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그림자를 향한 주먹질을 관두기
인터넷에서 '섀도복싱(shadow boxing)'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실제 상대가 아닌 자신의 마음이 만든 그림자에 주먹을 휘두르는 싸움. 나도 이런 싸움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일이다. 큰 물건을 가져온 배달원분이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없이 몸짓으로만 제품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는 "무거웠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응. 응"이라고 하며 가버렸다. 순간 '사람을 무시하나'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했다. 같이 있던 선배가 "저분 언어장애가 있으신 것 같아."라고 했고, 나는 내 생각이 앞서나갔음을 깨달았다. 내가 만든 '무례한 사람'이라는 그림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던 셈이다.
이런 싸움은 육아라는 링에서도 벌어진다. 인지치료의 창시자 아론 벡(Aaron Beck)은 마음에 순간 스치는 '자동적인 생각'은 상황을 왜곡하고 과장하여 분노의 불씨가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부모에게 그 불씨는 아이의 말과 행동에 덧붙이는 '자신의 해석'일 수 있다.
20개월 아이가 밥을 흘리며 먹을 때 '흘리지 말라고 여러 번 했던 내 말을 우습게 아는 아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분명히 며칠 전 가르쳐 준 문제를 아이가 또 틀릴 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라는 생각이 지나간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말대꾸를 할 때 '버릇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짧게 스쳐가는 이런 생각들은 실제 아이가 아닌 '아이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 그림자는 부모의 화를 돋우고, 거친 말이 나갈 가능성을 높인다. 부모의 마음이 만든 아이 그림자와의 섀도복싱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아이의 그림자를 만드는 건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때로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간절함이 아이의 그림자를 만든다. 부모는 아이의 실수나 서툰 모습에 행여 아이가 뭔가를 못해내는 사람으로 클까 봐 불안하다. 게다가 육아와 일상으로 피로가 겹치면 마음의 여유가 줄어들고 조급해진다. 어쩌면 섀도복싱은 심신이 지친 부모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아이에게도 사정이 있다. 20개월 된 아이는 아직 손 근육이 완전히 발달하지는 않아서 흘리며 먹기도 한다. 아이다 보니 알려준 걸 한 번에 완벽하게 숙지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나치게 버릇없는 말대꾸는 훈육이 필요하지만, 말대꾸의 이면에는 아이가 자기 생각을 표현할 만큼 마음이 자랐다는 신호도 담겨 있다.
훈육할 때는 아이의 그림자가 아닌 '실제 아이'를 보는 게 중요하다. 아이를 '안 좋은 면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고 화를 폭발시키면, 아이의 마음에는 부모의 가르침이 들어오는 대신 억울한 마음이 쌓는다.
그림자와의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는 찰나의 제어 장치가 필요하다. 화가 치솟는 순간, 험한 말이 나가려는 순간, 딱 3초만 멈추고 자신에게 질문하자.
'지금 내가 화내는 대상은 실제 아이인가, 내 마음이 만든 아이의 그림자인가?'
찰나의 질문은 폭주하는 감정의 속도를 늦춘다. '나도 서투를 때가 있었지.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어.' '아이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걸 수 있어.'라는 생각은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여유를 준다.
아이의 행동에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음을 떠올리려는 작은 시도가 섀도복싱을 멈출 수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을 내리면 아이의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