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시월 말, 큐슈섬 미야자키현]
오직 그 에메랄드물빛만을 기억하며 행선지를 정했다. 큐슈에 살면서 꼭 가고 싶었지만 떠날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야 인연이 닿았다.
날씨가 맑기를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만큼 더 적을 것이기에 북적이지 않는 타카치호를 기대할 수 있었다.
내가 사는 키타큐슈시로부터 약 240km 떨어진 것으로 나오는 타카치호 계곡까지 가는 길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차로 대략 3시간 반 정도면 도착하리라 생각했지만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하며 반 시간 정도 쉬었다 가니 거의 네 시간 반을 넘겼던 것 같다.
방이 있어도 "만세키데쓰(만석입니다)!"
숙소 예약을 하지 않고 갔다. 조금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가 추적추적 나리며 어둑해진 타카치호 협곡 인근에서 빈 방을 찾을 수 없었다. 작은 여인숙이든 좀 규모가 있는 호텔이든 이방인에게 줄 방이 없다며 '만세키(만석)'라 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 호텔 예약 사이트로 방을 찾아 보았다. 방금 방이 없다며 나를 돌려 보냈던 호텔에 방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주저하지 않고 그 방을 예약했다. 발길을 돌려 호텔 로비로 다가가 다소 당당함이 묻어 나오는 자세로 체크인하러 왔노라 전했다. 혹시 언제 예약을 했냐고 묻길래 15분 전 쯤 웹상에서 했다고 답했다. 접객을 하고 있던 호텔 담당자와 그 옆의 매니저가 서로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상사로 보이는 사람이 뒷편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긴 호흡을 해야 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프런트로 돌아왔다.
방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예약한 스탠다드룸이 다 나가서 좀 더 큰 방으로 업그레이드해 주겠다고 말했다. 많은 숙소들이 당일 밤늦게까지 나가지 않은 방이 있어도 예약 사이트 회사나 관광업체와 이야기된 방은 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호텔 오너라면 이런 식으로 손님을 놓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첩첩산중에 상어가 나타났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중의 숙소에서 고요히 하룻밤을 보내고 드디어 타카치호 협곡으로 향했다. 차를 가지고 왔지만 계곡으로 가는 길을 모두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 걸어 내려가기로 했다.
험한 산줄기를 깎아 만든 도로들이 그러하듯 숙소에서 깊은 협곡으로 내려가는 도로도 무척이나 구불구불했다. 흡사 지렁이가 몸을 좌우로 트는 모습과 같았다.
빗물로 유량이 많아져 타카치호 협곡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포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니는 곳마다 담고 싶은 풍경들이 나타났는데 우산을 쓴 채 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칠 때는 한 손으로 잡았던 우산이 몸둥이까지 흔들어 댔다.
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일본식 연못과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못 주위로 거닐 때 보니 세찬 계곡의 바람이 나뭇잎들을 눈송이처럼 날리고 있었다.
야트막한 물 아래로 잉어들이 산책하고 있었고 아기 오리들도 줄을 맞춰 기차놀이를 하고 있었다. 눈아래로 갑자기 시커멓고 제법 덩치가 커다란 녀석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한번에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나는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물고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때 본 것이 혹시 상어가 아닐까 짐작만 했다. 여하튼 이런 정원의 연못에서 발견할 거라 상상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일행 없이 혼자였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방향을 잡았다. 좋은 걸 보고 바로 나눌 사람은 없었지만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오거나 걸음을 멈추고 싶으면 그 자리에 바로 서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협곡의 절경이 청록빛 물빛으로 절정에 닿기를 바랐다. 이곳에 오기 전 둘러 보았던 블로그의 사진들 대부분이 계곡 아래로 흐르는 에메랄드빛을 담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기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틀 연속 내리는 비로 상상했던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풍경과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금광을 찾은 노다지꾼의 마음에 비유해도 좋을 것 같았다. 눈앞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아름다운 자연의 자태와 달디 단 산중의 촉촉하고 맑은 공기 그리고 귓가를 시원하게 울리는 협곡의 물소리. 마음이 퍽 흡족했고 자유를 느끼기에 족했다.
산속에서 마주하는 미래
한참을 걷다가 산속으로 들어섰다. 협곡 근처에서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으나 물을 조금 떠나 숲길로 들어서자 인적이 끊어졌다.
빗줄기는 약해졌으나 바람은 계속 세차게 불어댔다. 산중 숲길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갖 나무와 풀잎들이 바람의 악기가 되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솨아~솨아~
스스스~~스스스~~
휘잉~~위이이잉~
수우~~~~수우우~~~
낙엽들이 날리고 쌓이는 수풀 오르막길에 서서 오감을 열었다. 입을 조금 크게 열고 심호흡을 했다.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그때 왠지 나의 미래를 생각했다. 익숙했던 생활을 떠나 다시 감각을 찾아가야 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에 부딪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껏 산소를 들이마시고 협곡의 푸른 숲과 교감하고 있는 그 순간의 나는 무척 대범하고 당당해 보였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변화를 선택한 이후 나는 하루하루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미지의 순간을 스스로 맞이한 나는 조금 달랐다.
비상 상황 발발
타카치호 협곡 근처에 타카치호 중학교가 있었다. 주말이라 수업이 없었을 텐데 일단의 여학생들이 하얀색과 파란색의 체육복을 입고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키타큐슈의 동네에서 만나는 일본의 학생들도 참 순진하고 순수해 보였지만 이런 산골에서 만나는 어린 소녀들은 더했다.
가벼운 비바람이 잦아들 줄 모르고 산중을 적시고 있었다. 아침부터 몇 시간을 오르락 내리락 걸어다니던 나는 갑자기 복부로부터 강한 기운을 감지했다. 순간 매우 위험한 신호임을 직감했다.
분명히 아침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비를 맞고 찬 바람을 쐬며 몇 시간을 돌아다닌 탓인지 아랫배가 싸르르하며 에너지 수위가 높아졌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빨리 교실 근처로 뛰어가 화장실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저 순수하고 여린 학생들에게 어찌 이런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겠는가.
교실과 반대 방향에 있는 건물로 아랫배에 영향을 최대한 덜 가게 하며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다 쓰러져간다고 말해도 좋을 단층 건물은 과학실험실 혹은 특활 교실처럼 보였다. 문을 열어 보고자 했으나 자물쇠로 굳게 닫힌 채였다.
깊이 낙심한 채 다시 서둘러 운동장 계단을 내려간 나는 야구장 옆의 창고처럼 보이는 곳으로 갔다. 구조로 보아 화장실이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절박한 마음으로 입구를 찾았다. 거기에서도 그 순간 가장 원하는 장소를 찾지 못한 나는 그만 생리 현상의 절정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영겁과 같은 시간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흘러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학교와 학생들이게 조금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비상 상황은 비교적 훌륭하게 종료되었다.
잠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학교 뒷편의 병풍과도 같은 산세가 보이기 시작했고 타카치호 협곡을 이루는 아름다운 풍광이 다시 컬러로 바뀌었다.
아, 이곳에 오기를 참 잘 했다. 다음에 다시 오면 꼭 청록으로 빛나는 타카치호 협곡의 물 위에서 배를 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