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로 3시간 반 걸리는 거래처에 퇴직 인사를 하러?
어제는 일본 상사에서 41년 동안 일하시다 퇴직하시는 분이 나고야에서 키타큐슈 우리 회사까지 찾아오셨다. 신칸센으로 약 3시간 반 정도 걸리니 도어 투 도어로 아마 4시간 반~5시간 정도는 걸렸을 것이다.
담당자가 바뀌어 신임 담당자가 혼자 인사하러 오거나 둘이 같이 오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퇴직하시는 분이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의 거래처에 퇴직인사를 하러 간다는 말도 오시는 분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중요한 거래처라 생각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가 두 번의 퇴직과 한 번의 전임(중국 해외 법인-한국 본사 이동)을 경험해 보았고 많은 분들의 퇴직을 지켜본 바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올해 만으로 예순넷이 되셨다고 한다. 조금 마른 체격에 배도 안 나오시고 얼굴에 주름도 별로 많지 않으셨다. 평생 얼마나 부지런히 살아오셨을까 하는 가늠을 해보았다. 내가 한국인이란 걸 아시고 한국어를 중간중간 섞어서 말하시기도 했다. 알고 보니 이분이 계시는 일본 상사의 서울 지사 제 1호 주재원으로 80년대 초에 파견을 나가 몇 년 동안 일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이사를 갔지만 당시 서울 시청 근처에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80년대 초라면 우리나라가 한참 경제적으로 들썩들썩하며 성장하던 활기찬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서른 살 미혼 상사맨이 갔으니 얼마나 신나게 일했을까 상상하니 내 몸이 다 근질근질해지는 것 같다.
오래된 정원이 있는 고풍스런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초밥집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기와에 녹찻빛 소바가 구워져 나왔다. 비법을 알 길 없는 소스에 그 소바를 한 젓가락 씩 담가 먹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정갈하고 이쁘게 차려입은 초밥 한 접시. 아쉽게도 당시 너무 맛있게 먹는 데 집중하느라 사진을 못 찍었다.
그분이 자연스럽게 식사 후 담배를 꺼내 무셨다. 우리나라에선 이제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방으로 된 식당에서 담배를 태우는 풍경. 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금연인 곳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 따끔하게 한 마디 날렸을 테지만, 이곳은 흡연이 가능한 곳이다. 더구나 41년의 기나긴 직장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떠나시는 분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무시는 모습을 보니 왠지 짙은 동지애 같은 짠한 감정마저 스몄다.
식사를 하면서 혹시 독립을 하실 생각은 없는지 여쭸다. 많은 상사맨들이 은퇴 후에도 개인 사무실을 차려 오퍼상을 하거나 그간의 인맥과 거래처 네트워크를 이용해 활발히 일하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바로 손사래를 치셨다. 자기가 지금까지 편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다 회사의 이름과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냥 겸손하게 말씀하시는 건지 궁금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나이로 육십오 세. 한 직장에서만 무려 41년을 일했다는 것. 단순한 수치만으로도 고온의 수증기가 가득한 방에 들어선 것처럼 훅하는 가벼운 숨막힘이 느껴졌다. 나지막이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는 그분을 대각선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몇 번의 만남밖에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다. 하지만 왜였을까. 세월의 무게였을까. 그분의 인상 때문이었을까. 그냥 마음속에서 잔잔한 경외감과 동정심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일본에서 계속 살다 보면 언젠가 또 다른 이유로 연락이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날은 대낮에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2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지만 다시 기회가 오면 좀 더 긴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가 41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린 삶의 지층을 엿보고 싶다. 더 알고 싶다. 그분의 지난날에 대해.
점심 후 사무실에 들러 커피 한 잔을 하고 떠나셨다. 회사에서 내드린 차에 타고 출발하면서 차창을 열어 고개를 숙이신다. 그동안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셔서 감사했다는 무언의 인사가 전해져 왔다.
이제 16년 일했다. 앞으로 더 얼마나 일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 상사의 그분처럼 내가 일터를 완전히 떠날 때 남아 있는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을는지. 대단한 노하우와 비즈니스 능력을 전수하는 게 아니라도 어제의 나처럼 깊은 동지애와 짠한 마음 한가득 흘러나오게 할 인생의 선배가 될 수 있을는지.
수고하셨습니다. 열심히 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좀 쉬시면서 그간 못다한 여가도 즐기시고 당신 자신을 위해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또 기회가 허락한다면 그땐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어제 못다한 긴 이야기 들려주십시오.
한국의 후배 이훈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