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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Dec 31. 2019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

 오랜만에 네 살짜리 아이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고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보통은 아이의 엄마가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책으로 같이 복습하곤 합니다. 저는 아주 가끔 아내의 부탁을 받고 영어 공부를 봐주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오늘이 아주 드문 바로 그날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저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아이가 모국어인 중국 표준어와 외가 쪽인 광둥어를 또래에 비해 빨리 익혀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재능이 꽤 있는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지요. 영어도 별 거 아니라 생각하고 일 년 전부터 동네의 한 미국계 학원에 아이를 보내어 영어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내심 다른 아이들에 비해 습득이 빠를 거라 생각했고  처음엔 외향적인 아이가 그럭저럭 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의 영어 교육이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채 시간이 금세 흘렀습니다. 그냥 아이의 엄마에게 맡기고 아빠인 저는 마치 남의 일인 양 지냈던 겁니다. 가끔 아이가 엄마와 함께 단어를 읽고 간단한 문장까지도 말하는 걸 보며 어린 나이에 벌써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학원에 다닌 지 거의 일 년이 되는 오늘 저녁에 그동안 배운 책 세 권을 가지고 처음부터 쭈욱 훑어보는 복습을 해 보기로 했지요. House, boy, girl, mom, dad, baby 등 단어를 읽어 보도록 시켰습니다. 제법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어 Hello, I am a girl, I am a boy 따위의 표현까지 무사히 넘어가더군요.


 다음엔 집이나 집안의 물건과 관련된 단어들이 나오네요. Door, window, sofa, table, chair and TV 등등. 그리고 그림을 보면서 간단한 문장을 말하게 했어요. This is my door, Open the door, Shut the door, This is my house와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까먹은 단어도 있고, 소유격 my를 빼먹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괜찮아 보였습니다.


중국 광저우 소재 한 영어학원 수업 풍경

 문제는 화장실 혹은 욕실과 관련된 챕터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Hands, face, soap, toothbrush, bathtub and toilet과 같은 단어를 읽게 했는데 toothbrush와 bathtub에서 걸렸습니다. 이 두 단어는 영어를 오랜 시간 사용한 어른인 제가 해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음을 듣고 따라 해서 읽는 연습을 몇 번 시키고 넘어갔습니다.


 이어지는 문장 연습에서는 Wash your hands, I wash my hands, wash your face, I wash my face와 같은 표현들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wash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want라 말하기도 하고 계속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않는 거였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wash, wash, wash를 반복해서 익히게 한 후, 다시 문장을 읽어 보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아이는 다시 워~워~라고 앞쪽 발음만 낸다든지 want로 잘못 말하는 걸 반복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자꾸 걸리자 아이는 그다음으로 넘어가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일단 이걸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아이가 반복해서 익히도록 종용했습니다. 아이의 자세가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몸을 비틀고, 엉덩이를 들썩거렸고, 손을 자꾸만 꼼지락 거리기도 했습니다. 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한 문장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자꾸만 잊는 아이에게 질책했습니다. " 또 잊은 거야?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같이 말이죠. 아이는 책만 쳐다보고 손만 꼼지락거리면서 입을 닫았습니다. 그런 태도가 못마땅해서 아이에게 똑바로 앉으라고, 지금 노는 거 아니라고, 손가락 장난치지 말라고 다그쳤습니다. 아빠와 신나서 영어공부를 시작하던 딸의 어깨가 푸욱 가라앉았고, 의기소침해진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방에서 우리가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소리를 듣고 았던 아내가 살짝 나와서 분위기를 살피더니 다가와 잠깐 쉬었다 하자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구세주를 만난 듯 표정이 밝아지더군요. 저도 그 이상 가르치는 게 위험하다고 느껴졌고, 답답하고 힘이 들었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고 물끄러미 아이와 영어책을 바라보았습니다.

 ' 오늘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아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속으로 남의 부모를 은근히 힐난하던 나였는데. 오늘 나의 태도는 나을 게 하나 없었네. 권위적인 걸 그렇게 싫어하던 나였는데, 오늘 난 딱 그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아빠였어.'


 다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 특히 영어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 관심사이고 매우 경쟁적인 성격이 강한 걸 교육시키고자 할 때의 부모 된 자로서의 마음과 태도에 대해.


 아직 전 자식을 교육시키려는 부모로서의 자질이 모자람을 깨닫습니다. 이 시점에서 나를 그토록 잘 가르치고자 애쓰셨던 내 어미와 아비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의문까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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