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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by 안드레아
에피소드 하나

도쿄 어느 에어로빅 강습실


신나는 음악 소리에 맞춰 에어로빅 강습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갑자기 어떤 여자분께서 악! 신음 소리를 내시며 주저앉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국인 40대 아저씨가 춤을 멈추고 그녀 곁으로 갑니다. 괜찮은지 묻고 그녀를 부축해서 구석으로 가려고 합니다. 발목을 접질린 것 같습니다.


그때. 에어로빅 강사가 말합니다.

"그냥 혼자 가게 놔두세요."


그는 잠시 주춤합니다. 지금 강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 부상당한 여자분을 모시고 한쪽으로 이동해 편하게 자리를 잡게 해 줍니다.


에피소드 둘



도쿄 지하철 안


사람이 제법 북적댑니다. 그러나 아주 꽉 찬 지하철은 아닙니다. 신주쿠 역에서 문이 열립니다. 어떤 임산부가 한 손엔 짐을 다른 한 손엔 여자 아이 손을 잡고 들어섭니다. 임산부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아마도 빈자리가 혹시 있을까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던 어느 누구도 임산부와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습니다. 슬쩍 이들을 엿보는 눈빛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선뜻 일어서지는 못합니다.


가운데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옆자리의 여자분과 눈빛을 교환합니다.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아마도 '자리 비켜줄까'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고민만 하다 일어나지 못합니다.


와카마츠 한 시골마을 샛강변



아마도 일본에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가 좀 더 조심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첫 번째 에피소드의 남자가 온라인상에서 지인들에게 물어보네요. 에어로빅 강사가 이상한 건지 자기가 이상한 건지. 지인 A가 답합니다. 에어로빅 강사 정말 이상하네요. 당연히 도와주었어야지요. 다친 사람인데. 혼자 걷지도 못하는데. 아주 잘하셨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지인들은 선뜻 남자가 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대해 지인 A가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어야지요! 당연히! 임산부에 짐까지 게다가 아이까지... 아놔, 일본 사람들 이상하네 정말.."라고 응수합니다. 지인 B가 말합니다. 남편은 그런 경우에 고민을 한다고. 양보해 주고 싶은데 눈치를 본다고 말입니다. 왜 눈치를 보냐고 지인 C가 묻습니다. 남편 이야기를 꺼낸 지인 B가 말합니다.


"오해할 수 있어요."


오해할 수 있다.

오해할 수 있다 라...


온라인상에서 이 이상으로 이야기가 더 깊어지진 못했어요. '오해할 수 있어요'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모두들 음미하는 듯했고 화제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지요. 저는 어떤 경우에 오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요. 먼저 드는 생각은 남자가 여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오해로 비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했지요. 남자는 순수한 의미로 다친 여자를 부축하거나 업어주는 것이라 해도 여자나 주변 사람들이 볼 때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는 거겠지요.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순수한 도움이 아니라 호감 가는 이성이기 때문에 무언가 관계의 진전을 염두에 두고 도와주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나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려고 이런저런 가정을 해보아도 여전히 에어로빅 강사의 말이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데 주저하는 행동에 공감이 가진 않더라고요. 그냥 많은 걸 생각하기보다는 단순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까짓 부축 한 번 하고 자리 양보해 주는 걸 가지고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요.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참 다양하고 달라요. 똑같은 경험을 하고 똑같은 걸 보고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마치 다른 걸 본 것처럼 묘사하네요.


"우리 아까 같이 있었잖아요!

똑같은 걸 겪고 당신은 왜 이렇게 말씀하는 거죠?

왜 다른 데 있었던 것처럼 다른 걸 본 것처럼 말씀하시나요?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살다 보면 내가 때론 동료에게 때론 친구에게 때론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지요. 반대로 그들에게 내가 이런 말을 들을 때도 있고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그들을 보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좌절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죠. 그런데 반대로 내가 이해가지 않는다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하고 내 생각이 옳음을 관철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곤 했어요.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이런 갈등을 겪으면서, 나이가 들면 좀 더 현명해지고 좀 더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고, 또 30대에서 40대로 넘어오면서 나는 내가 예전에 생각하던 30대, 40대의 모습이 아님을 깨닫게 되네요. 나이가 들고 경험도 풍부해진 만큼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옳고 그름을 더 명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친구들 사이에서 욕을 먹는 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각각 가정이 따로 있는 중년 남녀가 매주 같은 시각 함께 테니스장에 나타나 운동을 하고 같은 시각에 떠나는 걸 볼 때, 직장에서 부하직원들을 자주 깨고 힘들게 하는 상사나 동료를 거론할 때 그들을 욕하는 분들의 의견에 쉽게 맞장구치곤 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대화를 하고 나면 왠지 기분이 좋질 않았지요. 정말 내가 제대로 알기나 하면서 누구를 욕하고 있는 건가. 나 자신은 그런 욕을 먹지 않을 만큼 잘 살고 있는 것인가.


공자는 사십에 불혹이라 하여 세상일에 쉽게 미혹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즉, 사십에 세상일에 대해 시비 분별을 할 수 있었고 감정 또한 잘 조절할 줄 알았다고 하죠. 그러나 나는 사십이 넘으니 오히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헷갈릴 때가 더 많아진 듯하네요. 나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살았는데 어떻게 남의 욕을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람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되었어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를 때가 많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보기에는 명백히 잘못한 것이고 욕먹을 짓을 한 사람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당사자가 아닌 내가 몰랐던 무언가가 있을지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일는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사는 게 참 힘들어요. 기쁘고 행복한 일도 많이 생기지만 살아가고 있기에 짊어지고 가야 할 것들, 참아야 하는 고통, 나이가 먹어가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인생의 질곡들. 그냥 특별히 나쁜 짓 안 하고 성실히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우리에겐 힘들고 어렵고 지치고 짜증 나고 좌절스럽고 슬픈 일들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더 고통을 주고 싶진 않아요. 안 그래도 힘든데 나 때문에 더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요. 그냥 조금 손해 본다 생각하며 관계를 맺는 게, 별 기대하지 않고 내가 줄 수 있는 걸 그냥 주며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는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성향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타고난 성품이라 쉽게 바뀌진 않네요. 하지만 노력합니다. 나의 시시비비가 결코 객관적인 기준이 될 리 없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성급히 판단하고 재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일러 줍니다. 그리고 설령 정말 잘못을 저지른 게 확실한 걸로 보이더라도 그걸로 그 사람을 포기하거나 내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적어도 그 사람이 다른 좋은 모습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그걸 보아주고 싶어요.


왜냐하면 저 또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모습으로 남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러시더라고요. 나의 이런 생각을 들으시고 이래서 내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게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말과 글이 실제보다 번지르르하다고.


정말 내가 생각해도 말과 글에서 나타나는 내 모습이 내 실제 모습보다 좀 더 나은 것 같아요. 하지만 말과 글에서 보이는 내 모습이 실제와 다르다 해도 그 모습을, 그 이상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의 말과 글이 가지는 불성실함을 조금씩 없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와카마츠 하나노지 뒷편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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