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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현 Nov 15. 2024

수현(修賢) 3





1.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나 오늘 할 일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김없이 글 생각이 났다. 잠시 모니터 앞에 앉을까 고민을 하였으나, 결국 대옷만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거북한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각을 잡고 무언가 시작하려는 게 어려웠기 때문일까. 돌아보니 이런 경험이 한둘이 아니다. 문득 글 생각에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켜면 그 거대한 흰 바탕 앞에 그저 멍하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곤 하는 것이었다. 그게 영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노트북으로 내 작업장을 옮겼다. 노트북 화면은 물론 모니터의 그것보다 작았고, 내게 주어진 흰색 할당량도 줄어들었다. 작가는 마음이 한결 편했다. 둘 사이 줄어든 센티미터만큼, 꼭 그만큼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물리적으로 덜어낸 것 같아서. 그래서 한동안 신명 나게 노트북으로 작업을 했더랬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노트북의 화면도 너무 비대해지고 말았다. 글쓰기가 유달리 괴로운 새벽 다음 날이면 꼭 그리였다. 그래서 노트북에서 그것보 더 작은 태블릿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얼마 못가 한번 더, 태블릿에서 더 작은 휴대폰으로 장소를 옮겨야다.


    지금 이 글도 어느 공원 작은 벤치에 쪼그려 앉아 휴대폰으로 적고 있다. 초가을 하늘은 아직 추운 기색이 만연치 않다.



2.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오래도록 고생했던 게임 중독사 불현듯 떠오른다. 학창시절부터 게임 문제로 한참 고생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모니터라는 물건이 자학과 패배감 따위를 상징하는 무엇으로 변질된 것 같다. 하루는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미워서, 또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든 게임 자체가 너무 워서 집 오자마자 거실에 설치된 모니터를 망치로 있는 힘껏 내리친 적이 있다. 아주 망가질 때까지 한참을 내리쳤다. 무척 오래 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적잖이 상징적인 일이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모니터가 상징하는 패배주의에서. 하지만 당시 어린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을 더 고생했고 지금에서야 조금씩 해방되고 있다. 오늘로써 비로소 해방되고 있다.




3.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모니터 자체는 아무런 당위도, 자학도, 패배주의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저 유용한 물건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내 과거와 엮어 어떤 상징을 갖는지는 아무래도 좋다.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물에 던져 흘려보낼 일이다.

    거대한 흰 여백도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것이 어찌하여 채워야 할 갑갑한 압박이란 말인가. 그것은 되레 드넓은 자유와 흥미로운 상상, 다양한 시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전개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다. 이렇게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다시 바라보니 웃음부터 터져 나온다. 나는 여태껏 뭐가 그렇게 다 진지했던 것일까. (하하)


    오랜 시간 벤치에 앉아 글을 쓰려니 허리가 아프다. 내일은 편안히 책상에 앉아 글을 작성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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