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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Sep 23. 2019

지금의 직장을 떠나면 16편

[균열] 철강/비철 스크랩 트레이딩 이야기

[2017년 2월]


 B사의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나온 스테인리스 스크랩들은 보통 입찰을 통해 외부로 팔렸다. 태우인터내셔널의 키 크고 얼굴이 하얀 담당자 재키가 바로 그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것이었다. 레전드 스틸의 수출 본부장 이평안은 이 새로운 비즈니스에 관심이 쏠렸다. 재키에게 이번 달 입찰 물량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 재키는 하루 만에 인니 공장으로부터 입찰 대상 스크랩들의 스펙(Specification)과 사진을 받아 이평안의 이메일로 보내왔다.


304 HR 1,500mm  231.17mt

316 HR 780mm  35.05mt

400 Series Scraps  309.50mt

304 CR  1,200mm 111.12mt

309 1,500 x 1,500mm 37 pcs

310 1,700 x 2,100mm 15 pcs

...


 각 그레이드와 사이즈 및 톤수 등 정보가 엑셀 파일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종류가 많고 톤수는 몇 톤에서부터 몇백 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총톤수는 약 1,370톤에 달했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적절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면 레전드 스틸의 재고 관리와 판매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레전드 스틸 40년 역사상 한국 로컬 스크랩이 아닌 해외 물건을 수입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러나 젊고 의욕에 찬 대표와 실행력이 뛰어나고 자신만만한 수출 본부장은 의기투합했고, 적극적으로 이 새로운 시도를 밀어붙이기로 했다.


[2017년 5월 초]


 3월 첫 응찰을 시작으로 4월, 5월까지 세 차례 나름 공격적인 가격을 써냈으나 낙찰에 실패했다. 이평안은 재키의 업무 태도에 대해 큰 불만이 없었지만, 계속해서 낙찰에 실패하자 조바심이 느껴졌다.


"재키, 혹시 우리 가격이 이번에 얼마나 낮았던 거죠? 평균 가격으로 볼 때요. "


"본부장님, 제가 인니 담당자와 한 번 연락을 해서 좀 알아보겠습니다. "


 잠시 후 재키로부터 문자가 왔다.

< 우리 가격이 평균 JPY 155,000/mt FOB였는데, 5월 납기로 낙찰받은 곳은 엔화로 환산하면 약 JPY 158,000/mt FOB Jarkarta 였다고 합니다. >


< 흠, 상당히 높네요. 어떻게 그런 가격이 나왔을까요? 우리도 현재 수출하는 가격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써냈는데 얘네들은 손해 보면서 가격을 써낸 거 아닌가요? 낙찰받은 회사의 최종 판매 시장이 어딘가요? > 이평안이 문자로 재키에게 물었다.


< 아마도 인도향인 것 같아요. 인도가 대부분 가장 비싸게 사고 있거든요. > 재키가 답했다.


< 알았어요. 다음 달엔 우리 좀 더 공격적으로 입찰에 들어가 봅시다! 고마워요, 제키! >


< 죄송해요! 정말 신경 많이 써 주신 가격인데... 저도 현지 정보 좀 더 면밀히 파악해 보고 유월에는 진짜 낙찰받을 수 있도록 더 준비할게요! >


[2017년 5월 말]


" 대표님, 드디어 인도네시아 스테인리스 스크랩 낙찰에 성공했습니다! 총톤수 1,731톤으로 JPY 161,000/mt FOB Jakarta로 6월 말까지 선적 예정입니다. 20피트 컨테이너로 운반하려고 합니다."


" 와우!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이 본부장님,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비록 좀 비싸게 사는 거긴 하지만, 일단 낙찰한 데 의의를 두고 앞으로 이 소스를 잘 이용해서 물량을 늘려 봅시다. "


 이평안이 임전 대표에게 전화 보고를 했다. 30대의 젊은 대표는 낙찰 소식에 적잖이 고무된 반응이었고, 이평안도 흥분되는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2017년 6월 초]


 작년부터 드라이브를 걸었던 대만향 수출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삼천 톤의 계약이 체결되다가 올해 들어서는 거의 매달 삼천 톤씩 계약되었고, 최근에는 고급 철스크랩 두 개 그레이드가 한꺼번에 계약되어 처음으로 월 육천 톤이 팔렸다. 대만의 파트너사로부터 담당자와 함께 제강사 직원들이 방한했고 이평안이 한 고급 한식집에서 이들과 저녁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 영어와 중국어가 혼재된 대화가 오가고, 서로에 대한 호의로 가득한 좋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평안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는데 재키의 이름이 떴다. 대만 손님들에게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 이평안은 룸 밖으로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 오, 재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

" 본부장님!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

" 네? 무슨 문제요? 혹시 인니 입찰 건 관련인가요? "

" 네, 맞습니다. 우리가 낙찰받은 건 맞는데.. 그 며칠 사이에 엔 달러 환율에 변동이 좀 커져서 저희에게 주신 엔화 가격의 달러화 환산 가치가 좀 낮아졌거든요. "

" 흠...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

" 레전드 스틸에서는 이 계약을 취소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 계약을 하신 상황은 아니고, 또.. 예측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환율 변동 요인도 있고 해서.. "

" 아.. 이런... 참... 정말 어렵사리 낙찰을 받은 건데.. 혹시 이거 며칠 기다리면 환율 회복되지 않을까요? "

" 네, 저희도 그걸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 흐름이 좋지 않습니다. 만일 기대와 반대로 간다면 손실폭이 커지기 때문에 리스크가 작지 않습니다. "

" 허, 이런 난감하네요.. 일단 저도 좀 생각을 해 보고 저희 대표님과 상의한 후에 다시 연락드려야겠어요. "


 사안이 사안인 만큼 대표에게 바로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이평안은 생각했다. 손님 접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런 사고 건은 적시에 보고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 여보세요, 사장님? 저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

" 네, 말씀하세요, 본부장님. 무슨 일입니까? "

" 이번에 낙찰받은 B사 인니 STS(스테인리스)스크랩 건입니다만, 태우인터내셔널 담당자에 따르면, 이틀 사이에 엔화 가치가 많이 빠져서 오늘 일자로 달러 환산해 볼 때 톤당 10달러 이상 내려갔다고 합니다. "

" 네? 그래서요? 뭐가 문제인 거죠? " 임전 대표가 놀라서 이평안에게 다그쳐 물었다.


" 그러니까 우리가 태우인터내셔널에 제출한 가격이 톤당 161,000엔(JPY)였는데, 이틀 전 낙찰받았을 때 환율이 달러당 109엔이었습니다. 톤당 약 1,477달러였죠. 그런데 최근 이틀 사이에 달러당 109엔에서 달러당 110엔으로 엔화 가치가 떨어져 톤당 1,464불까지 떨어졌다는 겁니다. B사 입찰에 응시할 때는 무조건 달러 베이스로 가격을 제출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태우인터 담당자 왈, 엔화 표시 가격을 좀 더 올려야만 B사와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 이평안이 임전 대표에게 사건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 얼마 전에 저한테 분명히 낙찰받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대표가 이평안 본부장에게 물었다.


" 네, 맞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태우인터내셔널이 낙찰을 받은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태우인터에 제출한 JPY 161,000을 태우인터 측에서 USD로 환산한 가격인 USD 1,477/mt FOB Jakarta가 이번 입찰의 최고가였고, 그로 인해 태우인터내셔널이 6월 선적분 1,731톤을 낙찰받게 된 것이죠. 그런데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USD 1,464/mt FOB JKT로 떨어져 애초 가격보다 많이 내려간 셈이라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기 환율 변동 시 달러금액변동 차액 참고)  

 JPY 161,000 = USD 1,477 (109)

 JPY 161,000 = USD 1,463.6 (110)


 " 그건 태우인터내셔널이 책임지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미 낙찰받았는데 왜 가격을 또 올려줘야 하는 거지요? 태우 측에서 책임지라고 하세요. " 임전 대표는 짜증이 흠뻑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외쳤다.


" 대표님, 죄송하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하진 않습니다. 만일 우리 레전드 스틸 이름으로 USD 가격으로 입찰에 참여해서 낙찰을 받았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입찰은 우리가 직접 들어간 게 아니고 태우인터내셔널이 자기 이름으로 평균 가격 USD 1,477/mt을 제출한 겁니다. 따라서 낙찰가의 기준은 JPY 161,000/mt이 아니라 USD 1,477/mt이라는 거죠. 근데 지금 환율로는 도저히 이 가격에 못 미치니까 태우에서 우리더러 취소하든지 JPY 가격을 좀 올려달라는 요청입니다."


"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그런 문제 때문에 상사를 통해서 거래하는 거 아닌가요? 환율 변동 같은 건 상사에서 좀 책임지고 헤징하고 조심스럽게 진행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 임전 대표의 격앙된 목소리가 스마트폰을 타고 울려 퍼졌다.


" 사안이 좀 복잡해졌는데 태우인터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상황은 아닙니다. 태우는 오히려 우리한테 이 거래를 취소할 권한을 주면서 리스크를 지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B사와 태우인터내셔널은 USD 1,477/mt에 딜을 한 거지만, 우리는 태우와 JPY 161,000/mt에 딜을 한 건 아닙니다. 태우는 그저 우리를 위해서 엔화를 USD로 바꿔서 응찰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우리한테 미리 이야기도 했고요. "


" 아, 뭐가 그리 복잡한 거죠? 태우에서 JPY 161,000/mt에 진행할 수 있도록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사를 괜히 껴서 일하겠어요? 이런 거 중간에서 잘 처리하라고 거기 통해서 계약하는 거잖아요! "


 이제 젊은 대표는 이평안을 꾸짖고 있었다. 그가 대표에게 열심히 설명했지만, 대표는 들으려 하지 않았고, 손님이 기다리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화를 풀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통화시간은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방에서는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임전 대표는 이평안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 대표님, 지금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제가 내일 사무실 출근해서 자세히 설명드릴게요. 이만 전화 먼저 끊겠습니다. " 격앙되기는 이평안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는 끊임없이 쏟아내는 임전 대표의 통화를 차단하고자 비교적 강한 어조로 마지막 말을 내뱉고 수화기를 끊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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