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토리상과의 설전
■오전 8시 55분
핫토리상이 출근해서 옆자리에 앉았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그녀가 “야바이(큰일났네 또는 위험해 정도의 뜻)”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 일본 관서지역 입찰 결과가 나왔는데 관동지역 입찰 결과보다도 더 올랐어요! “
핫토리상의 말은 일본의 철스크랩 (고철) 수출 가격이 또 올라서 걱정이라는 의미였다. 얼마 전 관동철강원료협회에서 철스크랩 수출 입찰을 실시했는데 지난달보다 큰 폭으로 올랐다. 그런데 며칠 뒤인 관서철원협회의 가격은 관동 결과보다 더 오른 것이다.
(보충설명: 핫토리상 – 일본 내 스크랩 구매 책임자, 나 – 해외 수출 계약 책임자)
▶나 “ 네, 가격이 정말 갑자기 확 올랐네요. “
▶핫토리 “ 얼마 전 계약한 대만 바이어와의 오더에서 우리 손해가 크네요.”
▶핫토리 “ 그래서 말인데요. 앞으로는 3천 톤이 넘는 계약은 가급적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같은 회사엔 5천 톤 같은 큰 계약은 역시 리스크가 너무 크네요. “
▶나 “ 이번에 대만에 5천 톤 팔고 나서 가격이 급상승해 손해가 큰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손해를 봤다고 해서 앞으로 큰 계약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는 반대합니다. 만일 관동/관서 입찰 결과 가격이 올랐다면 우리가 얼마 전 맺었던 대만향 계약에서 반대로 더 큰 이익을 보았을 겁니다. “
▶핫토리 “ 그건 그래요. 근데 작년부터 대만 거래를 해보니까 가격이 오를 것 같으면 큰 수량의 Inquiry(구매 문의)가 많이 오더라구요.”
▶나 “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아시겠지만 현재 대만이나 베트남의 바이어들은 가급적 큰 수량의 물량을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2~3천 톤에 비해 5천 톤 1만 톤의 선박 운임이 훨씬 싸지기 때문에 구매 단가가 낮아지니까요. 지금의 트렌드는 큰 수량으로 가고 있습니다. "
▶핫토리 “ 그렇군요. 근데 우리의 Capa(능력)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한 계약당 2천 톤 혹은 3천 톤 까지는 계약을 하고 물량을 매집하는 데 큰 무리가 없지만 5천 톤 이상이 되면 가격 변동에 따라 우리가 져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나 “ 물론 우리의 Capa를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작은 수량만 고집한다면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 회사가 철스크랩 비즈니스를 접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다가는 판매 기회를 잡기가 너무 어려워질 겁니다. ”
▶핫토리 “ 그 이야기는 사장님하고 말씀해 주세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
▶나 “ 잠깐만요. 사장님하고 얘기하라구요? 물론 사장님하고 상의드려야 하겠지만 핫토리상이 왜 빠지시나요? 지금 수출 계약할 때 저한테 판매 가능 수량과 받아야 할 미니멈 가격을 주시는 당사자 아니세요? 지금까지 수출 계약을 할 때 저 혼자만 한 건가요? 사장님, 핫토리상, 저 모두 다 같이 상의해서 결정한 거잖아요.”
▶핫토리 “ 아, 네 맞아요. 같이 결정한 거죠. 이 부장한테 뭐라 하는 게 아니고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해보니까 2~3천톤씩 하는 게 안전하고 힘에 부치지 않는 것 같아서.”
▶나 “ 네, 그래서 저도 핫토리상의 의견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후략.
글로 옮기다 보니 조금은 뉘앙스가 달라지는 것도 같지만 아침부터 뜨거웠다. 평소엔 웃으면서 간식도 나누어 먹고 농담도 하고 잘 지내는 사이지만 일적으로 의견이 갈리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둘 다 웃음기가 없어지고 논리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하며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랬다. 얼마 전 내가 대만 바이어의 Inquiry를 받아 각기 5천톤과 3천톤의 계약 두 건을 했다. 지금까지 2,3천톤 단위의 계약만 하다가 처음으로 5천톤 단위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판매가 끝나고 약 2주가 지난 시점에서 시장 가격이 폭등한 것이다. 만일 지금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면 우리는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수출 책임자로서 내심 뼈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가격 상승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판매를 늦춰 오른 가격으로 판매했을 것이다.
안그래도 수출계약을 주도한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핫토리상의 말들은 공격적으로 들렸다. 비난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지난 해에도 한국 수출 계약 체결 후 가격이 상승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핫토리상은 수량이 너무 컸다며 끌탕했고 내게 앞으로 큰 수량은 자제해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3천톤 단위로 두 건의 계약을 체결했었다.)
이익을 취했던 다른 훨씬 더 많은 계약들이 있지만 이렇게 한 번 손해를 보면 계약 책임자는 화살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핫토리상은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지우려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자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앞으로는 작은 수량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 의견을 들으면서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려웠다.
회사는 현상 유지만 하고자 하면 도퇴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 하는 격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성장 정책을 취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눈앞의 손해와 리스크에만 신경을 쓰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며 너무 보수적으로만 나가려고 한다면 회사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조금 격앙된 대화가 이어지다가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아무래도 내 목소리가 커서 핫토리상이 위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해에도 한 번 이러다 핫토리상이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러다 또 그런 상황이 될 것 같아 의도적으로 조용한 톤으로 낮추었다.
그리고 어깨도 좀 낮추고 좀 순한 모습으로 보이려고 노력했다. 핫토리상의 태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이미 그녀의 눈시울이 조금 충혈되는 게 보였다. 다른 일본 부하들을 다루는 것과 한국에서 온 나를 대하는 것이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일본어도 잘 못하는 나는 못하는 일어로 아닌 건 아니라고 그때그때 반박한다. 나도 버겁긴 하다. 하고 싶은 표현이 잘 안 나오고 유려한 문장으로 구사되지 못하기 때문에.
핫토리상이 말했다. 이 부장도 마지메(진심,진지)고 나도 마지메한(이 대목에서 살짝 웃음) 사람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리는 둘 다 회사를 더 위하는 길이 뭔지 고민하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부딪히는 게 실은 좋은 거라고 했다. 격앙된 감정이 사그라진 터라 핫토리상의 진심이 느껴졌다. 실은 핫토리상한테 일로서도 일본에서의 생활을 위해서도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고백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 알아달라고도 했다.
그녀는 살짝 충혈된 눈으로 고맙다고 말하면서 옆 사무실로 이동했다.
오늘은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