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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Dec 17. 2017

몰랐던 길이 열린다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길에 들어서며

 지난 반년은 인생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들로 가득 채워진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건들은 제 진로에 관한 일이기도 했고 가족관계와 얽힌 문제이기도 했으며 지인들의 신상에 대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고국에서의 모든 걸 뒤로 하고 일본땅에 들어갔을 때는 십 년 혹은 이십 년 혹은 거의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불과 4년 만에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생활환경과 근무 조건이 비교적 만족스러웠던 나는 이 시간이 계속될 줄로 믿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그 삶에 적응하고 마침내 무방비 상태에 빠진 순간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일도 아니었고 돈도 아니었습니다. 역시 보금자리를 떠나게 만드는 가장 위력적인 영향은 사람과의 관계였습니다. 반대로 소중한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위력적인 힘도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자리에 남기 위해 상당히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애를 써도 결국 마음이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잡고 있던 끈을 놓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길로 들어서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새로운 길은 막혀 버렸고 나는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자리를 빨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감이나 긍정적인 생각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보다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장기 레이스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겁이 났습니다. 마치 제가 낙오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이 두려움과 부담을 떨쳐 버리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여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를 잘 알아주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조직의 규율과 문화 속에 갇혀 실행하지 못했던 장거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평생직장에 매어 숨 가쁘게 살아왔던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멀리 있어 만나고 싶어도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친구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기대를 안고 떠난 여행길은 피부로 와 닿는 감각과 기대하지 못한 기쁨과 깨달음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새롭고 이국적인 자연환경과 문화의 샤워를 하며 갑자기 나의 세계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걸 느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조급히 눈앞을 걱정만 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인지하던 방식과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유가 솟아났습니다. 의연함을 보탤 수 있었습니다.


 가족을 비롯해 나를 아는 지인들과 나의 상황을 공유했습니다. 감추지 않고 내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내가 겪고 있는 갈등과 문제를 말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공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과 그들이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외롭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에서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확신했고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힘들게 느껴지는 이 사건들이 운 나쁜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런 일들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내가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진로를 제시해 주기도 했고 실질적으로 그 길로 이끌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하는 시야는 매우 넓어졌고 혼자서는 생각하지 못할 놀라운 길이 내게 열릴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을 지난 반년 동안 겪으면서 거기에 신의 섭리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쓰나미에 휩쓸려 벼랑 끝으로 허우적대며 밀려나던 나는 마침내 아득한 폭포수 밑으로 떨어져 가라앉기 직전이었습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떨어질 것만 같던 그 순간. 벼랑인 줄 알았던 그 지점이, 막상 쓰나미에 밀려 다다르자 높은 산봉우리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길들이 있었습니다. 쓰나미는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산 정상에 서서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내일 나는 그 여러 갈래길 가운데 하나를 시작합니다. 이 길은 불과 한 달 반 전까지만 해도 전혀 나와 상관없는 길이었습니다. 우연처럼 발견한 이 길은 어쩌면 절대자가 예비한 길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몰랐던 길이 열립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 누군가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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