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에게
아마 십 년 넘었을 거야.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 타고 어딜 가 보는 게.
오늘 날씨 좀 매섭더라. 제일 두꺼운 옷 입고 나왔어. 터미널에 도착해서 대전 가는 표를 끊으니까 3시 25분 출발이었어. 20분 정도 시간이 남았길래 구내 식당에서 제육덮밥을 시켜 늦은 점심으로 먹었어.
비계 부분을 숟가락으로 짓이겨 먹고 있는데 앞테이블의 두 남자가 심각해 보이는 대화를 나누고 있더라. 자형과 처남 관계였는데 자형이 뭔가에 대해 처남에게 훈계조로 말하고 있었어. "넌 왜 그러냐?", "그건 이렇게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와 같은 식의 말투였어.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는데 처남은 가만히 자형의 말을 듣고 있었지. 내가 식사를 마칠 무렵이 돼서야 묵묵히 듣기만 하던 처남이 입을 열었어.
처남은 자형에게 지난 사례들을 하나씩 상기시키며 자못 이성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어. 이번엔 반대로 자형쪽이 처남이 하는 말을 들었지. 자형의 비교적 감정적인 책망 어투와는 달랐어. 손아래로 보이는 처남이 오히려 더 무게가 느껴지는 거 있지.
말을 마친 처남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가 둘이 먹은 식대를 계산했어. 자형은 처남이 식대를 지불하는 동안 물 한 잔을 먹고 입가를 일회용 냅킨으로 훔쳤어.
내 왼편 테이블에는 긴 머리의 아가씨가 먼저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어. 흘끗 옆모습을 쳐다 보았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밥을 먹더라. 객관적으로는 이쁘장하고 앳된 얼굴이었는데 찡그린 모습이라 호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더라. 주인 할머니한테 반찬을 더 달라고 말할 때 그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걸 알았어. 어디로 가는 걸까.
주방에서 일하시던 덩치가 좀 큰 아주머니 한 분이 홀 가장자리로 나와 앉았어. 이미 바쁜 시간이 지나서 한 숨 돌릴 수 있었으니 쉬러 나오셨나 봐. 아주머니가 주인 할머니한테 자꾸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고 말했어.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그럴 때는 이렇게 다리를 주물러 줘야 한다고 자세를 취하며 알려 주었어. 식당에서 하루종일 서서 일하시니 다리가 아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생각했어. 나도 요새 왼쪽 발바닥이 멍든 것처럼 아플 때가 많아서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는 주방 아주머니의 말이 귀에 더 들어오더라.
우등버스를 예매했는데 대전까지 가는 버스에 내가 마지막 좌석이었어. 주말이라 이리 사람이 많은 거겠지.
아무튼 버스를 타고 지방에 내려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마음을 들뜨게 했어. 예전부터 나 아무 노선버스나 잡아 타고 잘 모르는 길 다니는 거 좋아했잖아. 중국에 갔을 때도 가끔 그러고 다녔어. 차 운전할 기회가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버스를 타면 일단 창밖 구경을 할 수 있잖아. 차가 지날 때마다 풍경이 바뀌고 그 풍경 속의 사람들을 쳐다 봐. 아는 거리를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왕이면 잘 다녀 보지 않은 거리를 지나는 게 좋았어. 버스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탈 때도 있고 그냥 내키는 버스를 타기도 했어. 노선을 안 보고 그냥 타다가 불과 몇 정거장 뒤에서 종점이라 내린 적도 몇 번 있어. 그럴 땐 버스 요금이 좀 아깝더라. 히히.
제이.
중년을 살고 있구나. 우리가 벌써. 여자들은 잘 모르겠는데 남자들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생각하는 거나 말하는 게 크게 안 바뀌는 것 같아. 직장에서 사람들 눈이 있어 폼 잡고 말하고 행동하는 건 있지만 사석에서 편하게 만나 보면 그 사람 안의 아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느껴.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너도 똑같아. 나이가 들고 몸이 커지고 늙어가지만 내 속의 아이는 늘 그 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며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세상을 바라 보고 있어.
빨리 다시 널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구나. 오늘 첫눈이 왔어. 잠깐이지만 함박눈처럼 내리더라. 눈이 내리는데 회색빛의 세상이 느껴져서 조금 다운되는 기분이었어. 이럴 때 너와 따뜻한 차 한 잔을 하거나 맛있는 저녁을 같이 먹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어.
어제도 성당에 가질 못했어. 게을러지고 무뎌졌어. 근데 기도는 했어. 조만간 다시 성당에 갈 거야. 미사 참례를 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아버지도 내가 돌아갈 거라는 걸 알고 계실 거야.
항상 널 생각하고 있어. 네가 건강하기를, 네가 평안하기를, 네가 삶의 진한 기쁨을 이따금 맛보며 살기를 바라며 지내. 나도 그렇게 지낼 테니까.
곧 목소리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