 힘을 키워나갈 수 있다면, 기존 이데올리기가 도전을 받을 때 즉 기존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적절한 답을 주지 못할 때, 기동전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패는 적절한 전투 형태를 선택하지 못한 선택의 문제이지 강령과 사상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5) 그람시가 바라보는 공산주의

그람시가 바라보는 공산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소련이나 지금의 러시아 그리고 북한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소련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은 공산주의의 탈을 쓴 독재주의에 불과하다. 그들은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을 없앤다는 부분에서는 그람시가 생각하는 공산주의와 동일하지만, 관료 집단의 팽창과 시민의 착취,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시스템 등에서는 매우 상이하다.


그람시는 “옥중 수고”에서 민주적 집중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그만의 공산주의를 그려내고 있다. 민주적 집중주의란 레닌이 창안한 개념으로 사회주의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하고 국가의 목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지만, 사회주의 목표를 창안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의견의 표출과 그에 따른 토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람시는 다양성과 토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소수의 엘리트에게 목표설정의 권한을 부여하는 관료적 집중주의를 부정한다. 또한 그람시는 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찾는 방법으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보다 더 우월하다는 입장도 고수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행동과 교육을 수행해야 하므로 전적으로 자유롭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유재산이 사라지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면(이 부분이 매우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유를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기업가나 자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과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사회는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을 생산할 수 있고, 이는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그람시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저서 “노예의 길”에서 공산주의가 전체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중앙집권적 분배의 존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중앙이 목표를 정하게 되면 그전에 어떠한 과정으로 목표가 설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의 필연성을 믿기 때문에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다고 믿기보다는 목표로 가는 길을 만드는 인부들의 능력을 탓하게 된다. 따라서, 목표 설정의 문제를 제기하는 개인의 자유와 의견은 묵살될 수밖에 없다. 또한, 산업 생산물의 분배 또한 중앙집권화되기 때문에 관료제의 권한과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고, 이는 자연적으로 독재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보면 하이에크가 생각하는 공산주의가 더욱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아직 완전한 형태의 공산주의는 실현된 적 없다는 가정하에서 그람시의 예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리던 이상적 국가는 아니고 오히려 다양한 의견의 개진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목표 아래에서, 개인의 자유와 발전을 실현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궁극적 목적이다.


(6) 내 생각

그람시의 “옥중 수고”는 마르크시즘의 실패에 대한 그람시의 생각을 쓴 책으로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특정 사상을 가진 이론가와 정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람시는 강제와 협력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하는 것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서구사회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명백하다.


첫째,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헤게모니와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헤게모니의 성공적 형성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1, 2차 세계대전 후에 새로운 국가적 비전이었다. 냉전 시대에 세계의 반은 자본주의를 다른 반은 공산주의를 선택했는데, 소련과 중국이 오염된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비참한 실패를 보여주면서 서구사회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헤게모니가 쉽게 형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경제발전을 통해 교육과 경찰력 등 대부분의 상부구조를 장악했고, 이는 반공교육 및 자본주의의 장밋빛 미래를 그려주면서 사상형성에도 한몫했다. 특히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서는 억압되었던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허용되면서 다양한 예술적 문화적 헤게모니 또한 형성되었다.


둘째,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헤게모니의 형성에는 매우 긴 시간과 노력 그리고 성공의 예시가 필요하다.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헤게모니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삶과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발달한 인간상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이기심이 추구하는 단기적이고 물질적 삶에서 탈피한 개인이 필수적으로 필요한데 이는 많은 인내와 노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개인이 많을 때, 공산주의 경제도 성공할 수 있고 니부어가 말한 개인의 “선의지”에 기반한 국가 강제력의 사용과 분배가 가능해진다. 불행히도 소련과 중국은 그러한 시민사회 형성에 필요한 시간과 조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서구의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실패일 뿐이기 때문에 자기의 이기심을 희생하면서까지 공산주의를 추구할 유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주는 달콤한 물질적 풍요에 쉽게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구시민들은 공산주의에 적개심과 부정적인 인식만 가지게 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또한, 그람시의 진지전 접근은 본질적으로 공산사회를 만들기에 부적합하다. 위에 말한 것처럼,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희생을 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람시의 진지전에 참여한 개인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물질적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람시와 같이 공산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를 단련한 공산주의자들은 흔들림 없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강력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신념과 강령은 자본주의에 희석될 것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오히려 자본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이러한 교류와 발전이 공산주의의 실패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에 눈이 멀어 인간을 희생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진지의 영향을 받아 더욱 인간적인 자본주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또한 스스로 위기를 느낄 것이고 시민들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이 현대 형태의 복지국가로 회귀한 것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7) 내 생각(2)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공산주의의 대표주자로 인식되는 소련과 중국의 실패가 과연 공산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면 자본주의에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모든 시장참여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자와 패자가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개인의 본성인 이기심을 발현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이기심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명백한 승자와 패자의 존재는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기본적인 명제에 어긋난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적 행복의 기본은 남과의 비교에 의한 타인의 불행을 동반한다. 내가 스포츠카를 타면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스피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나보다 저렴한 자동차를 타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시계를 차면서 행복한 이유는 시계가 더욱 정확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런 시계를 차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질 자체가 주는 효용과 행복한 가치에 의한 행복이 아니라 같은 물질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과 그 우월감이 주는 타인의 불행이 우리 행복의 기반이다. 이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이는 모순이다.


둘째, 자본주의의 행복은 물질의 효용이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물질을 구매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억누르고 새로운 사람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을 하고 나서 꿀 같은 휴식을 바라지만, 남들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휴식하고자 하는 나의 자아를 억누르고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일하지 않았을 때, 뒤처질 수 있다고 느끼는 불안감은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데 꼭 가져야 할 정신적 불행이다. 자본주의는 더욱 효과적으로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적, 관료적 변화를 병행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적응하기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도록 강요받고 또 강요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진정한 행복이 아닌, 물질적 행복 그리고 이기적 행복을 위해 달려 나간다. 물론, 이것이 무슨 문제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 자체가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 이미 침착된 개인이 가지는 질문일 수도 있다.


또한, 그람시의 진지전 접근은 본질적으로 공산사회를 만들기에 부적합하다. 위에 말한 것처럼,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희생을 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람시의 진지전에 참여한 개인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물질적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람시와 같이 공산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를 단련한 공산주의자들은 흔들림 없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강력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신념과 강령은 자본주의에 희석될 것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오히려 자본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이러한 교류와 발전이 공산주의의 실패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에 눈이 멀어 인간을 희생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진지의 영향을 받아 더욱 인간적인 자본주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또한 스스로 위기를 느낄 것이고 시민들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이 현대 형태의 복지국가로 회귀한 것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7) 내 생각(2)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공산주의의 대표주자로 인식되는 소련과 중국의 실패가 과연 공산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면 자본주의에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모든 시장참여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자와 패자가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개인의 본성인 이기심을 발현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이기심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명백한 승자와 패자의 존재는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기본적인 명제에 어긋난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적 행복의 기본은 남과의 비교에 의한 타인의 불행을 동반한다. 내가 스포츠카를 타면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스피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나보다 저렴한 자동차를 타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시계를 차면서 행복한 이유는 시계가 더욱 정확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런 시계를 차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질 자체가 주는 효용과 행복한 가치에 의한 행복이 아니라 같은 물질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과 그 우월감이 주는 타인의 불행이 우리 행복의 기반이다. 이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이는 모순이다.


둘째, 자본주의의 행복은 물질의 효용이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물질을 구매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억누르고 새로운 사람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을 하고 나서 꿀 같은 휴식을 바라지만, 남들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휴식하고자 하는 나의 자아를 억누르고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일하지 않았을 때, 뒤처질 수 있다고 느끼는 불안감은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데 꼭 가져야 할 정신적 불행이다. 자본주의는 더욱 효과적으로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적, 관료적 변화를 병행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적응하기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도록 강요받고 또 강요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진정한 행복이 아닌, 물질적 행복 그리고 이기적 행복을 위해 달려 나간다. 물론, 이것이 무슨 문제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 자체가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 이미 침착된 개인이 가지는 질문일 수도 있다.


셋째, 자본주의가 억누르는 개인의 본능이 개인을 불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본능은 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이는 첫 번째 이유에서 논의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을 최대한 활용하고 이기심은 상대를 불행하게 만든다. 이는 국내 상황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이기심은 제한 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게 되고 정해진 자원과 노동력을 가진 국가는 자국민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리한 확장을 시도한다. 이는 과거에는 제국주의의 팽창을 가져왔고 지금은 제국주의 같은 군사적 속박은 하지 않지만, 경제적으로 타국을 속박한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자국민의 불행보다 더 비참한 타국민의 불행을 동반한다. 물론 도덕적으로 단련된 인간은 이런 속박된 관계를 피하려 노력하겠지만, 개인을 숫자와 효율성으로 평가하는 자본주의의 분업은 인간에게서 도덕성을 벗겨내고 물질을 추구하라고 계속해서 개인을 압박한다.


따라서, 그람시의 “옥중 수고”는 지금 읽어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엘살바도르의 영웅인가, 독재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