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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Oct 28. 2019

스페인 여자

망고 디자이너

 홍콩에서 일요일 테니스 모임을 했었다. 이번 홍콩 방문은 전 회사의 홍콩 동료의 결혼식 참석차 간 것인데 토요일에 결혼식에 참석하고,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테니스 모임에 얼굴을 비쳤다. 칠 개월 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들을 코트에서 다시 만났다. 세 시간 정도 테니스를 치고 나서 예전처럼 아파트 입구 화단에 앉아 맥주 한 캔씩을 나누었다. 저녁을 느긋하게 같이 하고 싶었으나 마침 또 저녁 약속이 홍콩섬에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뒤풀이를 마치고 일요 테니스 모임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모임에는 고등학교 선배 부부도 있었는데 짧은 홍콩 체류 기간 중에 많이 친해졌고 홍콩을 떠나면서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저녁을 같이 못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을 표하며 떠나려는데 그 모임에서 아주 가까이 지내지 못했던 형님 한 분이 혹시 다음날 아침이라도 시간이 되는지 물었다. 오후 비행기였기 때문에 아침 9시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 말했다. 그 형님은 내가 홍콩에 결혼식 참석으로 가게 되었다고 단체 톡방에 기별을 했을 때부터 '앤디 대환영!' 하며 반겨 주었던 분이다. 그러면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고마운 말씀을 건네주었는데, 죄송하게도 전 회사 동료 등과의 선약으로 테니스 모임만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런 사정임에도 마지막까지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는 표현을 해 주셨고 결국 우리는 침사초이에서 만나 얌차(차와 딤썸 등을 나누는 간단한 광둥식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 한 번의 아침 얌차로 그 형님과 나는 아마 더 오래갈 특별한 인연으로 발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바쁜 월요일 아침 시간까지 쪼개어 잠시 홍콩을 들른 동생을 살갑게 챙겨주던 그분과 얌차를 나누며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정 많은 홍콩 시민권자로부터 들었던 비즈니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재구성해 본다.


[S의 이야기]

 십여 년 전 스페인으로 출장을 갔을 적이다. 주로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는 옷감 샘플을 들고 비행기를 탔다.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마드리드 공항에 내렸을 때 깨달았다. 샘플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샘플이 없으면 이번 출장은 의미가 없었다. 스페인 고객사와 한 시간 동안 말로 때우려고 그 먼길을 날아간 게 아니었다. 항공사 직원과 한 바탕 난리를 치고 물류 회사를 수소문한 끝에 D사와 극적인 해결책을 찾았다. 공항에 기다렸다 찾을 수도 있지만 일단 공항을 떠나기로 했다. 어차피 샘플 가방이 다른 비행기를 타고 오려면 나절 가까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D사는 샘플 가방을 미팅 장소에 직접 배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미팅할 때까지 샘플이 도착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믿을 수밖에.


 호텔에 여장을 풀고 조금 쉬었다가 동료와 함께 망고 본사로 향했다. 미팅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밖에서 담배를 좀 태우고자 했다. 1층 근처 정원에는 구름과자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특히 여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당시 나는 말보로 라이트를 피웠는데 옆에 있던 스페인 여자를 보니 레드였다. '여자가 레드를 태우는데 이거 좀 창피하네 ㅎㅎㅎ.'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막간을 이용해 급히 담배를 뻑뻑 태우고 있는데 말보로 레드 여인이 말을 걸었다. 스페인어로 말하는데 대충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 같아 꼬레아라고 답해 주었다. 자꾸 말을 시키는데 젠장 제대로 알아먹질 못해 답답했다. 아무튼 우리는 손짓 몸짓 대화를 동원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팅 시간이 다 돼 여인에게 바이바이하고 실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 어, 잘 가요. 난 미팅이 있어서 들어가요. " 말보로 레드에게 헤어지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여자는 영어로 하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자기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거였다. 나는 조금 당황하며 " No~~ No~~ Don't follow me~~ (안돼요~~ 안돼요~~ 따라오지 말아요~~)"라고 외쳤다. 하지만 여인은 웃으며 따라오는 게 아닌가. 웃는 얼굴에 침은 뱉지 못한 채 나도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여인을 쳐다보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를 지나쳐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졌다. 내가 오버했나 보다.


 기다리고 있던 일행과 만나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미팅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안에 사람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앗!


 아까 그 말보로 레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다. 하하핫. 그녀는 고객사의 디자이너였다. 이미 홍콩과 한국에서 한국인 거래처 사람들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밖에서 담배를 태울 때부터 내가 누구인지 그녀는 이미 짐작했던 거다. 당했다. 스페인 말보로 레드한테.


 우리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팅을 잘 마쳤다. 미팅 말미에 레드는 나에게 저녁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파티가 있는데 우리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오케이 했고 난생처음으로 스페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녁을 먹게 생겼다. 그런데 그날 나는 배가 고파서 죽는 줄 알았다. 저녁 식사라고 해서 대략 여섯 시 전후로 생각했는데 정작 만찬은 아홉 시가 돼서야 시작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인연으로 만났고 그녀는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은 큰 오더를 맡겨 주었다. 본래 기대했던 오더뿐 아니라 굳이 거칠 필요가 없던 홍콩을 경유하는 비즈니스까지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한국으로부터 직접 구매하는 건과 홍콩을 거쳐야 하는 건 모두 한 채널을 통하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1년 치에 해당하는 오더를 한꺼번에 맡겨 주었다. 마진율이 높지 않았지만 규모가 큰 오더였기 때문에 우리처럼 작은 공급자한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홍콩을 찾아 준 앤디 동생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래전 말보로 레드의 그녀가 떠올라 미소가 피어났다.


"앤디, 잘 가라! 이 이야기 글로 쓰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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