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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May 16. 2019

문정동에서 방이동까지 산책

 초미세먼지가 '나쁨'이라 나온 걸 보며 집 밖으로 나섰다. 종일 집에 머물렀고 저녁 끼니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목이 또 컬컬해질까 했으나 해진 거리는 한낮의 뜨거움을 보낸 후 서늘하고 그럭저럭 숨 쉴 만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동부지방법원을 지나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걸어갔다. 중학교 때 이곳에 들른 기억이 있다. 친척이 이 아파트에 잠시 살았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서울 올림픽 직후의 이 지역은 갓 지어진 최신식 아파트였고 당시 느낌으로는 상당히 커다란 단지의 위용을 뽐냈었다. 그러나 동부지방법원과 가든파이브를 중심으로 최근 새로 조성된 사무실과 오피스텔 및 주거지역과 인접한 올림픽선수촌 단지는 쇠락하고 낡은 분위기를 저녁 어스름 안에 풍기고 있었다.


 가락시장은 예전의 물기 흥건하고 다소 너저분했던 모습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리만치 변해 있었다. 시장이며 상가 건물 그리고 지하철 역사 모두 신축되어 깔끔하고 낯선 느낌이었다.


 발걸음을 서쪽으로 돌리자 난데없이 솟아오른 뾰족산 같은 모습의 롯데월드타워가 보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전혀 견줄 만한 건물 하나 없이 생뚱맞은 그림. 자연스럽지 않은 압도감으로 다가왔다.


 서쪽으로 큰 사거리를 건너자 부동산 기사나 광고에서 몇 번 접한 적 있는 헬리오 시티와 마주쳤다. 어디 해외 메트로폴리탄에서나 있을 법한 호화롭고 세련된 아파트 단지가 보석상 불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논리적으로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떠 올랐다. 한때 강남 8 학군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부유한 동네로 이주해 전세살이를 하던 우리 가족. 자식들 교육을 생각해 부족한 월급을 쪼개고 쪼개 빚까지 얻어가며 살던 부모님. 덕분에 무리한 사교육까지 받는 혜택을 누린 건 자식들이었다.


 평소에는 그 연배의 남자 어른과 견주어 매우 자상하고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당신이었지만, 한 번 심사가 틀리면 거친 언사와 사나운 얼굴로 돌변해 먹잇감을 공격하는 맹수와 다름없던 분. 가족들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사소한 일로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며 가족들을 할퀴어 순식간에 인심을 잃던 분. 


 헬리오 시티의 고급스러운 자태와 어둠을 밝히는 여유로운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왜 이런 아버지를 떠 올린 걸까.


 오랜 해외생활의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요즈음 당신과 단둘만의 시간을 의도치 않게 자주 갖게 되었다. 지난주부터 어머니께서 친구분들과 멀리 여행을 떠나시게 되니 이래저래 여든이 다 되어 가시는 아버지와 딱 둘만 있게 되는 기회가 많았다. 당신도 그 시간이 서툴고 나도 마찬가지다. 또 어디서 틀어져 갈등이 생길까 하는 조바심 속에 당신을 대하는 내 얼굴이 종종 굳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잠자리에 들 무렵에서야, 과연 앞으로 중년의 아들이 노년의 아비와 단둘만 지낼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에 이르곤 했다. 사실 좋았다. 아버지와 느긋하게 둘만 있는 시간. 나이를 먹고 가정을 꾸리고 십여 년 전부터 해외로 나가 살면서 더더욱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아버지 혹은 어머니 두 분 중 한 분만 모시고 단둘이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빚을 져가며 자식을 키우시던 당신의 그때 나이에 바로 오늘의 내가 다다랐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지만,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작년 어느 날 아버지와 큰 다툼을 겪고 제법 오랜 시간을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서먹하게 지냈다.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했으나 아버지의 화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해외에 있으니 풀 수 있는 기회도 적긴 했다.


 당신이 아들에게 더 말을 걸고 더 자주 연락하시는 모습에 더는 어색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 또 어떤 지점에서 삐딱선을 타고 갈등을 겪게 될지언정 무서워 말아야 한다.


 거울을 보고  표정 연습을 조금 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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