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회의 그리고 반항하는 부하직원 이야기 ^^
'지금의 직장을 떠나면' 시리즈로는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던 저와 후배 Z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의 키타큐슈까지 건너와 다른 문화 속에서 적응해 가며 일과 삶을 일구고 있습니다.
이제 후배 Z가 우리나라의 대기업을 떠나 일본의 중소기업인 우리 회사에 온 지 두 달이 지났다. 지난주에는 영업회의가 있었다. 후배 Z는 처음으로 일본 각지를 담당하는 영업 직원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관동 지역을 담당하는 영업 담당자도 키타큐슈의 본사까지 날아와 이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 전날 저녁 영업맨들이 모여 중국 요릿집에서 회식을 가지며 단합을 도모한 다음이었다.
우리 회사는 일본 전역에서 철과 스테인리스 스크랩(고철)을 모아 해외의 제철회사에 수출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회사의 영업회의라고 하면 각 지역의 스크랩 구매 담당자들이 일단 포함되고, 나와 같이 수출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참가하게 된다.
관동(일본 동쪽 도쿄 부근 수도권 일대를 칭함) 지역을 담당하는 직원이 아주 재미있는 친구다. 중국어 구사가 가능하고 마작에 조예가 깊어 대회까지 참가하여 입상을 할 정도란다. 목소리가 중저음인 데다가 또박또박 말하는 편이라서 의사전달이 확실하다. 직원들끼리 정보 교류를 위해 SNS를 자주 이용하는 편인데 거기서도 갖가지 이모티콘과 유머 가득한 말투로 톡톡 튀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현대식 일어 표현을 이런 SNS 대화를 보며 많이 배우고 있다.
영업회의, 땅!
회의가 시작됐다. 요새 니켈 등 원자재 가격이 반등하고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일본에서 발생하는 스테인리스 스크랩 가격이 오르고 있다. 이런 연유로 최근, 우리 회사에 스크랩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기대하며 물건을 잘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주요 등장인물
핫토리 상무: 구매/인사/재무 총책임자
큰섬 씨: 관동지역 구매영업 책임자
칸나 사장: 사람을 꿰뚫어 보는 카리스마의 여자 사장님
핫토리 상무: "자, 지금 가격이 오르고 있으니까 업자들이 물건을 잘 안 내놓고 있군요. 그래도 우리 수출 계약량 맞추려면 좀 더 분발해야겠어요. 관동,관서,큐슈 담당자들 공급업체들에 연락 좀 더 자주 해서 물량 좀 더 받아 주세요."
큰섬 씨: "지금은 전화해도 소용없습니다. 물량 꽉 쥐고 있어요. 8월까지 안 팔고 기다릴 태셉니다."
핫토리 상무: "에이 그래도 전화 한 번 합시다. 지금 시장 가격보다 좀 올려 주더라도 물량을 좀 받아야 해요."
칸나 사장: "그래요. 현재 시장 가격이 kg당 115엔이라 가정해서 118~120엔을 줘서라도 물량 받으면, 다음 달에 시장 가격이 125엔까지 올랐을 때 우리한테는 이익이 됩니다. 좀 귀찮고 아쉬운 소리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물량이 나오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영업 담당자들이 핫토리 상무님과 사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데 큰섬 씨의 표정이 뾰루퉁했다. 다들 한 트럭이라도 더 물량을 구해서 계약량을 빨리 채워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는 분위기였다.
핫토리 상무님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자자 오후부터 한 군데씩 전화 돌립시다. 지금 가격으로 혹시 힘드시면 얼마 정도를 생각하고 계신지 넌지시 한 번 물어봐요. 반대 상황에서 가격이 내려갈 때 우리도 구매를 많이 미루지 않고 사드리려고 노력할 거라고 하면서요. "
핫토리 상무님이 이렇게 말하면서 큰섬 씨의 눈치를 살폈다. 큰섬 씨는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핫토리 상무 쪽은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내리깔며 묵묵부답이었다. 이거 이거 일본에 와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상사가 회의를 하면서 면전에서 업무 지시를 내리는데 부하 직원이 호응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핫토리 상무님이 재차 웃으며 "전화할 거죠? 하는 거죠?"라고 대답을 유도해도 침묵이다. 아니, 결국에는 말을 하긴 했다.
"아니오, 전화 안 할 겁니다. 전화 안 해요."
순간 분위기는 얼음물을 끼얹은 듯 촤악 가라앉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사장님과 상무님이 배석하고 전 구매 및 수출 담당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담당자 하나가 일종의 '하극상'을 벌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때까지 나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큰섬 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저렇게 완강하게 나오고 있는 걸까? 아마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 SNS로 직원들끼리 업무상 이야기를 나누는 걸 봐도, 이전에 봤던 큰섬 씨의 모습을 봐도 이렇게까지 똥고집으로 나올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러니까 큰섬 씨는 공급업체들에 전화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지금 가격이 올라가는 게 확실하니까 얼마인지 물어봐도 더 팔 생각이 없을 거라는 거지요?"
큰섬 씨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그런 의미라고 했다.
" 제 생각에도 지금 시장 상황에서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열 군데 전화해서 단 한 군데라도 혹시 물량을 주겠다고 하는 곳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조금이라도 물건을 받을 수 있다면 말이에요. "
이 말이 끝나자마자 핫토리 상무님이 내 말에 호응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얼마 전 큰섬 씨가 담당하는 공급업체가 100톤을 공급하기로 했다가 일부 수량만 공급한 건을 언급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 큰섬 씨가 바로 반응했다. 100톤을 다 공급하지 못했다고 핫토리 상무님이 큰섬 씨한테 타박을 했다는 거다. 자기도 물량을 더 받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물건을 사다 보면 이렇게 가격이 급등하는 등의 환경 변화로 애초에 기대했던 수량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는 설명인 것 같았다. 수출 계약처럼 일일이 계약서를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고 전화로 대부분 이루어지는 오더이기 때문에 이렇게 공급처와 구매자 상호 간 거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제야 이 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하극상 분위기가 왜 만들어졌는지 감이 왔다. 관동지역 구매 담당 큰섬 씨는 자신도 최선을 다했지만 때로는 기대했던 대로 다 되지 못할 때가 있는데 매번 그런 부분이 문제시되어 비난을 받는 게 싫었던 것이다. 회의 때 윗분들이 말로는, 이런 가격 상승기에 한 트럭이라도 단 몇 톤이라도 구매하면 좋다고 강조하지만, 막상 거래처 사람들을 구슬리고 설득해서 물량을 받기로 했는데 조금이라도 물량이 모자라게 들어오면 혼나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시황에서는 큰섬 씨는 아예 거래처에 아쉬운 소리도 하기 싫고 그렇게 힘들게 해서 칭찬도 못 받고 욕만 먹을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실은 나도 수출 담당자로서 비슷한 불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큰섬 씨는 구매 담당자이지만, 나는 수출, 즉 구매의 반대인 판매 담당자다. 우리 회사는 일본 국내에서 물건을 집하해서 대부분 수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판매가 곧 수출이나 다름없다. 내 경우엔 한국, 중국, 대만, 인도 등의 각 바이어들과 상담하여 가장 조건이 좋은 바이어향으로 스크랩 판매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인데 이 경우도 큰섬 씨와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 역시 가격과 관련이 되는 것인데, 열심히 견적을 보내고 가격 협상을 해서 그 당시 시장 상황에서 가장 좋은 조건, 그러니까 주로 비싼 가격으로 팔고 난 후 시장 가격이 계속 올라갈 때 아주 난감해지곤 한다.
분명히 판매를 위해, 모든 바이어들의 가격 수준을 받고 시장 상황을 보고하고 상무님, 사장님 재가까지 받아서 수출 판매 계약을 체결했음에도 팔고 나서 가격이 확 올라버리면 나중에 그 비난의 화살이 수출 책임자인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좀더 기다렸으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일찍 팔았느냐. 그리고 해상운임을 줄이기 위해 평소 3천톤 계약하던 것을 5천톤으로 계약해 이윤을 확대시킨 공로는 사라지고, 왜 하필이면 가격이 오르는데 싸게 평소보다 더 많이 팔았느냐 하는 식의 비난을 받는 것이다.
큰섬 씨는 물건을 사고, 나는 물건을 판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시장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생기는 리스크로 인해 담당자가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마찬가지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하극상을 벌인다고 의아하게 생각되던 큰섬 씨의 마음이 이해되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장님도 나와 비슷하게 상황을 이해하신 것 같았다. 상무나 사장이 시켰는데 전화 한 통 못하겠다고 버팅기는 부하를 바로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마치 땡깡피우는 아들을 바라보듯이 미소를 한아름 머금고 타이르셨다. 살짝 핫토리상을 나무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큰섬 씨 편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큰섬 씨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아쉬운 전화는 정말 하기 싫은데 사장님과 다른 동료들한테 하소연할 기회가 생기고 대빵인 사장님이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 같자 마음이 좀 풀려 보였다. 여태껏 보아온 보통의 회사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무리 성품이 온화하고 인격적으로 갖추어진 상사라도 지시사항을 면전에서 거부하는 부하를 이런 식으로 달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규모가 좀 작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회사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리 회사도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후배 Z와 나는 일본 사람들이 영업회의를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중간중간 눈빛을 교환했다. 살짝 우리말로 회의 관전평을 나누기도 했다. 때로는 이 사람들 왜 이러나, 때로는 아, 이런 배경이 있어서 저런 반응이 나왔구나, 각자의 인간관계란 게 여기서도 많이 작용하는구나 하는 식의 공감을 나누는 눈빛과 관전평이었다.
일어가 아직 서툴다. 한동안 공부를 게을리했다. 영업회의를 마치고 나니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직원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일어에 능통한 후배 Z한테 많이 배우고 우리 회사의 동료들과 좀 더 수다를 많이 떨어야겠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나는 국외자와 같은 어정쩡한 위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귀찮고 힘들긴 하다. 그래도 다시 의지를 다잡아 보자. 까짓 거 그래봤자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 아닌가. 할 수 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