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홍콩섬 동쪽 매립 지대에 조성된 신도시 쩡관오에서 사립유치원 개원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높은 건물에 들어선 게 아니고 단층으로 넓은 땅에 시원스럽게 지어진 깔끔하고 다소 화려한 유치원이었다. 수많은 교실들 중간에 자리 잡은 넓은 홀과 무대에 성장을 하고 방문한 손님들이 북쩍였다.
무대 왼쪽 편에서 환영사와 개원식 축사를 하고 있는 중년의 여인은 이런 사립유치원 사업을 홍콩뿐 아니라 중국 남쪽에 걸쳐 꽤나 폭넓게 펼치고 있는 사업가 레이첼. 유치원 원장들의 모임에서도 그녀는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우연한 기회에 함께 한 얌차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홍콩에서의 유치원 사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체험하기도 했다. 교육 프랜차이즈 업계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보다 규모가 큰 유치원이나 학교 사업으로 외연을 넓혀가도 좋겠다는 다소 몽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인이 울렸다!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홍콩 유치원 교육 인사들 사이에 낀 채 이런저런 생각으로 옮겨 다니고 있을 때 핸드폰에서 소리가 울렸다. 전화 벨소리가 아니었다. 홍콩에 온 지 반년 가까이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라인으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일본에서 온 전화였다.
" 여보세요? 와, 정말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 네, 전 홍콩에서 일하고 있어요. ~~ 네네! 어떻게 하다 보니 전혀 다른 분야로 오게 되었네요. 사장님 사업은 잘 되시지요? 역시 스크랩 비즈니스할 때가 재미있었고 좋았어요. ~~~ "
그는 내가 일본에서 일할 때 우리의 스테인리스 스크랩을 키타큐슈에서 오사카로 운송해 주시던 트레일러 운전기사였다. 원래 그 일을 하던 분은 아니고, 개인 사정이 있어 가족들이 경영하던 철스크랩 야드 업체에서 나와 몇 년 동안만 생계를 위해 운송일을 했던 것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가족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였으나 막상 그 울타리를 벗어난 후에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직시했고, 자세를 낮추었다. 키타큐슈와 오사카 구간, 왕복 1200킬로를 고철을 싣고 거의 매일 오가는 고된 업무였지만 언제나 웃는 낯으로 일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일을 하다 보면 길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그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 운전석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겨울엔 기름을 아끼기 위해 차의 히터를 끄고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 노숙을 하기도 했던 그이다.
[2017년 여름 뜨거웠던 일본 키타큐슈]
2년 전 키타큐슈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그의 야드 사무실에 들러 말했었다. 혹시 나중에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철스크랩을 판매하고자 한다면 나를 찾아달라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만이나 베트남 혹은 기타 동남아 시장에도 판매 루트가 있으니 기회가 닿아 함께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아무런 기약도 없는 이야기였으나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비록 작별의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밝은 표정으로 길지 않은 시간을 마무리했다.
터널을 지나며
그 이후로 내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비교적 긴 실직 생활에 들어갔다. 원래 계획은 이직할 곳을 정하고 일본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었는데 일이 잘못되어 이직을 확정 짓지 못한 채 회사에 사직 통보를 하게 되었다.
[2017년 봄날 중국 수저우]
중국 수저우에 본사를 두고 있는 화학 회사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지원한 포지션은 수출 디렉터였다. 비록 철강 비철 분야는 아니지만, 종합상사에서 다양한 시장을 대상으로 트레이딩 경험을 쌓고 중국 주재 경험과 중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던 지인의 추천을 통해 그 회사의 부사장과 접촉이 되어 이력서를 보냈고 수저우 본사에서 면접을 하게 되었다. 상해를 통해 면접일 하루 전에 수저우로 넘어가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본사를 방문했다. 대표는 나보다 훨씬 어린 중국인 남성이었고, 부사장은 여성이었는데 내로라하는 세계적 스마트폰 기업 미국 본사에서 일하다 이 회사로 스카우트되어 왔다고 들었다.
면접은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나는 시종일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나의 이력과 함께 아시아, 유럽, 중동에 걸쳐 구매와 판매를 아우르는 트레이딩 영업력과 네트워크를 어필했다. 또한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중국어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에 능통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비록 화학 백그라운드는 아니지만, 아이템과 필드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 안에 학습을 통해 따라잡을 수 있음을 피력했다. 회사 경영진은 흡족한 눈치였는데, 임원 포지션으로는 처음으로 외국인을 채용하는 경우라 처우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한 듯했다.
수저우에서 면접을 마치고 키타큐슈로 돌아온 후 면접 결과와 함께 처우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기다렸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기별이 없었다. 한 주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2주가 지나도 간단한 메일이나 문자조차 없었다. 해서 본사의 부사장에게 위챗으로 가볍게 문자 안부를 물었는데 면접 전까지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메일로 조금 더 형식을 갖춰 면접 결과와 처우에 대해 문의를 했다. 실은 면접 결과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하는 당락에 대한 결과보다는 포지션과 처우에 대한 회신을 원했던 것이다. 입사는 당연히 결정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답변은 단 한 글자도 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점점 커진 나는 전화를 걸어 직접 확인하고자 했으나, 급기야 부사장을 포함한 회사 경영진은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은 물론이고, 회사로 전화를 걸어도 직원만이 응대할 뿐 원하는 대상에게 연결되지 않았다. 메모를 남겨도 소용없었다. 철저히 외면당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의 지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면접을 마치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나도록 피드백이 없다고 알렸다. 지인도 안타까워했지만, 회사가 직접 밝히지 않는 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길은 요원했다.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거의 포기 상태가 되었다. 조바심이 나고 점점 걱정이 깊어지고, 분노가 치미는 과정을 거쳐 희망의 끈이 가늘어지며 이제 그 회사와 나는 관계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즈음 미국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내용이기는 했으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심한 반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수저우의 화학 회사는 나의 경력과 능력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처우가 큰 부담이 되어 고민하다 포기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런 이유라면 어찌해서 내게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으면 당연히 고용 계약을 체결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일개 회사원 하나를 뽑는 일이라 그렇게 무신경하게 대응해도 된다고 믿는 자들이었는지 모르겠다. 중국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적잖이 당황했고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마저 경험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아직 이직을 확정하지도 못한 채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나 자신도 문제였다. 일이 잘 되었으면 평화롭게 흘러갔을 시간이었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일본의 회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섣부른 판단을 하고 결국 그 책임과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가족들과 앞으로 수저우로 이사를 가면 어떻게 살 것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이 참으로 우습게 되어 버렸다. 급여가 줄어들 테니 어떻게 대처할 것이고, 언제쯤 다시 원하는 처우를 받게 될 것인지 가늠하던 내 모습이 영낙없이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다.
[다시 2019년 초 홍콩]
수저우 이후의 삶은 마치 눈을 감고 길을 걷는 것과도 같았다. 도대체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물을 밝게 비추던 햇살은 사라지고 사방에 안개가 자욱했다. 당장 길거리에 나앉는 일은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비슷한 상상을 더해가고 있었다. 사십 대의 나이에 나는 쓰러지고 적자생존의 세상에 도태되어 낙오자가 될 것만 같았다.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가면을 쓰고 대했다. 마음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으나, 말과 행동은 여유가 있는 것처럼 제법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었다.
이력서를 마구 뿌려댔다. 매일매일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 보고, 키타큐슈 실업급여 지급센터에 가서도 정해진 날에 출석하는 한편 그곳에 마련된 단말기를 통해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심지어 여러 지인들이 모여 있는 SNS상에 이력서를 업로드하고 좋은 자리가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미국, 러시아까지 입사 지원을 시도했다. 놀라웠던 일은 그렇게 대책 없이 보이는 구직 행동에도 효과가 있었다는 거다. 놀랍게도 중고교 시절 친구를 통해 미국 켄터키주까지 가서 주정부 관청에서 면접을 보기도 했고, 앨라배마주까지 날아가 국내 제철 회사의 해외법인 근무를 위해 면접할 기회도 얻었다.
켄터키주의 평화로운 호수에서
퇴사 이후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감도 늘었지만 맷집도 좀 는 것인지 처음의 상태와는 달리 하루하루의 삶에 여유가 붙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고 느끼다가 생각하지도 못한 길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상상하지도 못한 곳으로 나의 삶이 이어지는 걸 경험했기 때문일는지도.
그렇게 돌고 돌다가 가까스로 이직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것도 평생 일했던 무역 분야가 아니라, 교육 비즈니스를 하는 곳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반 세기 가깝게 교육 기업으로 역사가 제법 긴 회사의 홍콩 및 중국 화남지역의 현지 교육사업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가족과 지인들 대부분이 나의 변신에 놀라워했다. 그 변신은 스스로에게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고, 홍콩으로의 파견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기대가 컸고, 다시 한번 삶의 에너지 게이지가 최고치에 달하는 듯했다.
본사에서 몇 달 동안 물갈이를 하듯 완전히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조직의 문화도 전혀 달랐다. 조직을 이루는 사람들의 결도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나 반년 가까이 적을 두지 못하고 방황하던 내게 이 새로운 일자리는 얼마나 큰 기쁨과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새로 알게 되는 동료들과도 전에 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인연을 만들어 나갔다. 결국 본사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일터, 홍콩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희망의 신호탄으로 보였으나,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깊은 시름의 시작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