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철 트레이딩 스토리
새로운 일본 야드와 일을 시작하면서 대만향 수출이 급격히 늘었다. 대만에는 오래전부터 협력하고 있는 파트너가 있는데, 담당자가 꽤나 똘똘하고 일을 잘한다. 벌써 그 대만 친구와 일한 지 6년이 되어가니 서로 일하는 스타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상당히 신속하고 편하게 협력하고 있다. 나보다 약 아홉 살 정도 손아래이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외국 친구라 나이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고 서로 합리적이고 편하게 일하고 있다.
철스크랩(고철)은 그것을 공급하는 야드(Yard)도 중요하고, 또 구매하는 바이어도 매우 중요하다. 굳이 둘 중 어디가 더 파워가 있는지 가르자면, 물론 철강을 제조하기 위해 철스크랩을 구매하는 제강사 쪽에 힘의 우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매달 수만 톤에서 수십만 톤의 철스크랩을 국내에서 조달하고, 수입산으로 부족한 물량을 채워야 하는 제강사이기 때문에 철스크랩 공급처를 쉽게 대할 수는 없다. 특히 품질이 안정적이고 물량도 어느 수준 이상으로 꾸준히 공급하는 업체라면 안정적인 원자재 조달을 위해 제강사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 회사나 대만 파트너는 공급처인 야드도 아니고, 바이어인 제강사도 아니다. 우린 그 둘을 매개하는 거간꾼이다. 고철(철스크랩)이 필요한 제강사가 Inquiry(구매 문의)를 보내오면, 우리는 그 Inquiry에 맞는 물건을 공급할 수 있는 공급처를 찾아 Offer(견적)를 받아낸다. 그리고 구매자와 협상을 하고, 다시 공급처와 재협상을 하면서 적정 가격의 계약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아무튼 대만 친구와는, 수년을 이런 식으로 일본 공급처와 대만 수요가(바이어) 사이에서, 함께 힘을 모으고 협력해 무수한 계약을 성사시키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때때로 클레임을 맞아 머리를 맞대고 고생하며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이 많았다. 우리 회사에 있어 대만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장이 되었고, 대만 파트너가 속해 있는 회사에도 공급처로서의 일본은 비즈니스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종합상사에서 일할 때, 우리 물건도 없고 우리가 직접 구매하는 것도 아닌 트레이딩(무역) 비즈니스만 주야장천(주구장창) 하다 보니, 언제쯤이면 확실한 우리 물건으로 견적을 내고 당당히 팔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매번 공급처 비위를 맞춰 어렵게 Offer를 받거나, 반대로 수요가 쪽에도 고개를 숙여 Inquiry를 받아 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을 떠나 현재 독립해서 일하고 있는 지금은 상사맨으로서 일할 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우리가 파는 철스크랩이 우리 회사 물건은 아니지만, 우리 회사가 공급처의 Sole Agent(일정 시장에 대해 단독 판매대행권을 갖는 자)가 되어 일하기 때문에 마치 제조사가 자기 물건을 파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일할 수 있다. 예전에는 Offer를 받고 나서도 공급처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가격을 변경하거나, 선적 시기를 임의로 조정하거나 하면서 바이어와의 협상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반대로 바이어한테 Firm Bid (확정적인 구매의사 가격)를 받지 못하고 대략 가격 Idea정도만 듣고 불안하게 공급처와 협상에 임하거나, 그마저도 없이 대략적인 시장 가격을 감안해 공급처에 가격을 제시하면 나중에 구매자가 예상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해 곤란을 겪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Sole Agent로서 공급처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마치 우리 회사 물건을 Offer(견적 제시)하듯이 확실하게 구매자한테 견적을 제시할 수 있어 상당히 자신 있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확실하게 견적을 제시할 수 있는 물량을 가진 쪽은 파워가 생긴다. 대만 파트너에게는 예전부터 거래하던 미국 공급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몇천 톤 단위의 Bulk Cargo가 아니라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는 수백 톤 규모에 불과했고 서류 작업에 손이 많이 가고, 클레임 이슈가 잦은 편이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일하면서 클레임도 별로 없고 한 계약이 3~5천 톤에 달하는 심플하고 큰 물량을 거래하게 되면서 대만 파트너사에 매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대만 파트너는 나와 우리 공급처를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애썼고, 실제로 안정적이고 좋은 대만의 대표 제강사들과 장기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대만 친구의 이런 공로와 기여에 대해 늘 감사하고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
일이 많아지다 보니 매출이 늘어 좋지만, 자연스럽게 이슈들도 많아졌다. 이슈는 다양한 거래 과정에서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 예를 들면, 계약을 위해 견적을 주고받으면서 커뮤니케이션 착오로 이쪽은 300불에 오케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상대방은 300불이 오케이가 아니라 그 이하 혹은 그 이상이다 하는 식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신용장을 언제까지 열고, 물건을 준비하고, 통관절차를 밟고, 선적항 검수기관을 섭외하고, 선박을 수배하고, 공급처와 수요가로부터 선박에 대한 동의를 얻고, 선적을 진행하고, 선적서류를 작성하고, 은행에 보내고, Payment를 진행하고, 하역항에서 다시 검수를 진행하고, 클레임을 제기하고, 정산을 하는 등등 수많은 단계 단계에서 크고 작은 이슈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슈는 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경을 쓰게 만든다. 특히 공급처나 수요가와 관련해 비용과 이익이 걸려 있는 이슈들은 Agent를 피 말리게 한다. 대만 친구와 6년 동안 수많은 풍파를 겪고 파고를 잘 지나왔지만, 거래 건수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이슈로 인해 서로 신경이 예민해지는 경우들이 더러 일어나게 되었다.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나와 대만 친구 사이에서 파워의 균형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물량을 쥐고 있는 내쪽에 힘이 더 실려 있는 편이다. 더구나 거래의 대가로 받은 Commission이 수요가가 아니라 공급처에서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힘의 우위가 형성된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미생'에서도 잘 표현되었던 것처럼, 힘을 가진 자는 그것을 덜 가진 자 위에 군림하게 되기 쉽다는 사실을 말이다. 겉으로는 상생이다, 윈윈이다, 협력 파트너다 하면서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동등한 관계가 아니며 누군가는 누군가를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 대만 친구의 관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싫었다. 방송국 초년생 시절, 종합상사에서 일할 때, 일본 야드에서 일할 때, 교육 회사에서 일할 때부터 싫었다. 성당에서 테니스 클럽에서 혹은 불특정 다수가 만나는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방에 의한 일방에 대한 불합리한 억압과 권위적인 태도가 매우 거북했고, 자주는 아니지만 수위를 넘으면 폭발했고, 논리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그 지위와 나이 혹은 재력 등에 의한 억압에 항거했다. 그랬던 나이기에 내가 힘의 우위를 가지는 경우에도 부디 그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머리를 깎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나는 대만 친구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우리 물건의 선박을 찾아 주는 선사 담당자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사각사각 머리카락 자르는 가위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최근 나의 언행,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나 태도 혹은 언어 표현에 대해 떠 올렸다.
Andy (공급처 측 대리인, Agent for Supplier side)
Chris (대만 파트너, 트레이더)
09:30
" Chris! The supplier agreed to change the vessel. So pls discuss it with the buyer accordingly! "
" Ok, let me talk to them. Andy! "
12:38
" Andy, the shipping documents didnt' arrive in Taiwanese bank yet. They said what they got from Japan is not yours but seems the other supplier's one. "
" Hmm. Ok let me discuss it with Japan side to reply to you. By the way pls check with the buyer for the vessel change issue asap! "
" Yes, we already talked to the buyer. Awaitng now! "
15:30
" Hi, Andy! The buyer will pay for the pending order once they've got the shipping docs from bank side. "
" Ok, Chris! We are also checking with Japanese nego bank to track the location of the documents. "
" Good, pls tell me if you got any info from Japan side. "
" Got it. How about the vessel issue? Kindly get the vessel confirmation asap. "
" Andy, There is some procedure to go... so it will take time. Will update you. "
" Well... I see.. Maybe it is not easy for you to talk to your buyer. This is not a complicated issue. I do not know whether it is so hard to the buyer. (음.. 알겠어요. 아마 크리스가 바이어한테 말하기 어려운가 보군요. 이건 그리 복잡한 일도 아닌데, 바이어한테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난 모르겠네요. )"
"No no no! Andy, it's just a regular procedure. To get the approval, it should pass 3~4 pm. So it takes time! "
Andy (화주 측 대리인, Agent for shipper side)
Brenda (중국 대련의 선사 담당자)
" Well, Andy! Actually even if the vessel gets delayed, we cannot cancel the vessel contract unless the vessel fails in laycan period. Other shippers usually accept some delayed schedule if it falls into the laycan period. (음, 앤디! 사실 배 일정이 지연되더라도, 만일 그 배가 선적항에 들어가는 일정 조건을 맞추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면, 선박 계약을 취소할 수 없어요. 다른 화주들은 보통 선정항 입항 일정 기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배가 좀 지연되더라고 그냥 받아들입니다. ) "
" Then pls work with them, Brenda! (그럼 그 사람들하고 일하세요, 브렌다!) "
" Oh, no no! Andy, What I told you is just for your reference. I understand you cannot allow long laycan. We will try utmost to cooperate and support. (오, 아니 아니에요! 앤디, 제가 말씀드린 건 그저 참고하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긴 선적항 입항 기간을 주실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요. 우리는 협력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할 겁니다.) "
여러 대화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위의 두 가지 대화만 보아도 나의 태도가 좀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선사 담당자와 나눈 두 번째 대화는 솔직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화를 하기 전에 우리는 배 하나를 취소하고 새로운 배를 찾았는데, 이유는 전 선박의 일정이 하루 이틀 늦어지더니 급기야 8일에서 11일까지 지연되어 공급처의 선적 일정이 완전히 어그러질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선사 담당자는, 이전 배가 계약 위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취소가 매우 어려웠지만, 여러 방법을 동원하고 선주를 잘 설득해서 느려진 배를 취소시키고 새로운 배를 찾아 주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나에게 위의 대화 내용처럼 배경 설명을 말한 것이다.
그 말에 내가 응답한 표현이 고작 " 그럼 그 사람들하고 일하세요! " 였다. 아후! 쫌생이! 내가 봐도 참 속 좁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일종의 힘의 과시가 아닌가. 이 말인즉슨, '당신 그렇게 원칙 따져서 일하고 싶으면, 그런 거 잘해 주는 회사랑 일해라~' 뭐, 이런 말이었던 거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상사, 나이로 찍어 누르려는 어른들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이 많았다. 왜 그렇게 역지사지가 안 되고, 왜 그리 일방적이고 비합리적인가 하며 울분을 토로하던 때가 있었다. 같이 서로 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면 얼마나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을까 하며 아름다운 관계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이제 40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는 손아래의 거래처 담당자들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감이 상하는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그 외국인 거래처 직원들은 이미 나를 '꼰대'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누군가의 언행과 태도에 불편을 느끼고 있다면, 상대를 탓하는 이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나는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절망적인 건 아니라 믿는다.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희망은 있다.