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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Mar 13. 2016

H2

10년이 흘러도 20년이 흘러도

 그러니까 정확히 17년이 흘렀다. 


 아다치 미츠루의 H2를 만화책으로 만난 것이. 


 처음 그 가슴 떨리던 종이 속 주인공들을 만났던 때는 내가 스무 살 중반이었다. 제대를 하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던 나는 주말에 시간 여유가 생기면 근처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 보곤 했다. 그때 누군가의 추천으로 H2라는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나는 1권을 열자마자 금세 사랑에 빠져 버렸다. 


 네 사람의 주인공. 

쿠니미 히로(남자), 타치바나 히데오(남자), 아마미야 히카리(여자), 코가 하루카(여자)


 이 작품은 야구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야구 자체보다는 청소년들의 우정과 사랑을 담은 성장 만화이다.  H2를 찬양하는 수많은 팬들이 계시기에 감히 전체적인 평이나 감상을 다루기엔 겁이 조금 난다. 다만 오늘 이렇게 펜을 들게 된 것은 일본에 와서 드라마로 다시 만난 H2의 감동과 가슴 떨림을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만화책으로 볼 때 놀라웠던 점들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주인공들의 말보다는 비언어적 표현들과 그림을 통해 훨씬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H2의 어떤 장면으로 기억된다. 히로와 히카리였는지 히로와 하루카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두 남녀가 만화책 사각형 안에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응?" 하고 무언가에 대해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다른 한 사람이 무언가를 설명해 주는 대사로 처리되지 않고, 역시 "응?!" 하며 한 마디 하고 만다.  그리고 고교 운동장 하늘에는 뜨거운 여름 한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H2를 보지 못하신 분들은 공감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이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어떤 감정선을 타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경우가 있음을 이해할 거리 믿는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장면에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있다. 만화 속 주인공들 사이에서도 또한 주인공과 독자 사이에서도 말이다. 


  마흔이 넘었다. 실은 넘은 지 몇 년 되었다. 그리고 난 남자이다. 사십 대 중반의 남자. 


 나는 어릴 때 사십 대 중반의 남자라는 존재가 청소년들의 풋풋한 사랑과 우정 이야기에 감동하고 가슴이 짠하고 심지어 눈물방울까지 맺히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의 내가 그러고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소중해 글로까지 남기고 있는 것이다.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간단한 구조만 언급해 보겠다. 


  네 남녀는 동급생이다. 히로와 히데오는 서로 다른 학교에 재학 중인 고교 야구 선수이다. 히로는 투수이며 히데오는 타자이다. 히로와 히카리는 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고 쭉 이웃으로 살아왔다. 히로가 소꿉친구 히카리에게 자기가 아는 가장 멋진 친구 히데오를 소개시켜 준 후 둘은 애인 사이가 되었다. 넷 가운데 가장 늦게 히로를 만난 코가는 야구를 사랑하는 천진난만한 소녀이다. 코가는 야구부가 아닌 고교 야구 동호회의 매니저를 맡고 있다가 우연히 히로를 알게 되어 그를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히로는 소꿉친구 히카리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 있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달라지는 걸까? 아니 달라져야만 하는 걸까? 어른이 아이의 감성으로 울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천진난만하게 표현하는 건 어른답지 못하게 보이는 걸까?


  문득문득 7살 유치원생 시절의 내가 생각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내가 담임 선생님에 대해 평가하던 머릿속 대사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사회 초년생 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며 어떤 말투로 이야기했는지가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 


  근데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랑 다른 듯하면서도 너무도 똑같다는 데 조금 놀란다. 20살의 나와 지금의 내가 비슷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유치원 시절 혹은 초딩 시절의 나, 그때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의 나와 차이가 많이 안 난다는 생각에 이상하기도 하고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오늘 실은 우승을 목표로 참가했던 테니스 시합에서 예선 패배를 하고 돌아왔다. 파트너였던 일본 형님은 본인의 미스가 많아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미안하다 말했다. 만일 그가 미안해하지 않았더라면 난 화가 좀 났을 것 같다. 차를 타고 오면서 테니스가 아닌 다른 이야기만 실컷 하다 왔다. 다행이다. 


  다운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 집에서 H2의 주인공들을 드라마로 만났는데 오늘처럼 축 처진 상태일 때가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 혹은 책을 볼 때 더 깊이 빠져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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