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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Dec 16. 2017

겨울에 변기가 막히면

 운 나쁘게도 최근 생리 현상과 관련해 해프닝이 또 생겼다. 새로 이사온 집이 조금 오래 되긴 했으나 두 달 간 별 탈 없이 나름 만족하며 지냈다.


 일본에서의 전출 신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을 마친 후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열흘 이상 비운 집은 냉기가 가득했다. 난방기를 가동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에 온기가 느껴졌고 아랫배로부터 살살 신호가 왔다. 화장실로 들어가 제법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는데 뭔가 모르게 물을 내리는 레버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타원형의 변기 속으로 밀물처럼 쏴아하고 물이 내려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끌고 사라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변기 속의 파도는 힘이 모자랐고 투명하고 깨끗한 결과를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변기통에 물이 가득 찬 것을 확인한 후 다시 한 번 레버를 힘껏 내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깔끔하게 처리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무색해지도록 변기에 찌꺼기들이 둥둥 뜬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어~~ 어~~~ 안 돼!! 더 이상 올라오지 마~~"


 다행히 물은 넘치지 않았다. 약 5cm 높이를 남겨둔 채 멈췄다. 최악의 사태는 면한 것이다. 물이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는 기구 같은 걸 쓰기 어려웠으므로 물 수위가 낮아지기를 기다렸다. 꽤나 심하게 막혔는지 물은 매우 더디게 내려갔다. 여행의 피로가 쌓이고 갑자기 추운 곳으로 와서인지 아니면 변기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눕고 싶어졌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 한 시간 정도만 자고 일어나려 했는데 알람을 끄고 한 시간을 더 자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그 사이에 변기의 수위는 많이 내려가 있었고 약속 장소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레버를 힘껏 눌러 내렸다.


 조심스런 희망으로 변기의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더러운 물의 거센 반격으로 매우 놀랐고 궁지에 몰린 처지가 되었다. 건더기가 가득한 물이 아까보다 더 높은 수위까지 차 올랐던 것이다. 속으로 애타게 '제발! 제에~~발! 넘치지만 말아라!' 하고 외쳤다.


 정말 운 좋게도(?) 물은 변기 상단 끄트머리를 코앞에 두고 찰랑찰랑 멈추어 주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가지는 동안에는 변기 사건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11시 반 쯤 되어 귀가하니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덮어 놓은 변기 뚜껑을 살포시 열어 보았다.


" 오! 좋아! "


 물 수위가 저만치 아래로 내려가 있었던 거다. 그 상태에서 간이 펌프기를 집어 들었다. 이사온 집에 남아 있던 유일한 전 세입자의 물건이었다. 고무 패킹 부분을 변기 구멍에 맞추고 위에서 힘차게 몇 번을 눌러 주었다. 공기가 빠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무언가 변화가 생기는 듯했다. 틀림없이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믿고 변기 레버를 다시 내렸다.


 안타깝게도 그 더러운 물이 다시 타원형을 그리며 변기를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간이 펌프기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어 볼 때, 철로 된 기다란 스프링이 달린 꼬챙이 같은 기구가 필요했다. 그걸로 변기 안을 깊숙하게 쑤시면 배관 속에 막혔던 이물질을 이동시킬 수 있을 터였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집 앞 수퍼에 가서 가정용품 코너를 유심히 살폈다. 세면기나 욕조의 하수구 배관을 뚫어 주는 화학약품이 있었고 머리카락 같은 걸 제거해 주는 플라스틱 꼬챙이도 보였다. 그러나 막힌 변기를 뚫어 줄 적임자인 기다란 철 꼬챙이는 찾을 수 없었다.


 아쉽지만 뚫어펑 액체와 플라스틱 꼬챙이를 샀고 간 김에 싱크대와 욕조 세제도 집었다. 이제 세탁도 해야 하니 세탁물을 널 건조대도 계산했다. 아침에 먹을 사과와 바나나도 샀고 오랜만에 보는 추억의 음료 카프리썬도 두 개 집어 들고 돌아왔다.


 이 모든 아기자기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벽 2시에 잠이 들기 전까지 우리집 변기는 원래 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막힌 변기는 지속적으로 내 심리 상태에 영향을 주었나 보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히며 자는 동안에도 변기를 생각했다. 정확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꿈에서도 변기 벽을 타고 차 오르는 똥물의 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아침이 되었다. 간밤에 사 온 사과와 바나나로 아침을 대신하고 오늘 아침만 아파트 근처 상가의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도저히 저 지경이 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목적지는 집에서 약 5분 떨어진 작은 영화관의 화장실이었다. 다른 상가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 있을 거라 믿었고 무엇보다 영화관 안이라면 일반 상가의 화장실보다 따뜻하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급히 옷을 갈아 입고 문을 나서는데 배설 욕구는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수록 더 간절해졌다.


 가까스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나는 5분 떨어진 영화관까지 갈 여유가 전혀 없었다. 바로 집앞에 있는 상가 건물로 난입했다. 보이는 입구로 들어서 지하1층으로 내려갔더니 통로 끝에 화장실이 보였다. 지나치는 상가에서 누군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른 아침에 외부인이 웬일일까 의심을 사지 않도록 - 그러니까 급한 일 때문에 화장실로 돌진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 침착하게 그러나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했다.


 드디어 화장실 입구에 들어섰다.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기대하지 못한 선풍기형 난방기가 동파 방지를 위해 설치되어 있어서 공기도 그리 춥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좌변기가 설치된 문을 열었다.


 아!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고 나는 급히 몸을 돌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두세 칸씩 디디며 올라갔다. 1층 상가의 수퍼로 들어가 상점 주인한테 물었다.


" 휴대용 티슈 있나요? "


 휴지를 낚아채 듯 집어서 다시 지하1층 화장실로 폭풍처럼 내달려 돌아왔다. 위험할 뻔했지만 다행히 집 근처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화장실에 들어와 볼일을 보는 동안 옆자리에도 누군가 들어왔다. 그가 먼저 화장실을 나가길 기다린 후 볼일을 마친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갔다. 이미 떠났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그제서야 막 화장실 출입구를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남자가 아니었다!


 급히 남자 소변기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그곳엔 소변기가 없었고 좌변기가 설치된 세 개의 칸막이 화장실만 있을 뿐이었다.


 순간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인 채 현장을 빠져 나왔다. 다행히 그때 화장실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 입구에서 숙녀를 한 사람이라도 만났더라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아무튼 그렇게 다소 황당한 에피소드를 겪고 추운 겨울날 막힌 변기로 수세에 몰렸지만 위기를 잘 극복한 편이었다. 집에 돌아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동네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물점을 검색하니 금세 몇 군데가 나왔다. 철물점 안에는 딱 한 개 남은 무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십 년 전 쯤 조우한 적이 있는 철 스프링 꼬챙이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집어 올렸다.


 ' 이제 다 죽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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