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는 인간』, 카뮈가 말하는 윤리의 조건

살인을 거부하고 연대를 선택하는 인간의 길


서론

부조리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은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에서 논의된 부조리의 범위를 확장한다.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이 부조리와 이에 반항하는 개인을 그려냈다면, “반항하는 인간”은 인간이 만든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 집단의 모습을 그려낸다. 인간의 도덕과 말없이 닥친 시련의 거리감이 개인적 부조리라면, “반항하는 인간”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통치 체제의 부조리와 그에 맞서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카뮈는 사회적 부조리에서의 반항과 개인적 부조리에서의 반항을 다른 모습으로 그려낸다. 사회적 부조리의 생성에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개입했기에 단순히 반항하며 살아가라고 하지 않는다. 사회적 부조리에는 그에 맞는 반항이 있고, 이는 인간이 만든 체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방향으로의 반항이다. 그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반항의 모습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카뮈가 바라본 역사적 반항의 인물과 그들의 생각을 다시 조명하고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여기에는 마르크스, 니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도 포함된다. 민주주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카뮈가 긍정하는 반항적 체제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종말이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자랑스러운 포효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 또한 허무주의 또는 역사주의자가 행했던 같은 문제를 내재하고 있었고, 이는 지금과 같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긍정적 반항은 민주주의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혼합한 태도로 보이며, 이는 폭력을 부정하고 연대를 통한 세상의 변화를 긍정한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반항하는 인간이란 “농(no)”와 “위(yes)”를 동시에 외치는 인간을 말한다. “농(no)”만 외치는 인간은 자신을 억압하는 문제에만 얽매인 채 긍정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위(yes)”만 외치는 인간은 억압하는 상황에 애써 눈을 감고 정신승리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농(no)”와 “위(yes)”를 같이 외치는 인간이란,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 역학 관계를 파악하고 이 쇠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폭력과 살인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를 긍정하고 연대로 바꾸어나가는 인간을 말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자살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자살이란 억압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무한한 예속의 세계에 자신을 빠뜨리는 행위로 묘사된다. 제우스의 저주를 받던 시지프가 돌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혹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권태에 굴복해 자신의 목숨을 끊어낸다면, 제우스는 승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제우스는 시지프가 계속된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자로서 제우스의 발아래 무릎을 꿇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순간, 시지프는 타자에 지나지 않고 몸부림을 통한 반항을 할 수 없다. 제우스는 또 다른 시지프를 찾아, 그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살은 목숨뿐만 아니라 긍지와 반항 자체를 파괴하고 억압자에게 다시 억압할 에너지를 부여한다.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반항하는 삶은 살인을 부정한다. 피억압자는 억압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둘의 관계를 파괴하고 억압자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 이제까지 겪었던 고통, 비인간적 대접과 조롱 등 둘의 관계 하나하나가 살인이라는 충동에 피의 에너지를 부여한다. 하지만, 카뮈에 따르면 살인은 반항하는 인간의 의미를 파괴하고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예속 관계에 무한한 생명을 부과한다.


왜?

첫째, 반항하는 인간은 피억압자와 억압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순한 위치의 이동은 종속적 관계라는 인류의 적을 두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들의 위치만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계속해서 반항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고 인류는 반항과 그를 억압하는 인간들의 지속적 투쟁장으로 남겨진다. 살인은 투쟁의 굴레를 끊어내지 않고 오히려 연장하고 복수라는 의미까지 부여한다.


둘째, 반항하는 인간은 현재 피억압자이지만,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통해 보편적 인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피억압자의 삶은 여러 가지 기회를 박탈당한 삶이다. 교육, 경험, 기회 등 성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이러한 토지와 대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농(no)”를 외치며 반항해야 한다고 외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배움의 토양이 된다. 노동, 관계, 비참한 대접 등 이 모든 것이 “위(yes)”를 외치기 위한 배움의 장이 될 것이다. 살인을 통한 위치의 바꿈은 피억압자에게 다시 성장의 토양을 빼앗아 인간적 성장의 기회를 박탈한다. 피억압자가 스스로 억압자가 되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다.


부조리와 고통: 살인과 혁명은 해답이 아닌가?

하지만, 왜 피억압자는 그런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살인, 혁명이라는 방법은 지금의 고통을 끝낼 수 있지 않은가? 무슨 권리로 그들의 고통을 영속화시키는가? 여기서도 우리는 부조리의 핵심 개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조리는 내가 조종할 수 없다. 벗어나고자 한다고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그 삶을 살아가면서 의미를 찾을 뿐이다. 이는 사회적 부조리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억압자로 고통받는 것은 부조리다. 하지만, 부조리의 파괴가 인간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조리는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의미를 위해 묵묵히 견디면서 반항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살인은 정당하지 않다.


잘못된 반항: 역사 속 그릇된 반항들

카뮈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농(no)”를 외치는 반항하는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니체 같은 형이상학적 반항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 전체주의자, 극단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역사적 반항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농(no)”만 외치는 반항인들, “위(yes)”를 외쳐보지도 못했거나 외쳐볼 깜냥도 가지지 못한 이런 인간들의 반항은 잘못되었다. 이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긍정적이고 보편적 가치의 부재와 절대적 진리의 긍정성이다.

카뮈는 “농(no)”만 외칠 때,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봤을 때, 체제 변화를 위한 혁명은 그러했다. 인간이라는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긍정성이 아니라 체제 변화라는 목적이 주가 되는 이들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인간 소외와 희생을 동반한다. 피억압자를 구제하기 위해 또 다른 피억압자를 희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모순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움직임인가? 위에 말한 것처럼 이는 끊임없는 피억압자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적의 유지에 최고의 자양분이 된다. 프랑스혁명이 ‘기요틴 혁명’이라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마오의 문화혁명이 사람을 도구로 보고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른 것도 사건이 아니라 필연이다. 반항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런 움직임은 끊임없이 표류하며 고통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둘째, 역사의 절대성으로 포장된 절대적 진리의 긍정 또한 반항하는 인간의 적이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혁명관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 왜? 미래는 프롤레타리아의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 역시 절대적 민족주의 역사관 속에서, 게르만족의 승리를 필연으로 여겼다. 승리를 위해 희생하라, 승리를 위해 눈을 감고 유대인을 학살하라. 절대적 진리 앞에 손을 들고 “농(no)”를 외칠 수 없다. 개인은 역사적 진리 앞에 한없이 쪼그라들고 나약하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약할 뿐만 아니라 악하다. 질문할 수 없는 그들의 거침없는 행진은 반항하는 인간이 한없이 반항했던 중세시대의 종교적 억압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카뮈의 눈에는 마르크스주의는 집단 사기극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또 다른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헌법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 역사의 절대성은 없고, 시민과 정치의 요구로 인해 미래는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겉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민주주의 또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냉전의 승리에 심하게 도취된 나머지 역사의 종말이라는 절대적 사치에 기반한 포효를 했고, 이는 현재의 혼란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역사의 종언이란 민주주의가 승리한 체제라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이러한 기치 아래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 민주주의는 반민주적이라고 보이는 국가를 억압하기 시작했고, 연대를 통한 변화가 아니라 강제력과 경제력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 이는 새로운 피억압자를 생산했고, 피억압자는 테러와 전쟁 그리고 자기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서구 민주주의와 대립하고 있다. 냉전시대만큼 혹은 그보다 더 불안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우리의 선택에서 비롯된 상황일까? 카뮈라면 분명 후자에 더 가까운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의 목적

반항하는 인간은 보편적 가치의 긍정과 절대적 진리의 부정을 추구한다. 이는 마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보는 것 같다.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자유는 인류가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라고 말한다. 절대 침해할 수 없는 자유는 인간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고 의미 있게 만든다. 밀의 자유는 아이작 벌린에 의해 발전한다. 아이작 벌린에 의하면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있고 두 가지 자유가 다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극적 자유란, 다른 사람의 위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말한다. 다른 사람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나의 선택을 억누르거나 빼앗아 갈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경찰과 같은 국가로부터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부여받은 국가기관의 존재가 필수다. 만약, 타인이 어떤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면 국가는 즉각 개입해 그 사람의 행위를 제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목숨을 지킬 권리도 여기에 포함된다. 간단히 이야기해, 목숨이 없다면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을 살아갈 권리야말로 가장 중요한 자유다.


적극적 자유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직접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기반을 일컫는다. 교육을 받을 권리, 건강할 권리, 타인과 소통할 권리 등이 포함된다. 물론 적극적 자유에 대한 요구는 전체주의로 변질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적극적 자유란 소극적 자유와 다르게 재화가 요구되고, 모자란 재화를 충족하기 위해서 중앙집권적 정치경제 체제가 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밀과 카뮈가 원하는 자유는 중앙집권적 자유가 아니라 소극적 자유와 적절한 적극적 자유다.


따라서, 밀은 위의 자유를 누를 권리를 보편적 가치로 상정하고 발언과 토론의 자유를 통해 절대적 진리를 부정한다. 이는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상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카뮈는 이러한 반항하는 인간상을 통해 연대가 가능하고 긍정적 세상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론

“반항하는 인간”은 “시지프 신화”나 “이방인”보다 좀 더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해 쓴 책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체제가 선사하는 부조리라는 극장은 역사적으로 주인공을 바꿔가면서 상영되었다. 신이라는 절대적 억압자가 등장한 중세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론이라는 무기가 피억압자에게 선사되었다. 그 후, 억압자의 주인공 자리는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자본이라는 유례없는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는 두 가지 다른 방향을 설정했다. 한 방향은 자본주의를 내부에서 변화시키면서 피억압자와 억압자의 거리감을 줄이는 쪽으로 발전했고, 다른 방향은 역사의 절대성이라는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억압자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두 명의 주인공이 한 연극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냉전이라는 무대에서 충돌했고, 자본주의는 일시적으로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며 승리자로 보였다. 하지만,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대본은 계속해서 상영관과 새 주인공을 찾았고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상향은 도달할 수 없는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싸움과 공격성 그리고 경쟁에서 희열을 느끼는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질은 이상향에 가깝지만 이상향과 본질 사이의 거리감을 늘리고 도랑을 파고 장애물을 생성하는 어떤 존재가 존재하는 것인가? 답은 없겠지만, 카뮈는 후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카뮈의 생각에,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잘못된 굴레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우리 인류가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향으로 가는 길은 계속해서 미로화되고 있는 것이다. “위(yes)”를 대변하는 인류의 긍정적 보편적 가치는 피억압자의 고통 속에 갇히고 숨겨지고 있다. 눈에 써진 안대로 인해 개인은 맹목적으로 “농(no)”를 외치고 살인과 과격한 방법으로 이상향에 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는 굴레의 연장이요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다. 따라서, 카뮈는 과감하게 고통을 받아들이고 연대라는 다른 방식을 택하기를 원한다.


연대란, 다양성 속에서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통일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인간은 다양하다. 성격도, 인종도, 종교도 다양하다. 하지만, 다양성이 곧 혼란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다양성은 인간이라는 보편적 존재 위에 덧칠해진 물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연대를 위해서는 다양성의 기반이 되는 인간이라는 통일성을 위한 가치를 찾고 그것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고통의 존재가 부정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따라서, 연대를 위해서 우리가 넘을 수 없는 공통된 가치를 형성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의 약속은 없다. 언제까지 반항해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만든 공통적 가치도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조리란 그런 것이다. 빠른 길은 없고 고통받지 않는 길도 없다. 하지만, 묵묵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고통을 견디고 고통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한 반항의 삶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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