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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Nov 04. 2018

마카오 가는 길

배로 갈까? 차로 갈까? Macau

 토요일이다. 좀 쉬고 싶지만 행사 준비로 떠나야 한다. 그래도 늦잠은 잘 수 있었다. 마카오 가는 배가 오후 3시 조금 넘어 출발하기 때문에.


 아점은 사과 한 개와 자두 하나 그리고 믹스너트 스무 개 쯤. 꼭 먹어야 한다. 그래야 화장실에서 중요한 일정을 치를 수 있고 하루를 순조롭게 보낼 수 있으니까.


 옷을 편하게 입고 싶었지만 학부모와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수학과 영어 시험장이라 세미정장으로 했다. 홍콩에 와서 처음 접하는 큰 규모의 행사인데 홍콩이 아니라 마카오에서 경험하게 됐다.


 마카오로 가는 새로운 길, 강주아오대교(钢珠奥大桥)가 개통되었지만 이번엔 그냥 페리로 간다. 홍콩 동료들은 주말에 이 새로운 길을 이용하다가는 언제 마카오에 닿을지 장담하기 어려울 거라 말했다. 홍콩 터미널에서 마카오 터미널까지  총 42km이고 해저터널만 6,225m에 달한다. 아직은 초기라 바다 위로 또 아래로 펼쳐진 이 신기한 다리를 경험해 보고픈 사람들이 무척 많다.

 

강주아오대교
출처 동아일보 글로벌 포커스

 약속 시간은 2시 45분이지만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일찍 도착해서 차 한 잔 하며 책도 좀 읽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집 바로 아래에서 마카오 터미널로 가는 720번 버스가 있어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는 기점이라 아무도 없는 2층버스에 첫 승객으로 오른다. 재빨리 2층 맨 앞칸에 운전석과 반대쪽인 왼편 끝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홍콩 시내를 구경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을 토요일 아침의 가벼움을 품고 달렸다.


  셩완 지하철역 인근의 마카오로 가는 페리에 도착했다. 시각은 1시 50분. 한 시간의 여유가 있다. 터미널 안은 주말답게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래도 조금 한적한 곳이 있을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며 자리를 살폈다. 가장 사람들이 많은 맥도널드층을 지나 한 층 더 오르면 배를 타기 위한 입구가 나온다. 거기서 더 위를 올려다 보니 커피 전문점 하나가 보였다. 확실히 그곳엔 사람이 적었고, 메뉴에서 롱 블랙으로 커피를 주문한 뒤 널찍한 테이블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씁쓸한 롱 블랙의 매력


 롱 블랙의 맛은 더 씁쓸하고 강하다. 지난  초겨울 시드니의 아는 동생을 찾아 여행을 갔을 때 처음 롱 블랙을 접했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아메리카노를 롱 블랙이라 한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실은 두 커피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샷에 뜨거운 물을 넣어 만드는 반면에 롱 블랙은 뜨거운 물 위에 보통 에스프레소 샷 두 잔을 더해 만든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조삼모사와도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결과적으로 맛과 형상에서도 차이를 낸다고. 롱 블랙의 크레마를 살리려면 반드시 위와 같이 순서를 지켜야 한다. 크레마는 원두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때 생기는 거품이다.


 씁슬하나 왠지 그 향과 풍미에 끌리게 하는 롱 블랙을 혀로 코끝으로 음미하며 사노 요코의 에세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의 책장을 넘겼다. 소제목은 '생생한 빨간 토슈즈'.


 그것은 영화 <분홍신>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던 신문지가 서서히 변하여, 너덜너덜한 투투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춤을 추는 발레리나로 변신해 가는 환상의 장면을 떠올리게 했고, 그것이 다시 초등학교 6학년 때 도쿄에서 전학 온 여자아이를 떠오르게 했다.
 그 아이는 전학 이틀째에 있었던 자신의 환영회에서 '스스로 희망해서' 하얀 투투(발레리나가 입는 짧고 퍼지는 스커트)에 새빨간 토슈즈를 신고 교단 위로 올라가 춤을 췄다.
(중략)
 그 아이는 그 뒤로 계속 여왕이었다. 졸업 소풍 때 그 아이는 하마마쓰 역 앞 광장에서 참으로 유창한 도쿄 사투리로 나에게 선언했다.
"너는 말괄량이에다가 성격도 밝지만, 진짜로 그런 건 아니야. 진짜로 밝은 사람은 잠자코 있을 때에도 밝아. 하지만 너는, 조용히 있으면 나까지 쓸쓸해져."
 그것이 나에 대한 비난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속에서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달콤하게 취해 왔다. 그리고 영원한 상처로 남았다.


 몸이 피곤한 평일 밤에는 글쓰기 의욕이 반감될 때가 많다. 그러나 잠을 푹 자고 난 날 이런 호젓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노라면 마음 속에서 무언가를 끄적여 보라는 강한 욕망이 새어나온다. 게다가 이렇게 감성을 자극하는 문장을 어떤 강박도 없이 자유의지로 읽어내려갈 때는 더더욱 나만의 글을 쓰고 싶어지곤 하는 것이다.


홍콩 페리에서 출발
마카오 페리 도착

 다음날 수학과 영어 시험이 치러질 학교에 도착했다. 푸이징 학교. 유치원부터 세컨더리스쿨(중고등학교)까지 함께 운영되는 커다란 사립학교 그룹이다.


 우리 일행은 입구에 입체 현수막을 설치하고 포스터를 붙이고 입간판을 세웠다. 또 시험장으로 쓰일 교실마다 고사장 안내번호를 붙이고 안에  들어가 수험생 수에 맞춰 책걸상을 재배열하고 난 뒤, 책상에 수험번호 스티커를 부착했다. 복도에는 화장실 방향 표지판을 달았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실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기억이 가물가물한 시점에서 낯선 마카오의 한 초등학교 교실을 둘러본다. 급훈도 있고, 아이들이 해온 숙제도 전시되어 있다. 한자와 영어가 섞여 있는 교실 분위기가 사뭇 이색적이다.

 

마카오 푸이징 사립학교, 유치원과 초중고교가 다 있다
급훈
중학교 부속 운동장


 홍콩의 동료들이 부지런히 매우 주도적으로 움직이며 완벽하게 준비를 끝냈다. 홍콩 사람들을, 칠팔년 전 광저우에서 일할 때 철강과 비철 거래처로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함께 일하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세 달 정도 홍콩에서 생활하고 일하며 그들을 지켜 본 바로는, 홍콩 사람들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생각보다 여가 시간을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야근을 자주 한다는 것이 꼭 일을 열심히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지만, 이 사람들 정말 의외로 노동 시간이 길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6시 퇴근 시간을 넘기고 7시, 8시, 9시... 월말엔 마감한다며 10시, 11시를 넘기며 일하는 경우가 제법 되는 걸 목격했다. 영국 통치하에서 오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으로 막연히 출퇴근을 칼같이 지킬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해였나 보다. 물론 맡은 업무 특성과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야근과 휴가 사용 패턴은 많이 다른 면도 발견할 수 있다.


 주말을 반납하고 다음날 있을 수백명의 마카오 아이들을 위한 수학과 영어 테스트 준비를 마친 우리는 드디어 저녁을 먹으러 발길을 옮겼다.


  마카오도 오래 전 출장으로 가끔 다니곤 했지만 여유 있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즐긴 여행이 아니라 그리 인상에 남는 좋은 추억이 많지 않다. 그런데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서 다시 직장을 옮겨 홍콩까지 오게 된 이후 오랜만에 다시 찾은 마카오의 야경을 마주하자 잠들어 있던 지난날의 편린들이 주섬주섬 머릿속에 떠오르며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마카오 주교좌 성당 앞에 다다랐을 때 '지잉지잉' 하는 느낌이 가슴을 타고 흘렀다. 아무런 생각없이 처음 온 곳인가 싶었던 그곳에서, 정신없이 출장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과 환경에 뜨겁게 적응해가던 10년 전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곳의 건물과 거리에서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는 잊고 있던 과거의 나뿐 아니라 그당시 함께 일하던 동료들까지 순식간에 소환해 냈고, 조금 더 젊었을 적의 내가 어떤 마음과 감정을 품고 살았는지 상기시켜 주었다.


 아마 혼자였다면 그런 상념에 더 흠뻑 젖어들었을지 모르겠다. 동료들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고 나 역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뒤로 넘기며 과거의 나와 다시 헤어졌다. 언젠가 홀로 그 거리를 다시 찾게 될 기회가 있다면 좀 더 느긋하게 10년 전의 나와 뜨거운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가끔은 그렇게 나와 마주하고 싶어진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위로도 좀 받고 싶고 자랑도 좀 하고 싶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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