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에 대한 치명적인 우리의 태도
*아내 커스틴: '지자체 사업의 조달 방법'이라는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전문 직장인, 현재 직장에서 한 부서의 관리자로 일하며 남편보다 높은 보수를 받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했다. 라비가 커스틴과 사랑에 빠진 이유는 그녀의 침착함, 다 잘될 거라는 믿음, 적은 피해 의식, 운명론의 부재다. 그녀는 햇빛과 희망을 원하고, 열정과 감정을 표출하면서 온몸으로 부딪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남편 라비: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공간 구축'이라는 논문을 쓰고 있다. 레바논인 토목 기사 아버지와 독일인 항공기 승무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베이루트, 아테네, 바르셀로나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랍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 긴 다리를 꼬고 앉고,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손은 그녀를 위해 마크두스, 타불레, 카르토페살라트 (중동 요리: 각각 절인 가지와 올리브유를 섞은 요리, 야채샐러드, 감자 샐러드)를 요리할 줄 안다.
정통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자 커스틴과 레바논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며 자란 남자 라비가 사랑에 빠졌고 소위 결혼이라는 관문을 거쳐 함께 살게 된다.
새 아파트로 이사하고 몇 주가 지난 후 토요일 아침, 라비와 커스틴은 유리잔 몇 개를 구입하기 위해 교외에 있는 이케아 매장으로 간다. 커스틴은 '밑으로 좁아지고 파란색과 자주색 소용돌이무늬가 있는 작은 텀블러'를 골라 즉시 집에 가면 되겠다고 정한다. 그녀의 남편이 가장 감탄하는 그녀의 특성은 결단력이다. 하지만 곧 라비의 눈에는 고디스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더 크고 장식이 없고 옆면이 직선으로 떨어지는 유리컵이 실제로 그들의 식탁에 어울릴 유일한 제품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일단 집에 갖고 가서 포장을 풀고 접시 옆에 놓으면, 당신도 이게 마음에 들 거야. 틀림없어. 이게 딱 더 낫잖아." 커스틴이 말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하지만 이게 더 깔끔하고 새로워 보일 것 같단 생각이 자꾸 드네." 라비가 말한다. 라비는 어떤 물건이든 장식이 과하면 부담스럽다.
"아무튼 여기 서서 하루 종일 의논만 할 수 없어. " 커스틴은 점퍼의 소매를 손 아래까지 끌어내리고는 이렇게 판단을 내린다.
"물론이지." 라비도 동의한다.
"그러니까 파불뢰스로 정하고 그만 끝내자' 커스틴이 사납게 말한다.
"계속 반대하면 정신 나간 거 같겠지만, 난 진심으로 저건 형편없는 선택이 될 거라고 봐." 라비가 말한다.
"저기, 내 직감은 달라." 커스틴이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야." 라비가 응수한다.
그들은 진중한 사람들이다. (중략) 그럼에도 별것 아닌 일들이 두 사람 사이에 계속해서 놀랍도록 자주 끼어든다. 예를 들어, 잠잘 때 가장 적합한 온도는 몇 도인가? 커스틴은 다음 날 머리를 맑게 유지하고 활동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밤에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침실 공기가 탁하고 답답한 것보다는 차라리 다소 추운 쪽을 더 좋아한다. 창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하지만 라비가 어린 시절 베이루트에서 겪은 겨울은 혹독했고, 기습적인 돌풍은 언제나 큰 문제였다. 그는 블라인드를 치고 커튼을 빈틈없이 여미고 유리창 안쪽에 습기가 차야 왠지 안전하고 포근하고 호사스럽다고 느낀다.
다른 쟁점을 살펴보면, 평일 저녁 밖에서 식사를 하려면 몇 시에 나서야 할까? 커스틴은 이렇게 생각한다. 예약은 8시이고 오레가노까지는 5킬로미터 정도라 금방 가지만, 큰 로터리가 꽉 막혀 있으면 어떻게 하나? 어쨌든 조금 일찍 도착한다고 문제가 되진 않는다. 식당 옆 바에서 한잔할 수도 있고 공원에서 산책을 할 수도 있다. 서로 밀린 이야기도 많다. 택시를 7시까지 오라고 하는 게 좋겠다. 반면에 라비는 이렇게 생각한다. 8시 예약이면 8시 15분이나 8시 20분에 도착해도 된다는 걸 의미한다. 퇴근하기 전에 장문의 이메일을 다섯 건 처리해야 하는데, 업무가 신경 쓰이면 친구들을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가 없다. 어쨌든 약속 시간쯤이면 정체는 풀릴 테고 택시는 항상 일찍 온다. 8시까지 오라고 예약하는 게 좋겠다.
서양인이 쓴 남녀 관계에 대한 글이 이토록 찰지게 공감을 자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 시대의 위대한 글쟁이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연애와 결혼 생활에 대해 매우 사실적인 스토리를 "캬!"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멋지게 풀어나간다. 마치 '어떤 진실'이라는 사람을 위해 몸에 꼭 맞으며 기발하게 멋진 코디를 연속적으로 성공시키는 느낌으로 문장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정말 잘 지내다가도 종국에는 엄청난 다툼으로 번졌던 거의 모든 갈등의 출발점들이 커스틴과 라비 부부와 너무 닮아 있는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누가 버릴 것인가?
딸이 어릴 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집안은 마치 폭탄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지 알기에 집안이 엉망이 되는 걸 대체로 이해했다. 청소가 잘 되어 있는 깨끗하고 정돈된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지만, 어린 아기가 있는 집은 이런 바람이 사치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음식물 쓰레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집에 음식물 쓰레기가 싱크대에 가득하고 집안 어딘가에 처치되지 않은 채 썩고 있는 게 보이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고 때때로 화도 났던 것 같다.
" 아, 그래도 어제 먹었던 이건 좀 갖다 버리고 오지 그랬어? " 퇴근 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악취를 풍기는 음식물 쓰레기를 발견하고 한 마디 한다.
" 시간이 없었어. 하루 종일 아이랑 지내는데 정신이 없어." 바로 기분이 상해 아내가 방어하며 말한다.
" 흠.. 한 번 버리고 오면 될 일인데... " 약간 톤을 낮췄지만 한 마디 더 보탠다.
" 그럼 당신이 갖다 버리면 되잖아. 눈에 보이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처리하면 되잖아! " 원망과 힐난의 눈빛으로 아내가 되받아친다.
지금은 전혀 다른 생각이지만, 당시의 나는 아내의 그 반응이 너무 신경질적이라 생각했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그렇게 나오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아기랑도 잘 놀아주려 노력하는 남편에게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하며 서운한 생각이 들곤 했다.
우리는 서로 상대적으로 큰 일에 대해서는 대범한 편이었다. 집을 구하는 문제, 혼수,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결정, 경제권, 부모님 용돈이나 때때로 준비하는 선물 등등.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매우 너그러웠다. 딱히 고집을 피우지 않고 서로가 더 원하는 방향으로 맞춰 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보니 우리뿐 아니라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집안일이나 육아 문제에 비해 다들 너그러운 편이었다. 큰 건 양보하면서 설거지를 누가 할지, 쓰레기를 누가 버릴지, 욕실 청소며 진공청소기 돌리는 건 누가, 빨래는 누가 할지에 대해서는 다소 예민하게 굴었다. 사실 돌아보니 이런 일들이 정말 큰 일이었고 우리 삶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 운동을 너무 좋아하는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농구하러 가는 게 너무 눈치 보였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 하루를 기다리며 살았지만, 아내는 아기가 좀 더 클 때까지 퇴근 후나 주말에 함께 아기를 봐 주길 간절히 바랐다. 우리의 구원자는 당시 장모님이셨는데, 장모님이 오시는 날엔 아내도 마음이 많이 부드러워져서 운동하러 가라고 풀어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젠 그 모든 게 다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의 화석이 되어버렸다. 그 아기는 훌쩍 커서 사춘기 소녀가 되었고, 피아노에 바이올린에 영어/수학 등 각종 과외 수업, 학교 과제와 시험 공부,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쉬는 시간엔 웹툰에 심취하고 또래의 친구들을 찾는... 회사 CEO보다 더 바쁘고 촘촘한 스케줄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저자가 소설 속에서 던진 다음 문장들을 이제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좀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케케묵었으나 서글픈 감정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 (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욕실 관리를 두고 꼬박 이틀간 정상회담을 하는 건 너무 유별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집에서 몇 시에 출발해야 하는지를 정하기 위해 전문 중재인을 고용하는 건 분명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