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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Oct 24. 2019

바캉서 바캉서

베트남 호찌민에서

시간을 가로지르는 감정


 종합상사에 입사한 이후 처음 해외 출장을 갔던 나라가 베트남이다. 그게 이천 년대 초다. 북쪽의 하노이와 남쪽의 호찌민 두 군데를 방문했었다. 약 삼 년 동안 베트남 시장을 맡아 러시아와 중국 철강 반제품을 삼국 무역으로 베트남 철강사에 팔았다. 아마 2004년이 마지막 베트남 출장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번 방문이 십오 년만이다.


 시월의 베트남 낮 기온은 30도 초반으로 이미 한여름의 열기는 꺾어진 듯했다. 오래전 베트남을 찾았을 때는 한여름에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훨씬 더 덥고 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오랜만에 만난 호찌민 하늘은 제법  푸르렀다. 우기라고는 하지만 베트남에서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보게 될 줄 미처 기대하지 못했다. 낮동안 거리를 걸으면 다소 태양빛이 뜨겁고 후텁지근하지만 그늘은 꽤 시원했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숙소 근처를 거닐었다. 지인의 설명에 따르면 북베트남군이 사이공(현 호찌민)으로 쳐들어가 대통령궁을 함락하면서 전쟁이 북베트남(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는데 숙소 바로 옆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었다.  아버지가 해군으로 참전하셨던 베트남 전쟁은 늘 막연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지만 대도시의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한적한 공원처럼 보이는 그곳에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사연이 서려 있다는 사실이 시간을 가로지르는 감정을 자아냈다. 


 어머니는 오래전 내가 첫 해외 출장지로 베트남을 가게 되었을 때 말씀하셨다.

 " 베트남 가면 니 닮은 형님 있는지 잘 살펴보고 온나! "

 어머니 말씀을 심각하게 귀담아들은 건 아니지만 실제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생김새가 꼭 한국인을 닮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피부색만 조금 까무잡잡할 뿐 눈코입이 영락없는 한국 사람인데 베트남 현지인이라 했다. 오래전 한국 군인과 베트남 여인 사이에 태어난 라이따이한이라 불리던 자손들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랴. 중국인들과의 혼혈 자손들이 더 많지 않을까.

 

호찌민 오페라 하우스
호찌민 시청
통일궁 근처 거리
호찌민 1군 지역 퇴근길,  여섯 개 이상의 길로 이어지는 복잡한 도심이었다.
호찌민 시내 천주교 성당

 저녁을 먹고 숙소를 나서 주변 거리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관광 목적이 거의 없는 출장으로 왔기 때문에 어디를 꼭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저 산책 삼아 걸어도  충분히 즐거웠다. 많은 동남아 국가들의 도시 풍경처럼 이곳도 여전히 오토바이 부대가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마침 퇴근 시간대라 길을 건너려면 엄청나게 몰려다니는 오토바이 파도를 잘 헤치고 가야 했다. 까딱하면 오토바이에 부딪힐 것 같은데 그 수많은 인파와 오토바이 대군은 별 탈 없이 필요한 만큼만의 자리를 차지하며 시공간을 공존하고 있었다.


 Korea VS Vietnam Tennis Match!!!


 이번 출장길에도 테니스 라켓을 챙겼다. 이곳에는 테니스 지인이 없어서 미리 홍콩 교민 테니스협회장께 문의를 해 호찌민 테니스협회 관계자의 연락처를 받았다. 오기 며칠 전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 동호회 정모에 게스트로 참가 가능한지 물었다. 호찌민 동호회 총무는 흔쾌히 참가해도 좋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나의 숙소는 1군 지역인데 그 동호회는 7군 지역에서 활동한다고 했다.


 수요일 저녁 일찌감치 찾은 7군 지역은 한국 커뮤니티로 가득했다. 마치 광저우 웬징루 거리처럼 온갖 종류의 한국 식당과 학원, 미용실과 피부관리숍, 인삼가게, 슈퍼마켓 등이 줄줄이 들어서 성업 중이었다. 홀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살피다가 중국 요릿집을 발견했다. 저녁 7시를 조금 넘긴 시각인데 창문 너머로 손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리 인기가 많은 맛집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런 집에는 혼자 저녁 식사를 먹으러 들어가도 부담이 없어 문을 열었다. 한국인 사장께서 반겨 주었고  베트남 종업원들이 입을 맞춰 한국어로 인사해 주었다. 메뉴를 보다 김치볶음밥이 눈에 들어와 바로 주문했는데 우리 쌀과 달리 날아가는 안남미로 지은 김치볶음밥이 그릇에 수북이 쌓여  테이블에 놓였다. 이걸 다 먹으면 테니스 치기 힘들겠다 싶어 조금 남겨야지 하고 생각했다. 맛있었다. 겨우 이틀 지났는데 한국 음식이 이렇게 맛있다니. 먹다 보니 딱 한 숟가락 분량이 남았다. 흠흠, 테니스를 해야 하니 남겨야지.


 원래 테니스 모임이 저녁 8시부터라 들었는데 7시 40분쯤 문을 열고 들어간 테니스장에는 이미 많은 한국인 교민들이 모여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소개받은 호찌민 테니스 동호회 총무를 찾아 인사를 나누었다. 곧 게임이 시작되었다. 총무와 내가 한 팀을 이루고 다른 두 분이 대적해 주었다. 베트남에서 난생처음으로 테니스 시합을 하게 되어 매우 흥분되고 기분 좋은 긴장감이 들었다.


 첫 게임은 다소 싱겁게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게임이 끝나자 총무는 나를 다른 코트로 안내했다. 총 네 개 코트가 있었는데 한 개 코트는 베트남 동호회였다. 척 봐도 고수로 보이는 베트남 동호회원들이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양손 백핸드를 구사하는 선수들이 미스도 적고 매우 효율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게임이 끝나자 총무는 베트남 동호회원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바로 게임이 주선되었다.


 내 파트너는 아까 상대팀으로 나왔던 왼손잡이  플레이어였다. 탑스핀 스트로크가 제법 날카롭고 안정적인 구질이었다. 그러나 스피드가 다소 떨어지고 긴 랠리를 이어가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첫 게임은 우리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은근히 파트너의 미스에 아쉬움을 느끼며 속으로 남 탓을 했던 것 같다. 두 번째 게임은 베트남인 현지 동호회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으로 활동 중인 분과 페어가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곳에서 그는 음악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교민이 많다 보니 해외에서조차 이런 비즈니스가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배조 우승까지 했다는 오십 대 후반의 파트너는 고수였다. 우리는 베트남 팀에게 무려 6대 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베트남 복식팀은 경기가 끝난 후 악수를 나누며 우리 팀이 너무 강했다며 치켜세워 주었다. 


 세 번째 게임에는 더 강한 베트남 멤버가 들어왔다. 뉴페이스는 서비스 스피드와 파워에 있어 한 수 위였는데 오른손 스트로크에 묵직한 힘이 실리는 실력자였다. 방금 베트남팀을 상대로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이겼던 탓인지 우리 팀은 다소 긴장을 풀고 느슨한 경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첫 게임부터 세 번째 게임까지 내리 패배하고 네 번째 가서야 겨우 한 게임을 만회했다. 정신을 차리고 전세를 뒤집기로 마음먹었으나 결국 5대 2까지 끌려갔다. 나의 페어도 나도 멘털이 흔들렸고, 공을 받아치기에 급급하니 스스로의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예순이 다 되어간다는 내 페어는 발리 실수가 없었고, 대부분의 스트로크를 로브나 가벼운 터치로 잘 넘겨주었다. 정신을 다소 차리게 된 나도 특기인 '점프 서비스'와 '필살 스매시'를 살려 서비스 게임을 따내고 숨 가쁜 격전을 치르며 5대 5를 만들어냈다.  보통 6대 6의 상황에서 타이브레이크(7점 선취하면 경기를 끝내는 방식) 경기를 하기도 하지만, 이날 우리는 5대 5에서 타이브레이크 방식으로 마지막 게임을 하기로 했다. 베트남팀은 5대 2에서 세 게임을 내리 우리에게 내주고 매우 흔들렸다. 하지만 타이브레이크까지 간 상황에서 어떻게 쉽게 패배를 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건 이미 자존심을 건 국제 경기가 되어 버렸다. 코리아 VS 베트남. 베트남 VS 코리아. 나름 동호회에서 금배조 혹은 에이스로 평가받는 두 국대(국가대표) 팀은 7점을 먼저 쟁취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타이브레이크 경기는 서로서로 리드를 하고 당하며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접전을 연출했다. 랠리가 엄청나게 길어졌다. 상대가 우리의 스매시를 받아내고, 상대의 발리를 우리가 발리로 막아내며, 양쪽 선수들의 깊숙하고 날카로운 앵글숏이 쉽게 포인트로 이어지지 못했다. 주변에서 우리들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던 동회회원들로부터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아드레날린 치솟는 박진감 가득한 경기가 펼쳐졌다. 마지막 타이브레이크에 가서도 끝까지 박빙의 승부였으나, 결과는 우리 한국팀의 승리로 끝났다. 베트남인 상대팀은 경기가 끝나고 네트 앞으로 걸어왔을 때 친밀한 미소를 가득 지으며 퍽 즐겁고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다고 말했다. 손에 우정의 힘을 가득 실어 악수를 나누며 경기를 마감했다.  


사이공 대교 야경
스콜로 갑자기 빗물 차오른 도로
호찌민 2군 지역 테니스장



바캉서! 바캉서!!


 해외 출장지에서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숙소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이번 출장에도 특별한 일정이 없던 날엔 호텔 근처를 이 방향 저 방향 정해진 루트 없이 걸었다. 하루는 늦음 밤 근처 동네를 한 바퀴 휘이 돌다가 숙소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천둥과도 같은 함성이 들렸다. 깜짝 놀라며 문득 떠 오른 생각은 어디선가 시위가 있나 하는 거였다. 코너를 돌자 숙소가 보였고, 숙소에 더 가까워지자 연유를 알게 되었다. 근처에 맥주 가게가 있었는데 다소 허름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마침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국가대표 시합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는데, 다가가 선 채로 가게를 가득 메운 손님들과 양 사이드로 걸린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미 베트남이 두 골을 넣어 인도네시아팀에 2대 0으로 이기고 있었다. 방금 전 들었던 함성은 두 번째 골이 터졌을 때 가게 손님들이 한꺼번에 질렀던 탄성이었던 것이다. 서서 그 축구시합을 구경한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다시 한번 베트남의 골이 터져 버렸다. 뜨거운 열기가 후끈 폭발하며 가게 안팎이 들썩였다.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며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도 신나서 같이 박수를 치며 이 축제의 순간에 동참했다. 어떤 베트남 남성 하나가 가게 입구에 서 있던 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베트남 20대 남자: "바캉서! 바캉서!! "


나:  "  ?  "


베트남 20대 남자: " 바캉서! 바캉서!! "


 처음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떠 올랐다. 아, 박항서 감독! 그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아챘고, 박항서! 박항서!! 하고 외치며 친밀함과 기쁨을 표시했던 것이다. 마침 화면에도 박항서 감독이 클로즈업되었고, 그곳에 운집해 있던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엄지를 치켜들며 국대 사령탑 박항서 감독과 선수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인도네시아팀이 한 골을 넣어 시합은 3대 1로 베트남이 승리했다고 한다. 비록 한 골 먹긴 했지만, 3대 1이면 꽤나 좋은 성적이다. 보는 이들에게도 한 시합에서 네 골이나 작렬했으니 얼마나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경기였을까. 베트남에서의 박항서 감독 신드롬은 이미 오래전에 확인되었으나, 그저 미디어로만 접했을 뿐인데, 호찌민 길거리를 거닐다 이렇게 또 극적인 만남을 경험했다. 그날 맥주 가게에 비치된 TV 화면 속에 비친 그의 자그마하고 동글동글한 모습이 떠 오른다.  이 한 남자가 또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달으며 내 얼굴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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